설교와성경공부
창세기 강해25-아브라함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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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하나님

창세기 11:27-12:4

 

창세기 강해 25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127절부터 124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홍수 심판이 끝나고 인류는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서 저마다 도시를 만들고 도시를 중심으로 도시국가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곳곳으로 흩어진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지를 지으시고 홍수를 세상을 심판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왜 그랬을까요? 창조주 하나님은 그 어떤 형상도 없으셨기에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자신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닌 우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 보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분명한 형상을 가진 우상을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만들고 자신들의 도시를 지켜주는 우상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위한 거대한 신전을 만들기 시작 했습니다. 지난시간에 살펴보았던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은 단순히 높이 쌓은 탑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 도시마다 만든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신이라며 형상을 가진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고대 사회는 우상의 형상이 더 크면 클수록 더 위대한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도시마다 자신들의 위한 더 큰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더 큰 우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거대한 우상을 모시기 위한 거대한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은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었던 탑이라기보다는 시날 평지에 세워졌던 여러 도시들이 만들었던 자신들이 만든 우상들을 위한 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전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신을 모신 곳을 신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거대한 우상을 만들고 더 나아가 우상을 위해 거대한 신전을 만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신전은 말 그대로 신이 사는 집을 뜻합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우상 신을 위해 신전을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이 만든 우상 신이 자신들을 떠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집에서만 영원히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가능한 가장 크고 화려하게 신전을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이 자신들이 만든 신전에 만족해서 신전을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심지어 우상 신들이 배고파서 신전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매일같이 가장 좋은 제물들을 바쳤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위해 신전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성전 신앙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결코 사람이 만든 집에 모셔 두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건물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은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이 지은 건물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지은 건물에 하나님을 결코 가두어 둘 수 없기에 사람들에게 성전을 허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2: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물라고 하신 성전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다시 세우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예배당 건축을 성전 건축이라고 하며 더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짓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헌신이며 사명이라고 교인들을 부추깁니다. 교인들 역시 크고 아름다운 교회 건물을 짓고 그런 건물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마치 대단한 헌신과 믿음이라고 착각하며 신앙생활 합니다. 물론 건물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이기 위해서는 건물이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것이 훨씬 편리합니다. 하지만 크고 화려하고 비싼 건물을 짓고는 그 건물을 신성시하거나 거룩하게 여겨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거나, 강단을 제단으로, 교회의 비품들을 성물이라고 여기는 것은 매우 심각한 신앙의 왜곡입니다.


교회건물을 거룩하다고 여겨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몰라서 저지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이고 고의적이며 악의적인 신앙의 왜곡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전시대로 더 나아가 바벨탑의 우상숭배 시대로 역행하는 매우 심각한 신앙의 퇴행이자 영적 타락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만든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11:45]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성경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사람이 만든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만든 건물이나 물건들만 거룩하게 여기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이 거룩해 지려면 희생하거나 포기해야 할 것이 많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거룩해지고 경건해지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만든 건물이나 물건을 거룩하다 여기는 것으로 거룩해 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고전3: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바벨탑 시대의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우상 신이 다른 도시의 신들보다 더 위대하고 강력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른 도시의 신들보다 더 거대한 우상의 형상을 만들고, 다른 도시의 신전보다 자신들의 신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으로 자신들이 믿는 신이 다른 신보다 더 위대하고 강력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며 믿음입니까! 그런데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와 교인들은 여전히 고대인들이 저질렀던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더 크고 화려하고 비싼 예배당을 지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다른 교회보다 더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지으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른 교회 교인들보다 더 크게 복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드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람이 살던 곳은 바벨탑이라는 불리는 거대한 우상의 신전이 있었던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라는 도시였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훗날 바빌로니아 제국의 조상이 됩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는 바빌로니아의 우르라고도 합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우르라는 지역에서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막내아들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습니다. 성경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에 대해 다른 신들을 섬겼던 사람 즉 여러 신들을 섬겼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탈무드에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를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24:2 그 때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소. 옛날에,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많은 교인들이 아브람이 태어난 곳이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지역이기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을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은 우르가 아니라 하란이라는 도시였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맏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래 그리고 막내아들 하란이 죽기 전에 낳은 아들 롯과 그의 며느리를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고향 우르 땅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원래 가고자 했던 가나안 땅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이라는 도시에서 머물러 살다가 거기서 205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일부 성서학자들 중에는 데라가 가나안 땅을 향해 가다 중간에 머물러 살던 하란이라는 지역을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 아들 하란을 기념하여 부른 지역라고도 합니다.


