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선택, 다른 믿음
창세기 13:8-18
창세기 강해 30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다른 선택, 다른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땅에 엄청난 기근이 들었습니다. 당장의 기근을 피하려는 생각에 풍요롭게 보이는 이집트로 피난을 갔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수치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간섭으로 아내를 되찾은 아브람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기며 얻은 수치스러운 재물 덕분이었습니다.
아브람과 함께 이집트로 갔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이전보다 더 재물이 많아져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브람과 조카 롯의 불어난 재물은 저들로 하여금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롯이 부유하지 않았을 때 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부유해질수록 두 집 사이에 갈들이 심각해졌습니다. 명심해야 할 사실은 부는 우리를 너그러운 사람이 되게 만들기 보다는 이전보다 더 탐욕스런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창13:6 그러나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는 좁았다. 그들은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가 없었다.
어린이들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왕의 머리를 깎아 주는 이발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었던 매우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왕의 머리를 깎고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 나라에서 신비하다고 알려진 나무 밑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황금이 담긴 단지 일곱 개를 갖고 싶지 않은가?” 이발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또 다시 똑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솔깃한 말에 이발사는 “그럼요. 당연하지요. 백 번 천 번을 물어보셔도 갖고 싶습니다.”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른 집으로 가보아라. 집에 가면 황금이 담긴 일곱 단지가 있을 것이다.” 이발사는 단숨에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도착해보니 놀랍게도 정말 황금이 담긴 일곱 단지가 마당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발사는 너무 놀라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곱 개의 단지 가운데 단 한 개의 단지만 황금이 절반만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밤 이발사는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발사는 왜 잠을 이루지 못했을까요? 너무 행복해서요? 아니요. 너무 아쉬워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이발사는 황금으로 가득 찬 여섯 개의 단지를 깊숙이 숨겨 놓고는 절반만 차 있는 단지를 끌어안고는 밤잠을 못 이루며 고민을 했습니다. 밤새 고민 끝에 이발사가 생각해 낸 것은 절반밖에 차지 않는 한 개의 황금 단지는 자신의 노력으로 가득 채워 넣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일곱 개의 단지를 다 채워야만 정말로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발사는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들을 팔아 금을 사서는 절반만 채워진 일곱 번째 항아리에 부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단지는 여전히 절반만 찼을 뿐 가득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째 단지를 채워야만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 이발사는 허리띠를 졸라매며 자신과 가족까지도 굶어 가면 저축을 했다. 그리고 모은 돈을 모두 황금으로 바꾸어 다시 단지에 채워 넣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황금을 가져다 넣어도 좀처럼 일곱 번째 단지는 가득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단지를 채워야 한다는 욕심에 왕에게 이발비를 올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왕은 흔쾌히 이발비를 두 배로 올려주었습니다. 왕에게 받은 돈으로 황금을 사서 단지에 넣었지만 여전히 단지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일곱 번째 단지를 채우지 못하는 걱정과 실망으로 이발사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갔고 얼굴표정도 꼴이 아니었습니다. 이발사의 변화를 눈치 챈 왕이 물었습니다. “이발비를 적게 받았을 때보다 두 배로 받는 요즘 네 얼굴이 훨씬 더 나빠 보이는구나. 혹시 일곱 개의 황금단지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
이발사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왕이 알고 있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왕에게 물었습니다. “임금님 제가 7개의 황금단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도 황금단지 일곱 개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일곱 번째 단지를 채우지 못해 오랫동안 괴로워했는데 너도 일곱 번째 단지를 채우지 못해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 아니냐?”
이발사는 왕에게 물었습니다. “임금님은 어떻게 일곱 번째 단지를 채우셨습니까?” 그러자 왕이 대답하기를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가지고도 나 역시 일곱 번째 단지를 채우지 못했단다. 일곱 번째 단지를 채우는 유일한 길은 그 황금 단지를 깨버리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예전에 누렸던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탐욕은 아무리 채어도 도무지 채울 수 없는 일곱 번째 단지와 같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채우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탐욕을 깨뜨릴 때에만 비로소 탐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제안합니다. 서로 싸우며 함께 사느니 차리라 따로 떨어져 살자고 합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자신은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으로 가면 자신은 오른쪽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아브람의 제안은 결코 쉽지 않은 제안이었습니다. 큰아버지인 아브람이 먼저 자신이 살 땅을 선택하고 조카 롯이 다른 곳을 선택하게 한다고 해도 롯은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신이 원하는 땅을 먼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조카 롯에게 그가 원하는 땅을 먼저 고를 수 있도록 양보한 것입니다.
