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창세기 15:1-6
창세기 강해 34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함께 읽은 창세기 15장 1절로 6절의 말씀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한 북쪽 네 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아브람은 자신의 조카 롯만 구한 것이 아니라 함께 붙잡혀 갔던 소돔 사람들도 모두 구출했습니다. 심지어 북쪽 네 나라 연합군이 가나안 땅에서 빼앗아간 간 재물까지도 모두 되찾았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로 아브람은 가나안 지역에서 많은 재물을 가진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신이 거둔 승리로 인해 우쭐되거나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구출한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었으며, 전쟁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도 본래 주인들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살렘의 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는 멜기세덱의 권면을 받아들여 자신이 거둔 승리의 영광을 모두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얻은 것 가운데 십분의 일을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은 그야말로 부족할 것이라고 하나도 없는 신실한 아브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전쟁이 끝난 후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였습니다.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환상 중에 임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람이 심각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이 가진 두려움이 얼마나 컸으면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만큼 심각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창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도대체 아브람이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했기에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브람을 두려움에서 사로잡히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창세기는 아브람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브람이 가졌던 두려움이 무엇이었는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아브람이 가졌던 두려움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방패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가장 큰 상급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아브람이 가졌던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주신다는 말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아브람이 가졌던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비록 아브람이 엘람 왕이 이끄는 북쪽 네 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겼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북쪽 네 나라가 방심한 틈을 타 한밤중에 기습공격으로 이긴 것입니다. 엘람 왕이 이끄는 북쪽 네 나라가 군대를 모아 언제 다시 아브람에게 복수하러 찾아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다시 싸우면 또 다시 이길 자신이 아브람에게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아브람이 가졌던 두려움의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가장 큰 상급이라는 말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아브람이 가졌던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은 신에게 가장 잔혹한 저주를 받은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안 땅으로 왔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큰 민족을 이루기는커녕 당장 자신의 대를 이를 아들조차 없습니다.
아브람은 혹시 몰라 아들처럼 여기는 조카 롯을 데리고 함께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롯을 자신의 대를 이을 수양아들로 삼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처럼 여겼던 조카 롯은 재물에 사로잡혀서는 아브람과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원망하며 말합니다. 자신에게는 자식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고 하시고는 정작 자신에게 아들을 주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결국 자식이 없는 아브람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대를 이를 아들이 없었던 것은 아브람에게는 심각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창15:2-3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아브람이 가졌던 두려움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초적이며 본능적인 인간의 감정입니다. 비록 아브람과는 전혀 다른 두려움일 수 있지만 우리 모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인생을 살아갑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으로는 쿨한 척, 담담한 척, 괜찮은 척, 강한 척 하며 남도 속이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속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다를 수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삽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살아가는 두려움은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감추거나 이기기 위해 더 많은 재물을 가지려고 합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더 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이 가진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한 방편입니다. 하지만 많은 재물, 높은 자리, 더 큰 힘을 가졌다고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물이 많을수록 두려움 역시 더 많아집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두려움 역시 커집니다. 더 큰 힘을 가질수록 두려움 또한 더욱 강력해집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을 느끼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입니다. 우리 속담 가운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갓 태어난 강아지는 호랑이 무서운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호랑이에 대해 아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은 용감한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무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결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뛰어넘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각자가 가진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창세기 15장의 말씀은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가지게 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넘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첫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람 왕이 이끄는 군대가 아브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쳐들어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엘람 왕이 이끄는 북쪽 네 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두려움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싸우면 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전쟁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겼지만 또 다시 쳐들어오면 자신이 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엘람 왕이 다시 군대를 모아 아브람에게 복수를 하러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입니다. 정작 엘람 왕은 아브람이 두려워 다시 쳐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가졌던 두려움처럼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대부분 역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엘람 왕이 쳐들어오면 첫 번째 전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서 또 도우실 것을 믿고 맞서 싸우면 됩니다. 