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창세기27-아브람의 실수와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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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실수와 수치

창세기 12:10-12:20

 

창세기 강해 27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210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아브람의 실수와 수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얼핏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의 연속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성경은 굳이 기록했을까?” 이런 의문이 들 정도로 좀처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람에게 일어난 수치스러운 사건을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사건입니다. 오히려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읽게 함으로 과연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이 들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창세기가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남긴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비록 먼 훗날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람이지만 아브람 역시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먼 훗날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아브람이 노아처럼 당대에 최고의 의인이며 완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여러 실수와 죄로 얼룩진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단순히 아브람의 실수와 수치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딘지도 모른 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땅으로 간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입니다. 아브람의 부르심(calling)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신들을 믿었던 아버지 데라의 신앙을 버리고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의 전환입니다.


다신론의 신앙에서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전환은 그저 여러 신들에게서 오직 한 신만을 믿기로 선택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 신들을 믿는 다신론의 신앙에서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의 전환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이 차이를 제대로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형식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신앙의 내용은 여러 신을 믿었던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신앙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신앙에 머무르게 됩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신들만을 골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고르고 선택한 신들을 위해 정성껏 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고르고 선택하여 정성껏 제물을 바쳤던 신들은 어떤 신들일까요? 자신의 소원을 가장 잘 들어주는 신들 또는 자신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는 신들이었을 것입니다. 데라가 신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정성껏 제물을 바쳤던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소원과 번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아버지 데라가 믿었던 여러 신들과는 전혀 다른 신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자신이 믿을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믿었던 신은 자신의 아버지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아브람의 소원과 계획을 이루어 주기 위해 아브람을 부르시고 나를 믿고 따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아브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에게 신은 자신의 소원과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분이었습니다. 반면에 한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브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에게 주신 창세기 121절의 말씀입니다. 누구의 소원과 뜻을 이루느냐는 것은 다신론을 믿는 신앙과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의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차이입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너무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그 신앙의 형식을 보면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신앙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뜻은 상관없고 오로지 자신의 소원과 뜻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내 욕망과 욕심이 만들어 낸 가짜 신을 믿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나의 유익만을 위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부르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삼아주시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은 믿음은 우리 모두를 위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땅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인도하신 곳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을 걸쳐 도착하였던 가나안 땅에 맹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든 것입니다. 그야말로 너무나 심각한 기근이 들어 도무지 거기서 정착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브람은 하란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버려두고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람이 원해서 온 곳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라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가나안 땅에 심각한 기근이 든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땅으로 왔지만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풍요로운 길로 또는 형통한 길로만 인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지 그저 우리를 풍요로운 길 형통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땅히 가야 할 바른 길이 심지어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크고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문 좁을 길로 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나님께서 430년을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히브리인들을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이 저들이 노예로 살던 이집트 땅보다 훨씬 더 풍요롭기 때문에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가야하는 길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이 저들이 노예로 살던 이집트 땅보다 더 풍요롭기 때문에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비록 모든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는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것이 노예로 풍요롭게 사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에 저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자유교회로 부르신 것도 같은 뜻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가나안 땅에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기근이 들자 아브람은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정말 여기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땅이 맞는가?” 아마도 이것은 누구나 가지는 불안이며 고민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길을 가고 옳은 일을 하면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릴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만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바른 길을 가려고 하면 할수록, 옳은 일을 하면 할수록 세상사는 일이 더욱 힘들어 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 내 기대대로 안 된다고 조금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닥친 기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마침내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닥친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이집트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향하는 아브람의 발길은 결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닥친 기근을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의 수단이었습니다. 창세기는 이집트로 향하는 아브람에 대해 설명하기를 오로지 기근을 피하기 위한 아브람의 선택이었음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12: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얼핏 당장의 기근을 피해 풍요로운 이집트를 향하는 아브람의 선택이 대단히 지혜로운 결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당장의 기근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땅을 떠난 아브람의 선택과 결정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의 시작이 됩니다.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을 때, 아브람의 마음에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아내 사래가 너무나 아름다워 이집트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이집트에서는 비록 남의 아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맘에 들기만 하면 힘으로 빼앗을 수 있었던 사회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말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아내의 미모가 이제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 어느 순간 자신을 가장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아브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구별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두려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아내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까? 아니면, 아내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까?


