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려는 믿음, 따르는 믿음
창세기 16:1-6
창세기 강해 36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함께 읽은 창세기 16장 1절로 6절의 말씀을 가지고 “이루려는 믿음, 따르는 믿음” 또는 “성취하려는 믿음, 순종하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은 두 가지였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는 아브람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할 것이라는 언약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인도하신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언약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도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브람에게는 대를 이를 아들 한 명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아들이 없자 가장 초조하고 불안했던 사람은 아내 사래였습니다. 당시 자식을 출산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의 책임이라 여겼습니다. 여자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였으며 심지어 자식을 출산하지 못하는 여자는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창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는 아기를 가지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래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갔고 사래는 더 이상 자식을 출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식을 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자 동시에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절망을 드러낸 것입니다.
창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래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래의 출산을 허락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사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신 것이지 아예 안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기를 출산하지 못한 사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출산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제멋대로 하나님의 뜻을 단정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출산을 막는다고 생각한 사래는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빠지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 맘대로 해석하고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멋대로 생각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래가 선택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데리고 있던 이집트 출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아내로 줍니다. 사래가 왜 이렇게 했습니까? 자신은 자식을 낳을 수 없으니까 아브람의 아내라는 지위를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지위를 여종에게 물려주기 위함이었습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여종을 이용해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자신의 자식으로 삼으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창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사래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이 자신을 대신해 아들을 낳아 줄 씨받이로 보인 것입니다. 자신의 여종 하갈을 자신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키는 수단으로만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앞세워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교회를 위해 과도한 봉사와 헌신을 요구합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위하는 대단한 희생과 헌신을 하는 것처럼 교묘하게 포장합니다. 교인들은 여기에 속아 집안일도 팽개치고 회사 일도 대충하며 교회 일에는 온갖 정성과 희생과 봉사를 다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목사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함부로 이용하는 것이며 교인들을 수단으로 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시대의 말씀으로 바꾸면 교회가 교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교인들이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위해 교인들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막2:2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내가 하나님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는 분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도우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방패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방패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지키고 보호하고 도와야 할 것처럼 신앙 생활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방패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는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내가 지켜야 하고 내가 도와야 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분을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키고 도와야 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연약하고 불완전한 우리가 지키지도 못하지만 우리가 지킬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스스로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지키고 도와야 할 사람은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 공동체이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이루려는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자식을 낳으라고 합니다. 사래의 말을 들은 아브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따릅니다. 아브람이 언제 아내의 말을 그렇게 잘 들었습니까? 자기 살려고 자기 아내도 이집트 바로왕의 아내로 내어 준 사람이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는 기가 막히게 아내의 말에 순종합니다.
창16:2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이 단 한 번의 거절도 없이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람의 마음속에도 사래와 비슷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아내의 제안에 단 한 번의 거절도 없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래가 자신이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아브람 역시 아내 사래를 통해서는 자식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와 때문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마음 깊은 곳에도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하와의 마음과 비슷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와가 건넨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뱀의 유혹 때문에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하와 역시 뱀이 했던 말처럼 하나님과 같아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내 사래의 말을 한 번의 거절도 없이 들은 것은 아브람도 사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잘못된 말이지만 그런 말을 사람들이 듣고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잘못된 것을 말하는 사람과 비슷한 생각과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사래가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동침하게 했던 때를 분명하게 기록하며 그 때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언제였습니까?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가나안 땅에 살기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살게 된지 10년이 지났더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창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았던 10년은 아브람과 사래가 가진 믿음의 한계를 나타내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지극히 짧은 찰나와 같은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유대 문화에서 1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10년이 지났다는 말씀은 아브람과 사래에게는 자신들이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몇 살이었습니까? 75세였습니다. 아내 사래의 나이는 65세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10년이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의 나이가 85세이고 사래의 나이는 75세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만 붙잡고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10년이 되었다는 말씀은 개인적으로 저에게는 매우 큰 도전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자유교회를 개척하면 가졌던 제 마음은 10년만 정직하게 설교하고 목회하면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교회를 개척한지 10년이 되었지만 무슨 대단한 일어 벌어지기는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꿈꾸며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가진 그렇고 그런 교회였습니다. 