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을 부르시는 하나님
창세기 12:1-12:9
창세기 강해 26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2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아브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창세기 11장까지는 천지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인간의 타락에 대한 거대담론의 말씀이었다고 한다면, 창세기 12장부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에 대해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12장은 아브람을 부르시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그 분을 믿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에 머물러 살고 있던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네가 살고 있는 땅에서 떠나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새로운 땅, 미지의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하신 땅은 아브람의 친척들과 아버지가 있는 집이었다면, 아브람에게 가라고 하신 땅은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 12장 5절에서 아브람이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갔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라고 하신 땅은 가나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며 가나안 땅이라는 특정한 지역을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부르심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어 그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가나안이라는 특정한 지역으로 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어 그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땅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가나안은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를 떠난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가려고 했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무슨 이유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닌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가나안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믿었던 우르의 여러 우상 신들은 아버지 데라가 선택하고 결정한 것을 무조건 도와주는 우상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는 우르를 떠나면서도 우르의 여러 우상 신들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을 부르시어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아브람의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이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라면 무조건 도와주는 우상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은 아브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그것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사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에 신비한 능력이나 성분이 있어서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지거나 사람을 타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것을 제멋대로 먹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느냐 아니면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람의 순종을 요구하신 말씀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는 창세기 12장 1절 이하의 말씀은 여러 신들을 섬기며 우상 숭배로 가득한 나라와 사람들 가운데서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포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내가 선택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발적으로 내가 선택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내 뜻과 소원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기를 원하시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결코 하나님이 내게 가장 유리하고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의 선택과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므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건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를 부르신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인류의 역사를 지속해 나갈 사람이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노아가 선택받고 부르심을 받은 것은 노아가 당시 세상의 여러 사람들과는 달리 완전한 사람이며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사건은 아브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인이거나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시는 명령의 말씀이라면, 2-3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람의 후손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며, 아브람에게 복을 주어 그의 이름을 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망일 것입니다. 자녀들이 잘되고, 복을 받아 자신의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소망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은 단순히 아브람을 위한 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 그의 후손을 번성케 하고 그에게 복을 주어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이유는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셔서 그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람과 그의 후손들에게만 하나님의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은 아브람과 그의 후손만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시어 그의 이름을 크게 하시는 이유는 그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메타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단지 나만을 위한 선택과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이유는 나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복만을 위한 믿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을 복주기 위한 믿는 믿음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땅의 모든 족속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브람의 믿음은 더 이상 아버지 데라와 같은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차원의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땅의 모든 족속과 연결된 “공적”인 차원의 삶과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의 말씀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버지와 친척들을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던 아브람의 믿음,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따른 아브람의 믿음이 결국 아브람으로 하여금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복을 전달하고 믿음의 조상, 축복의 통로가 되게 만든 것입니다.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수없이 많은 신을 있다고 믿었던 아버지 데라의 다신론의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사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신론 신앙은 신이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신들 가운데 사람이 자신에게 가장 맞는 신 또는 자신이 가장 원하는 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신론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이나 사적인 신앙의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람의 신앙은 절대로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분이신 하나님은 결코 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은 내 뜻과 소원이라며 무조건 이루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내 뜻과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은 사적인 신앙과 공적인 신앙을 바르게 구별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사적인 신앙과 공적인 신앙을 구별하기 위해선 먼저 사적인 것이 무엇이고 공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직 폭력배는 자기 조직의 모든 힘과 능력과 재물을 자기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집단입니다. 조직에 들어가지만 하면 철저히 지켜주고 보호하고 책임져줍니다. 그러나 조직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함부로 여기거나 철저하게 이용합니다. 조직 폭력배는 비록 개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지만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사적인 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사람들만 챙기고 다른 이들에게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해를 끼친다면 그 집단은 크기와 상관없이 지극히 사적인 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특정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국가나 종교나 교회는 조직 폭력배 집단이란 별 차이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해서 전쟁에서 이겼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전쟁에선 진 나라로부터 수많은 물자를 빼앗아 오거나 그 나라의 사람들을 노예로 데려와 부려먹는다면 대단히 큰 이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었으니 이것을 공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비록 우리나라에는 이익이 되겠지만 침략당하여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에게는 우리나라의 승리가 재앙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개인의 이익을 국가의 차원으로 확장한 데 불과하므로 본질적으로는 지극히 ‘사적’인 일입니다. 내가 속한 나라만 생각하고, 나라와 나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것은 공적인 일이라 할 수 없고 지극히 사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과 사는 어떤 행동의 혜택이 나와 내가 속한 집단에만 돌아가는지, 아니면 모든 이에게 고르게 돌아가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나치의 유익을 위해 유대인들을 학살한 이들은 비록 자신들은 국가라는 공적인 영역에 종사했다고 생각하시만 저들이 행한 일은 지극히 사적인 일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순사로 일한 사람들은 조선을 지배하는 일본제국을 위한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들의 숨겨진 속내는 사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공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나 자신,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속한 나라만 아니라, 내 이웃, 내 교회와 함께 존재하는 다른 공동체나 교회 더 나아가 내 나라와 함께 존재하는 다른 나라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타인의 삶을 빼앗고 무너뜨리는 비참한 일을 저질러 왔습니다. 개신교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그의 유명한 책에서 애국심에 대해 설명하기를 애국심이란 개인의 희생적 이타심이 국가이기주의로 전환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국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나 다양한 집단에도 그대로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소위 한국 사회에 여러 문제를 일으키는 대형교회를 다니는 교인들 개인과 이야기를 해보면 그렇게 순수하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일 수 없습니다. 이기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이들이 교회라는 거대한 집단으로 행동할 때면 한국교회나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교회만 잘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교회가 잘돼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 장수중에는 천주교를 열정적으로 믿었던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군대 18,700여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그가 조선을 침략하였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불신자의 나라 이교도의 나라 조선을 정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끄는 군대는 다른 왜군들과는 달리 십자가 군기를 달고서 전쟁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워 그 어떤 왜군들보다 더 잔혹하게 조선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과연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침략과 정복을 통해 영광 받으셨을까요? 그가 믿었던 하나님은 성경이 가르치는 한 분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과 탐욕이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입니다.
나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가 되는 일, 내 교회에는 이익이 되지만 한국교회에는 피해가 가는 일, 내 나라에는 유익이 되지만 다른 나라에는 재앙이 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일이라고 할지라도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성경은 반복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하기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공의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만의 어는 한 교회만의 어느 한 나라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의 모습은 공의로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찾으시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신32:4]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잠21: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에서 변변찮은 문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변방 가나안으로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에게 땅을 주시고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까? 대부분의 경우 특별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 혼자만 누리는 이익이나 특권과 연관하여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해서 부르셨을 때 저들은 자신들의 부르심을 자기들만 누릴 수 있는 이익이나 특권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턴가 목사나 교인들 중에는 자신들의 소명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사명이라고 여기기보다 남들과는 다른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이유는 남들과는 다른 특권을 누리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해서 그를 통해 모든 민족들을 복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신앙을 통해 남들보다 더 많은 이익과 특권을 누리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삼아 나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내 이웃을 복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시는 믿음과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