11:31-32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본래 가나안 땅으로 가려던 데라가 왜 하란이라는 곳에 주저앉아 거기서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해서는 창세기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나안 땅을 향하던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머물러 살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명하십니다. 아브람을 부르시어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던 곳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모하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살던 모든 삶의 기반과 기득권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거기가 어딘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주신 약속 하나만 붙잡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익숙하고 편리한 세상과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과 삶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출발이라고 믿습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렇다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브람은 이미 아버지 데라를 따라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여러 친척이 살던 우르 땅을 떠나 하란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란에는 자신과 조카 롯 그리고 아버지만 살고 있었습니다. 데라가 아브람을 70살에 낳았고,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가 75살이었으니까 아브람이 아버지 집을 떠날 때 아버지 데라의 나이는 145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늙은 아버지를 홀로 남겨두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기존의 삶의 모든 방식과는 완전히 단절하고 새로운 삶, 새로운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11:26 데라는 일흔 살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12:4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 다섯이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 말씀에 담겨진 진짜 의미는 네 고향과 아버지가 섬기던 여러 우상 신들을 믿는 신앙을 버리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을 믿으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신들을 섬기던 아버지와 우상 숭배의 도시 우르와 하란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만 믿는 민족을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는 창세기 121절 이하의 말씀은 여러 신들을 섬기며 우상 숭배로 가득한 나라와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포이십니다.


물론 아브람을 부르시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이 말씀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여러 신들을 섬기는 다신론의 세상에서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으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람이 태어난 고향 우르와 그가 살던 하란은 온갖 종류의 신들을 믿는 다신론의 세상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데라 역시 여러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세상과 환경에서 자란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람이 이전에 섬기던 모든 신들에게서 떠나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살던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지역과 하란 지역은 그 어떤 지역 보다 여러 신들이 섬기는 우상 숭배가 발전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아브람 당시 고대인들은 여러 신을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물론 이러한 풍습은 지금까지도 여러 민족과 종교들에게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힌두교나 샤머니즘 신앙에서는 수천이 넘는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여러 민족들의 신화들을 보면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신들이 있었고 심지어 사람들마다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자신들만의 수호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대인들은 더 많은 신들을 섬기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모든 신들은 다 믿으려고 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신들에게까지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신들을 모시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하다고 믿었던 고대 사회에서 유일하신 단 한 분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한 분이신 창조주를 믿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창조주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 믿는 이유를 하나님이야 말로 세상의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전능하신 가장 능력이 많으신 신이기에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도 아니며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신론의 믿음에서 유일신의 믿음으로의 전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주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신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라는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의 후손들을 큰 민족이 되게 하시고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셔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섬기는 여러 신들이 있고 사람들이 여러 신들을 섬기는 이유는 남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만 잘 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신은 자신만의 신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여러 신을 믿는 다신론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믿음을 요구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웃의 하나님이기도 하시며 모든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한 분이신 하나님은 나만 잘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피해를 주시는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만 잘되기를 도우시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잘 살기를 바라십니다.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사람 또는 미워하는 사람들조차 잘 되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신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잘 되므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받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잘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건강한 사람이 병든 사람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5:45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말씀을 마칩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아브람처럼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나를 통해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만 잘되고 남은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코 기독교 신앙의 유일신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이웃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며 우리교회 모든 공동체의 하나님이시며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과 탐욕에서 벗어나 이웃을 위해 그리고 더 많은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부르셔서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살던 세상과 삶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과 삶을 위해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다고 믿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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