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창세기 14:1-16
창세기 강해 31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창세기의 말씀은 얼핏 읽어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 핵심 줄거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소돔에 살던 아브람의 조카 롯이 소돔을 침략한 나라에 의해 붙잡혀 갑니다. 조카 롯이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람이 자신의 군대를 데리고 가서 롯과 롯의 빼앗긴 재산을 되찾아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핵심 줄거리는 이처럼 아주 간단하지만 창세기는 이 사건을 간단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주변 정세와 상황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생소한 나라들과 왕들의 이름 그리고 여러 지명들이 등장하여 핵심 사건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되어버렸습니다. 굳이 이렇게 자세하게 주변 정세와 상황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처럼 보입니다.
창세기 14장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북쪽의 네 나라 즉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연합하여 남쪽의 다섯 왕들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북쪽의 네 나라 왕들과 전쟁을 벌인 남쪽 다섯 왕들은 롯이 정착하였던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소알의 왕 벨라였습니다.
북쪽의 네 나라와 남쪽의 다섯 나라가 전쟁을 벌이게 된 이유는 남쪽의 다섯 나라가 12년 동안 북쪽의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13년째 되는 해에 남쪽의 다섯 나라 왕들이 지금까지 자신들이 섬겨 왔던 엘람왕 그돌라오멜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자 14년째 되는 해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북쪽의 네 나라와 연합하여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지나가는 가나안 땅의 모든 족속들을 점령하며 남쪽 다섯 나라로 침략해 왔습니다. 북쪽 네 나라의 침략에 맞서 남쪽 다섯 나라는 싯딤 벌판에서 진을 치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남쪽 다섯 나라의 반란은 결국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북쪽 네 나라 연합군은 남쪽 다섯 나라의 반란은 평정한 것입니다. 북쪽 네 나라 연합군은 가나안 지역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모든 재물과 식량을 빼앗고 심지어 롯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의 모든 재산까지 빼앗아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북쪽 네 나라 연합군에 붙잡혀 가던 사람 하나가 도망쳐서는 아브람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조카 롯이 북쪽 네 나라 연합군에게 잡혀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람은 롯을 구출하기로 작심합니다. 자신의 병사 318명을 데리고 롯을 구하려 쫓아갑니다. 비록 롯이 자신이 아들처럼 여기는 조카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데리고 있는 318명의 병사만으로 북쪽 네 나라 연합군을 쫓아가서 구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 단이라는 지역까지 쫓아갑니다. 아브람이 살던 헤브론에서 단까지는 120마일이 넘는 먼 거리입니다.
창14:14 아브람은 자기 조카가 사로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 삼백 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쫓아갔다.
물론 아브람은 자신의 병사 318명만 데리고 간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 자신과 동맹을 맺었던 마므레와 아넬과 에스골 족속과 함께 북쪽 네 나라 연합군을 쫓아갔습니다. 이들은 모두 형제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이끄는 연합군으로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연합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북쪽 네 나라 연합군은 그야말로 단숨에 가나안 일대를 점령한 최강의 군대였습니다. 아브람의 연합군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선 것입니다.
창14:13 거기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 하나가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 때에 아브람은 아모리 사람 마므레의 땅,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마므레는 에스골과는 형제 사이이고, 아넬과도 형제 사이이다.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사람들이다.
단까지 쫓아간 아브람의 연합군은 야간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아무도 자신들을 대적할 수 있는 적은 없다고 여긴 북쪽 연합군이 무방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틈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한 것입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아브람 연합군의 공격에 북쪽 연합군은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고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의 기습공격에 큰 피해를 입은 북쪽 연합군은 북쪽으로 급하게 도망쳤습니다. 아브람은 도망치는 북쪽 연합군을 쫓아 다메섹 북쪽 호바까지 쫓아갔습니다. 호바까지 쫓아간 아브람의 연합군은 북쪽 연합군이 잡아간 조카 롯과 재산은 물론이고, 남자 포로들과 부녀자들 그리고 저들이 빼앗아간 모든 재물까지 되찾았습니다.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4장 1절부터 16절까지의 주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제가 제시했던 문제로 돌아가서 도대체 창세기 14장은 왜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였던 사건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주변 정세와 상황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과연 TMI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가 그토록 자세하게 당시 주변 정세와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14장은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과 세상 권세와의 싸움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권세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선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는 사건에 대해 창세기 14장이 가나안 지역과 그 주변 정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어떤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세상이 어떤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는지를 알아야만 비로소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특별히 스스로 신실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나 목사들을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맨날 기독교 방송이나 설교 방송만 보려고 하지 세상 뉴스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맨날 성경책만 읽지 세상 문학이나 학문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마치 대단히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착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숨을 쉬며 살고 있는 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세상에 발을 딛고 숨을 쉬며 살아가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아갑니다. 심지어 세상과 또는 세상 사람들과 벽을 쌓고 사는 것을 마치 순결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교회만 알고, 교회생활에만 충실 하는 것이 신실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어떻게 되는 상관하지 않고 24시간 예수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 거룩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런 믿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믿음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세상과 담을 쌓고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세상에 속해 살면서도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진짜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중세 시대 한 수도원의 수도사가 북아프리카에 유명한 성자가 있다고 해서 성자를 만나기 위해 성자로 알려진 사람을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오랜 여행 끝에 성자로 알려진 사람을 만났지만 수도사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사가 만난 성자는 자신이 기대했던 성자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수도사가 기대했던 성자는 수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며 성경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신비한 비밀을 가르쳐 주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만난 성자로 알려진 사람은 길거리에서 구두를 수선하는 지극히 평범한 나이 많은 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크게 실망한 수도사는 한편으로 도대체 구두를 수선하는 평범한 노인이 어떻게 그토록 유명한 성자로 이름이 났는지 궁금했습니다. 수도사가 구두를 수선하는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칭송하는 성자가 되었습니까? 구두를 수선하는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사람들이 왜 저를 성자라고 생각하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한 것이라곤 구두를 수선한 것밖에 없지요. 저는 손님들이 구두를 맡기고 가면 그 구두가 예수님의 구두라고 생각하며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 구두를 수선했을 뿐입니다.”