창13:9 네가 보는 앞에 땅이 얼마든지 있으니 따로 떨어져 살자.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아브람의 양보와 롯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먼저 양보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선의를 알아주고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먼저 양보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진심을 알고는 상대방도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상대방의 양보를 선의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마땅히 자신이 누려야 하는 권리로 여깁니다. 양보하면 고맙게 여기기보다 호구로 여기는 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양보했다고 롯이 감사하지 않습니다. 큰 아버지 먼저 선택하라고 자신에게 준 우선권을 양보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내가 먼저 손해 보거나 양보한다고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으니까 절대로 손해 보거나 양보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선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손해를 감수하거나 양보 하는 것은 나의 선의로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손해보고 희생하고 양보하면 상대방이 변화될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자기 변화와 성숙을 위한 노력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일 선한 일 하고 상처받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롯은 아브람의 양보를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받아들입니다. 롯은 자신 앞에 놓인 땅을 바라봅니다. 롯이 바라 본 땅은 요단 들판이었습니다. 요단 들판은 당대 최고로 비옥한 땅이라 여겨졌던 이집트 땅에 버금가는 비옥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던 땅이었습니다. 롯은 당장에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땅을 선택한 것입니다. 롯은 비록 눈을 들어 바라보았지만 그가 본 것은 당장에 보이는 풍요로움만을 보았습니다. 그가 바라본 풍요로운 곳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곳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롯의 안목과 믿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창13:10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한 것이 마치 주의 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아직 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오늘날 교회에는 롯과 같은 교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추구하는 가치와 삶은 세상 사람들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의식, 삶의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롯이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아브람과의 관계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성한 들판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롯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란 세상에서 더욱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전보다 더 부요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부르신 것일까요? 만약 더 부요하게, 더 풍요롭게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브람은 결코 갈대아 우르를 떠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브람이 살던 우르 땅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인도하신 가나안 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요하고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우르는 훗날 바벨로니아 제국을 만들었던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라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무려 430년 동안이나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을 통해 세계 최강의 나라로 만들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오. 세계 최강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집트의 하나님이 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최강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 나라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나라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 되셨고 저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주는 복은 우리를 세상에서 부자로, 세상에서 성공한 자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그리고 그 믿음이 주는 복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세상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세상이 소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소원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풍요롭게 더 대단한 인생을 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카 롯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땅을 양보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라” 하십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창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조카 롯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땅을 양보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이 눈을 크게 뜨고 보는 모든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의 자손을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믿음이란 당장 눈에 보이는 풍요가 아니라 당장 손에 쥘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창13:15-16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믿음의 능력에 대해 말할 때 더 큰 성공을 얻는 것, 더 오래 사는 것,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더 많은 부를 쌓는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굳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우상 신을 믿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성취 가능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힘은 결코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힘은 평화를 위해 당장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며, 탐욕에 끌려 다니지 않는 부요함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매이지는 않는 자유, 어떤 우상도 섬기지 않는 자유, 어떤 탐욕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 내일에 대한 염려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믿는 진짜 복이며 진짜 능력이며 진짜 힘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누린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전보다 더 큰 성공, 더 높은 명예, 더 많은 부, 더 강한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만족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이었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부유함으로부터도 자유 할 수 있었고, 가난으로부터도 자유 할 수 있었습니다. 명예로부터도 자유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분이 약속한 것 외에는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우상도 섬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빌4:11-13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십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바라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로부터 모든 미덕이 나옵니다. 져줄 수 있는 여유,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넉넉함, 고난 가운데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평강, 실패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저력, 깊은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지혜, 악한 자의 성공을 시기하지 않는 배짱,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는 결기,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이런 것들은 모두 믿음이 주는 자유의 힘에서 나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은 힘겨운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의 위세에 주눅 들거나, 힘겨운 세상살이로 인해 영악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더욱 너그럽고 선한 자가 되어 어떤 일을 만나도 잘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시는 땅이 따로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만이 진정한 자기 것입니다. 탐욕으로 어두워진 눈을 크게 뜨면 지금껏 몰랐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땅을 보게 됩니다.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나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을 보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