10년이 되는 동안 많은 교인들이 우리교회를 찾아왔지만 대부분이 우리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반복되는 이런 경험들은 저로 하여금 새로운 교인이 오면 기쁘기보다 오히려 부담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생각하고 기대한 것처럼 성장하지 않는 것도 힘들었지만, 교인들이 제 열정이나 열심을 알아주지 못하고 따라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꽤 오랫동안 힘들어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자손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단 한 번도 10년만 기다리면 자식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자식을 주신 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10년이라는 세월로 한정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스스로 자신이 한계를 그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정한 한계를 넘어서자 더 이상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수단과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저에게 10년만 목회하면 대단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게 주신 깨달음 정직하고 바르게 목회하는 목사가 되라는 것이지 10년만 잘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그냥 제 스스로 다짐하고 결심한 시간이었습니다. 10년은 제가 세운 계획이며 비전이었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아닙니다. 제가 정한 10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저 역시 하나님께서 저를 돕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스로 제풀에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성취를 10년이라는 세월로 제한하였습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정한 10년이라는 세월이 저들이 가진 믿음의 한계였습니다. 자신들이 정한 10년이라는 한계 시간이 지나자 저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목사와 교인들이 스스로 빠지는 함정입니다. 많은 목사와 교인들이 자기 스스로 세운 비전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양 스스로를 속입니다. 비전이다 꿈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자신들의 욕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비전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직하게 자신이 세운 비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끝내 자신이 세운 비전을 성취하지 못하고는 스스로 절망에 빠져 버립니다.
사래는 자신의 여종을 아브람에게 주어 자기를 대신하여 아기를 낳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일은 아브람 시대에 흔히 있었던 관습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나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사래가 취한 방법은 지극히 합리적이며 타당해 보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열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들의 수단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려고 했던 사래와 아브람의 시도는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에게 아들을 주신 것은 사래가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 때로부터 무려 15년이나 더 지나서였습니다. 아브람의 나이 100세, 사래의 나이 90세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야말로 어떠한 기대나 소망도 가질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언약하신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언약을 받은 때로부터 무려 25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후손을 주신다고 언약하시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아브람과 사래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언약의 성취를 지연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사람의 수단과 방법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후손에 대한 언약이 이루어지기까지는 25년이 걸렸지만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언약이 이루어지기까지는 40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25년을 기다리지 못하면 400년은 더더욱 기다리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선포는 무려 20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천 년이 넘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소망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임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에서 사람들이 저지르는 가장 심각한 실수는 대부분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10년을 기다리고는 더 기다리지 못한 아브람과 사래의 실수는 이것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다리다 지친 사래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를 얻기 위해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아내로 주어 동침하게 한 것입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자 그녀가 임신했습니다. 사래가 생각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창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비록 사래의 뜻대로 하갈이 임신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자식을 임신한 하갈이 지금까지 주인으로 섬겨왔던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85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아브람의 자식을 임신하였다고 하니 아브람이 얼마나 하갈을 예뻐했겠습니까! 아브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된 하갈은 기고만장해 져서는 자신의 주인 사래를 함부로 대하며 멸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래가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사래과 자신의 여종 하갈을 이용해 자신을 대신해 자기 아기를 낳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갈이 임신을 하더니 안방마님 자리를 빼앗으려 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사람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루려는 것이 처음에는 꽤 그럴듯해 보이고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하지 못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사래는 하갈을 함부로 이용하려고 했고, 임신한 하갈은 사래를 멸시하였고, 멸시를 참지 못한 하갈은 사래를 학대하였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관계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기에 이르렀고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을 집에서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에 세상적인 방법을 택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사래로 인해 아브람의 가정에는 이제껏 없었던 미움과 다툼 그리고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창16: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사래와 하갈의 갈등은 당대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래와 하갈의 갈등과 다툼은 저들의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졌고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악순환을 만들었습니다. 사래가 이집트 사람 하갈을 학대한 것처럼 훗날 이집트 사람들은 사래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래가 낳은 자식 이삭의 후손과 하갈이 낳은 자식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지금도 다투고 있습니다. 이모든 것이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려고 했던 사소해 보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은 열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믿는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루는 것과 따르는 것이 그게 그것인 것 같지만 이 둘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다른 지를 분명히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구별할 줄 모르면 아브람의 이야기를 통해 성경이 가르쳐 주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내가 스스로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은 우리에게 속한 것일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겸손한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을 변하시키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역사하실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람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들이 대신 하려고 나섭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사람이 이루려고 하니 당연히 예상하지 못한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제대로 그리고 바르게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실 때까지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