얼마 전 식구들과 함께 Good Doctor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라는 직업이 참 좋아보였습니다. 같이 드라마를 보는 아내에게 말하길 “의사라는 직업은 세상의 수많은 직업 중에서도 참 좋은 직업인 것 같아”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대뜸 말하길 “의사도 좋은 직업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모든 직업은 다 좋은 직업이야! 의사만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얘기야!” 순간 대단히 뻘쭘했지만 아내의 말에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특정한 직업만이 좋은 직업이거나 거룩한 직업이 아닙니다. 나쁜 일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의 직업은 다 좋은 직업이며 거룩한 직업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예배나 기도회, 성경공부나 단기선교에 같은 종교적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히 거룩하고 선한 일로 여기면서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거나, 아이를 양육하거나 직장에 다니는 것은 그리 거룩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로 여깁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물론 어떤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어떤 태도와 마음을 가지고 하느냐가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일은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목사라고 무조건 성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목사라는 직업이 성직이 될 수도 있고 시정잡배보다 못한 사기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20세기 위대한 신학자로 알려진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칼 바르트의 주장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실상 또한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해석하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던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세상의 현실은 결코 떼어놀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신 것은 세상을 등지고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삶을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까? 세상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모르고서는 결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알고 있지만 손자병법에 기록된 정확한 말은 지피지기 백전불태라고 합니다. 그 뜻은 상대방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상대방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세상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 지를 정확하게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떤 원리로 돌아가지를 모르고서는 절대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얼핏 창세기 14장의 말씀은 불필요할 정도로 자세하게 가나안 주변 정치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창세기 14장은 기록된 가나안 주변 정치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아브람과 롯이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어떤 원리로 유지되고 돌아가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4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북쪽 지역 네 나라의 연합군과 가나안 남쪽 지역 다섯 나라 연합군의 전쟁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세상의 질서는 무엇입니까?
가나안 남쪽 지역의 다섯 나라들은 북쪽 지역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12년 동안 섬겼다고 했습니다. 남쪽 지역의 다섯 나라들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겼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남쪽 지역 다섯 나라들에게 대단한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엘람이 자신들보다 힘이 센 강대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12년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가나안 남쪽 지역 다섯 나라들이 13년째 되는 해에 그돌라오멜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들에게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섬기던 남쪽 지역의 다섯 나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어떻게 했습니까? 북쪽의 네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가나안 지역을 침략해서는 가나안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킨 남쪽의 다섯 나라들을 쑥대밭으로 만듭니다. 특히 반란에 앞장섰던 소돔과 고모라는 일말의 자비나 용서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모든 재물과 양식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이 와중에 소돔에 정착해 살던 아브람의 조카 롯마저 포로로 잡혀 가고 모든 재산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당장의 풍요를 선택했던 롯의 비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북쪽 네 나라의 연합군과 가나안 남쪽 다섯 나라의 전쟁이 보여주는 세상의 질서와 원리는 무엇입니까?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정복하고 약탈하며, 힘없는 자는 힘 있는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장 강력한 질서와 원리는 약육강식(弱肉强食)입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부자가 가난한 자를, 권세를 가진 자가 권세 없는 자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빼앗는 약육강식의 현실이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엄중한 현실입니다.
전쟁은 단지 나라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며, 직원들 사이에도 전쟁이 일어나고 부부 사이에도, 형제 사이에서도 고부 사이에도 심지어 거룩하다고 하는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서로가 자기가 옳다면서 전쟁을 벌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고 물리며, 배신과 배반이 반복되는 지옥 같은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더욱 불행한 사실은 세상에서의 전쟁은 늘 힘이 있거나, 돈이 있거나, 세상 권세를 가진 사람이 이기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4장은 북쪽 네 나라 연합군과 가나안 남쪽 다섯 나라 연합군의 전쟁을 통해 더 힘 센 놈이 전쟁에서 이긴다는 약육강식의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약육강식의 세상 질서에 아브람이 반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나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의 질서를 정확하고 알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따라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세상의 질서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세상의 질서에 휘둘리며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남쪽 다섯 나라 연합군이 북쪽 네 나라 연합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약육강식의 현실을 보면서도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들처럼 여기는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북쪽 네 나라 연합군을 쫓아갔습니다. 그렇다고 무모하게 정면 대결을 펼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는 북쪽 네 나라 연합군이 방심하는 틈을 타 한 밤중에 기습공격을 하여 이겼습니다. 아브람은 주변 정세와 상황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거느린 군대로는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주는 능력은 우리를 세상에서 부자나, 성공한 자, 또는 힘 있는 자로 살게 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주는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누구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믿음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신 우리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