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이 되신 하나님
창세기 15:7-21
창세기 강해 35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함께 읽은 창세기 15장 7절로 21절의 말씀을 가지고 “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신을 믿는 대부분의 종교나 신앙은 항상 사람이 먼저 신을 찾아 나섭니다. 마치 왕이 신하를 찾지 않고 신하가 왕을 찾고 만나기 위해 왕궁에 들어가는 것처럼, 신이 먼저 사람을 찾지 않고 사람이 신에게 바칠 제물을 가지고 신이 있다는 신전을 찾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무엇 때문에 신에게 바칠 제물을 가지고 신을 찾을까요? 사람이 신을 찾아 나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반드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지만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소원이 있을 때 사람은 자신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지닌 신을 찾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은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심지어 사람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피하고 숨으려는 사람을 찾아내십니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는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특징입니다.
창3:8-9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먼저 사람을 찾으실까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의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시어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보여주는 말씀이 창세기가 기록하고 있는 아브람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자기에게는 자식도 없고 자식에게 물려줄 땅도 없으니 자기에게 자식도 주고 땅도 달라며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가 그를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브람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대부분의 종교나 신앙은 자신이 믿는 신을 통해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을 믿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람이 먼저 신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통해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거나 비전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부르신 소명이나 내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은 더 이상 소명이나 사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이루고 싶은 소원이나 비전을 하나님의 소명이나 사명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자신이 이루고 싶은 소원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교회 역시 더 이상 자신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이 이루고 싶은 욕망을 비전이라고 포장하고는 비전을 이루려고 기를 쓰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기독교 신앙의 왜곡과 타락의 원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식을 달라고 간청했나요?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은 하나님께 가나안 땅을 달라고 간청했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길 가나안 땅을 주기 위해 아브람을 우르에게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자손을 통해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창15:7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자신이 먼저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은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람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제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람의 질문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증을 보여 달라는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시면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신 것처럼, 땅을 주신다는 약속에 대한 확증을 보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창15:8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요청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삼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사용되었던 대표적인 동물들입니다. 삼년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로 삼년 된 동물들은 완전히 자란 미성숙하지 않은 동물을 의미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가져오라고 하신 희생제물을 가지고 와서는 동물들의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둘로 나누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습니다. 다만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반으로 쪼개기에는 너무 작아 둘로 쪼개기 보다는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를 서로 마주보게 차려 놓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도대체 왜 이렇게 했을까요? 희생제물을 가지고와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동물들을 반으로 쪼개고는 서로 마주보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창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물론 창세기가 기록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문화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브람이 살던 시대에는 흔하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동물들을 가져다 반으로 쪼개어 마주 보게 하고 쪼갠 동물들 사이를 사람이 지나가는 것은 아브람이 살던 시대 이전부터 그 지역에 내려오던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의식이었을까요? 이것은 절대로 깨뜨려서는 안 되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언약이나 동맹을 맺을 때 사용했던 의식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중요한 계약을 맺을 때 계약서를 작성하고 인감도장을 찍거나 서명을 합니다. 둘 사이의 계약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길 때는 보증인이나 담보물을 세워 계약을 지키지 못할 때 계약에 대한 책임을 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살던 시대에는 중요한 언약이나 동맹을 체결 할 때에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개놓고는 둘로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가게 했습니다. 둘로 쪼갠 짐승은 언약을 맺는 두 당사자를 의미하는 것이며, 둘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게 한 것은 언약이나 동맹을 위반했을 때에는 둘로 쪼개진 짐승처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맹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희생제물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아브람에게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증을 요구하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과 도무지 깰 수 없는 언약을 맺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져오라고 하신 희생제물을 가지고 와서는 둘로 쪼개어 마주보게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솔개가 와서는 둘로 쪼개놓은 짐승들을 쪼아 먹으려고 했고 아브람은 솔개를 쫓았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뜬금없어 보이는 솔개의 등장이 굉장히 낯설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흔하게 일어났던 일이라고 합니다. 죽은 짐승의 피 냄새를 맡은 새들이 짐승을 쪼아 먹기 위해 달려들기도 했습니다. 굳이 이것을 기록한 이유는 솔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한 권세가 언제나 존재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솔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방해하는 악한 권세에 대한 메타포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방해하는 솔개를 쫓다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게 되었고 아브람은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깊은 잠에 빠진 아브람은 잠 속에서 큰 흑암과 두려움이 임하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아브람이 깊은 잠 속에서 흑암과 두려움 중에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그야말로 충격적이고 두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부터 16절까지는 깊은 잠 속에서 아브람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창15:13-16 "너는 똑똑히 알고 있거라. 너의 자손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다가 마침내 종이 되어서,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자손을 종살이하게 한 그 나라를, 내가 반드시 벌할 것이며, 그 다음에, 너의 자손이 재물을 많이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오래오래 살다가, 고이 잠들어 묻힐 것이다. 너의 자손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벌을 받을 만큼 이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자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고는 갑자기 연기 나는 화로와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나서는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메타포로 가득한 말씀입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장차 아브람의 후손들이 겪어야 할 사백 년 동안의 이집트 노예생활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연기 나는 화로와 타오른 횃불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메타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창15: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세기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운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맺은 언약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맺은 언약이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도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흔히 계약이라고 하면 을이라는 약자가 갑이라는 강자에게, 빚을 지는 사람이 빚을 주는 사람에게 약속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언약을 상징하는 둘로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야 할 사람은 아브람입니다.
창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이 갑이고 아브람이 을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을인 아브람이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야 마땅해 보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쪼개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약자가 되셨고, 빚진 자의 위치에 서셨다는 걸 의미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을 언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 앞에서 당신이 말씀하신 언약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조자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약자가 해야 할 맹세를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일까요? 아브람이 해야 할 맹세를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일까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가 무엇이 때문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약자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의 언약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의 언약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본질은 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약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속성상 결코 상대방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랑은 항상 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맺는 모든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기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랑하지 않는 자가 이깁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깁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이거나 자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부모는 자식을 이기지 못합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있다면,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결코 이길 수 없어요.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 핀 남편과 싸우면서 아내가 울면서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남편보다 아내가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늘 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생각하기를 사람이 하나님과 싸우면 항상 하나님이 사람을 이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 경우 하나님이 지십니다. 지나간 우리의 삶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기셨던 적이 많은지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이겨먹으며 살아왔는지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늘 하나님을 이겨먹으며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매우 신비하고 놀라운 역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당장은 항상 집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지고 또 지는데, 놀랍고 신비하게도 최후의 승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이며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최후의 승리이며 영원한 승리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이며 우리가 세상에서 이루어야 하는 승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은 언약은 사랑의 언약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언약이 성취되기까지는 많은 고난과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의 후손이 사백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종살이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왕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으면 빨리 주시지 왜 그렇게 오래 뜸을 들이시나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과연 맞는 건인지, 이렇게 해서 과연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인지 의문이 들고 회의가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길 아브람이 죽을 때까지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고 하십니다. 죽을 때까지 언약의 성취를 보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눈앞의 결과를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눈앞의 결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물론 아브람의 후손들은 4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조상 아브람에 주신 언약을 다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무시하며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하신 대로 그의 자손들을 돌아오게 하셨고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기를 자신들의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믿음이 강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믿음이 약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시고 성취하십니다. 심지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분명 언약을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인내하며 기다리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때를 참고 견디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냉혹하고 비정한 현실과 세상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람에게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주시겠다고 언약해 주셨습니다. 도무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 것처럼 예수님을 통해 언약하신 하나님의 나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