아브람의 두려움은 아내를 빼앗긴다는 두려움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이 생각해낸 것이 무엇입니까? 이집트 사람들에게 사래를 자신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속이자는 것입니다. 물론 사래는 아브람과 결혼하기 전에는 아브람의 이복누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숨을 걸고 책임져야 하는 아내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합니다.

 

12:12-13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아브람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래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은 이집트의 왕 바로는 아브람에게 많은 물질과 짐승을 주고는 사래를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그야말로 아브람은 아무런 항변도 못하고 자신의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물론 그 대가로 바로에게 엄청난 재산을 받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아내를 빼앗기 대가로 받은 엄청난 재산은 아마도 그를 더욱 비참하고 수치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당장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 했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아브람에게나 사래에게나 이 사건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수치스럽고 비참한 기억일 것입니다.


12: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아시다시피 아브람은 훗날 히브리의 민족의 믿음의 조상이 되고 그의 아내 사래는 히브리 민족의 어머니로 불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창세기는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하여 후대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읽도록 했습니다. 성경은 도대체 왜 그토록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였을까요? 두고두고 읽고 마음에 깊이 새겨 결코 잊지 말고 살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도대체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간 아브람이 이집트의 권력자에게 자신의 아내를 빼앗긴 사건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힘 있는 자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던 아브람과 힘 있는 사람에게 강제로 원치 않게 아내가 되어야 했던 사래의 비참한 처지는 약소민족이나 나라 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지금도 겪으며 살아야 하는 비참한 처지를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내 누이, 내 아내를 빼앗겨본 경험이 있는 민족과 그런 사람들은 사래의 이야기를 그 어떤 사람들보다 가슴 절절히 읽을 것입니다.


이집트 제국은 기근을 피해 살려고 자신들의 나라를 찾아온 아브람과 같은 난민들에게 결코 우호적인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예쁜 여자라도 있으면 반드시 빼앗으려고 들었던 제국이었습니다. 우르에서 하란, 하란에서 가나안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을 여행하면서도 아내의 아름다움에 대해 단 한 번도 염려하지 않았던 아브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기근을 피해 이집트 땅에 들어가면서부터 아브람은 자신을 죽이고 자신의 아내를 빼앗아갈 것을 염려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이집트 제국이 어떠했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는 아브람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기 때문에 사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기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래가 아브람의 누이가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였다면 바로가 사래를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걱정했던 것처럼 아브람을 죽이고 사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을 것입니다. 비록 바로가 아브람에게 많은 물질을 주고 사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지만, 하나님은 이 일로 인해 바로와 그의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진 힘을 이용해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는 것을 악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견디지 못한 바로는 아브람을 불러 그를 책망하고는 그의 아내 사래를 데려가라고 합니다. 바로의 아내가 되었다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시 돌아온 사래를 아브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람은 바로의 아내가 되었던 사래를 다시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그 많은 실수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비록 사래가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바로의 아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남의 아내가 되었던 사래를 아브람이 다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사래를 아내로 받아드리고 그녀와 함께 이집트를 떠납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아브람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죄입니다. 창세기 20장을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민족의 조상이라는 의미의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고, 그의 아내 사래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의미의 사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고는 그랄 땅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또 다시 자신의 아내 사라를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갔을 때처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랄 왕이었던 아비멜렉이 부하를 보내어 사라를 아내로 삼으려고 데려갑니다.

 

20:2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도대체 그토록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실수를 하고도 아브라함이 똑같은 실수를 그대로 반복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도 아브라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를 보면 대부분 이전에 저질렀던 비슷한 실수를 반복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까요? 아브람은 아내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되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입니다.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실수를 하고는 아무리 눈물을 쏟으며 후회한다고 해도 결국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후회가 아니라 이전의 방식과 생각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설교 첫머리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성경이 아브람과 사래의 비참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아브람의 실수와 비겁함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한 분이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힘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힘없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남의 것을 빼앗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힘 없는 자들,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마음이 상한 자들이 겪는 아픔과 상처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상처 받은 채 돌아온 사람을 우리가 가슴으로 품어주고 맞아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현실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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