맞서 싸우려 하지 않으니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는 두려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 땅에 갔을 때 마침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브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땅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했습니다. 이집트로 피신한 아브람은 기근이라는 두려움을 해결했지만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의 아내 사래의 미모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아내를 바로의 아내로 내어줍니다. 두려움에 맞서지 못하고 피하면 피할수록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눈앞에 닥친 두려움을 피해 자꾸만 도망하기만 하면 영원히 세상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할 땐 입학시험이 두렵고, 졸업을 하면 취직이 두렵습니다. 연애를 하면 결혼이 두렵고, 결혼을 하면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공부하기를 피하고, 취직하기를 피하고, 결혼하기를 피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부딪치고 나면 두려워했던 것이 목숨을 걸고 죽고 살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붙으면 붙는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갈 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을 하면 결혼을 한 대로 살 길을 열어주시고 설령 이혼을 한다고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두려움을 피하려고만 하면 죽는 순간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에 있을 때 피하고 도망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해야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붙잡을 때만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했습니다.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방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브람이 두려워하는 엘람 왕이 다시 쳐들어오면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 아브람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신 또 다른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상급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대를 이를 자식이 없음을 두려워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엘람 왕이 다시 쳐들어오는 것보다 아브람을 더 두렵게 만든 것일 수 있습니다. 앞서도 설명을 했지만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를 떠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까지 왔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브람에게는 큰 민족은커녕 당장 자신의 대를 이를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는 그렇게 큰 두려움이냐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살던 시대에는 대를 이를 자식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평생을 살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두려움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땅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가나안 땅에 왔지만 여전히 아브람에게는 대를 이를 자식이 없었습니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브람이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큰 민족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믿고 가나안까지 왔지만 여전히 저에는 아직도 자식이 없습니다. 지금 저의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 뿐입니다.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시는 건가요?’라고 불만이 섞인 항변을 합니다. 아브람의 항변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에셀은 네 상속자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아브람을 밖으로 이끌어내시더니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시고는, ‘저 하늘의 별처럼 네 자손도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창15:4-5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은 도무지 실현 불가능한 말씀처럼 들리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실 때 아브람은 아들처럼 여기는 조카 롯을 데리고 왔습니다. 자신의 조카 롯을 수양아들 삼아 대를 이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롯이 아브람과 갈라섰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네 몸에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며 아브람의 자손이 하늘에 별처럼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질 것이라 언약하신 것입니다. 도무지 실현 불가능하게 들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브람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며, 이런 아브람을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처럼 미련해 보이고 두려운 일도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는 노아를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 모두 맑은 하늘 아래서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밭도 갈고, 장사도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맑은 하늘 아래에서 그것도 높은 산 위에다 거대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동안 얼마나 곤혹스럽고 두려웠겠습니까? 사람들이 다들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한 사람이라고, 미친놈이라고 침 뱉을 때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자기 몸으로 난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고 따를 때에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정신 나간 여자라고 비웃을 때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고 따른 제자들도 조롱과 핍박, 멸시와 천대를 받았지 않습니까? 믿음의 길을 간다는 건 한없이 어리석고 두려운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 아브람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세상의 가장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부추겨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힘들게 함으로 돈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만듭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들을 자꾸만 힘들게 만들어 바르게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만듭니다. 정직하게 또는 양심대로 사는 사람을 자꾸만 어렵게 만들어 정직하게 사는 것, 양심대로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 무서운 줄 알고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 무서운 줄만 알지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세상만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가르쳐주시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것입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뛰어넘는 유일한 길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무서운 줄을 알면서도 하나님 무서운 줄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돈 무서운 줄 알면서, 권력이 무서운 줄 알면서도, 법이 무서운 줄 알면서도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세상 무서운 줄만 알고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두려움을 가지는 것, 바르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 양심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두려움,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두려움,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두려움, 영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갈 것인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면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