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창세기37-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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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7-16

 

창세기 강해 37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함께 읽은 창세기 167절로 16절의 말씀을 가지고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언약을 받고 가나안 땅에 온지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자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아기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출산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출산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미루어 두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래는 자신의 생각과 형편에 맞추어 제멋대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출산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믿은 사래가 할 수 있는 길을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충실한 몸종이었던 애굽 여인 하갈을 통해 아이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사래는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었고,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했고, 하갈이 마침내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래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래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한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갈의 입장에서 보면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한 자신을 존중해주기는커녕 자신이 배 아파 나을 아이를 자신의 아기로 만들려는 사래의 태도에 불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한 하갈은 자신은 더 이상 사래의 몸종이 아니라 아브람의 아내라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아브람의 아내라 여긴 하갈이 자신이 낳을 아기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음에 사래를 멸시하는 것은 어쩌면 엄마로서 당연한 권리행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래의 입장에서 보면 오랫동안 자신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아브람의 아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자신 덕분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아브람의 아내가 되고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하게 된 것은 모두 자신이 베푼 은혜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래가 하갈이 나을 아기를 자신의 자식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주제도 모르고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했다고 주인인 자신을 멸시한 것입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게 됩니다.


하갈은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래를 멸시하고, 사래는 자신이 몸종이었던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도대체 사래와 하갈의 갈등은 누구의 책임이며 누구의 잘못입니다. 사실 사래와 하갈의 갈등에서 누가 더 옳은가? 누가 더 잘못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래대로, 하갈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갈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편을 드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래와 하갈의 갈등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이 두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사래와 하갈의 갈등이 생기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사래가 하나님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생각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래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출산을 막는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래의 잘못된 생각이 결국 사래와 하갈의 갈등이 결정적 원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교인들 간에 벌어지는 갈등의 대부분, 교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대부분, 카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의 대부분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더 나아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갈등의 대부분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물론 서로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편협한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규정하고 제한한 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잘 믿으면 사람들 사이에 평화와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제멋대로 믿으면 반드시 사람들 사이에 전쟁과 미움의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제멋대로 믿지 말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제멋대로 제한하거나 규정짓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에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면서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더 이상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하갈이 아브람의 집에서 도망칩니다.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 나온 하갈이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잠시 멈추어 쉬고 있었습니다.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도망쳐 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하갈은 아무도 없는 사막 한 가운데서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가 깊은 절망에 빠진 하갈을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하갈을 만나는 이야기를 창세기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에 대한 이야기에서 하갈은 이집트 출신의 이방인 여종에 불과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로 치면 하갈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엑스트라와 같은 하갈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어 깊은 절망에 빠진 하갈을 살펴주십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하갈에게 묻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의 천사는 하갈을 향해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불렀습니다. 천사는 하갈을 그냥 하갈이라 부르지 않고 굳이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불렀을까요? 천사가 하갈을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해결의 포인트입니다. 하갈이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래를 멸시하였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갈이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하고는 교만해져서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는 사래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하갈을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부름으로서 하갈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16:8a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우리가 겪는 결정적인 문제들은 모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생깁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해 창세기가 가르쳐 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지음 받은 사람이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래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무시하고 하갈을 이용해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힘으로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했다고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래를 멸시한 것 역시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때 생각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것에서부터 내가 겪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고 부른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께서 몰라서 물으시는 게 압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저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저들로 하여금 왜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 했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는 천사의 질문은 하갈에게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는 천사의 질문에 하갈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하갈은 자신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하갈의 대답에 주의해야 합니다. 천사는 분명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물었습니다. 하지만 하갈의 대답은 자신의 주인 사래를 피해 도망한다고만 대답한 것입니다. 하갈은 네가 어디서 왔느냐?”는 천사의 질문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느냐?”는 천사의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16:8b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갈처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가정으로부터 도망치거나,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 주지 않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칩니다. 문제는 막상 도망은 쳤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것이 도망의 특징입니다. 도망치는 사람은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어디로 갈지 안다면 그것은 모험이거나 여행이거나 도전이지 도망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니까 살긴 사는 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도망치듯 인생을 살아갑니다. 도망치듯 사는 인생은 결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갈이 막상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은 쳤지만, 그녀가 갈 곳은 그 어디에서 없었습니다. 임신한 하갈은 어디를 가도 제대로 된 삶을 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어디로 갈지 몰라 대답하지 못하는 하갈에게 말씀합니다. 천사가 하갈에게 가라고 한 곳이 어디입니까? 천사는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말씀합니다. 하갈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냈다는 천사가 나타나서는 한다는 말이 자신에게 도망칠 수 있는 새로운 도피처를 주기는커녕 기껏 도망쳐 나온 사래에게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사래의 학대를 도무지 견디기 힘들어 도망쳤는데 사래에게도 다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도대체 천사는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당시 시대의 관습에 의하면, 노비 출신에 임신한 여인을 받아들여 줄 데는 단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임신한 하갈이 혼자 살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하갈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래에게 돌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갈로 하여금 사래에게로 돌아가라는 천사의 말은 종은 죽을 때까지 종이고 주인은 죽을 때까지 주인이라는 신분제도나 계급제도를 인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 한계에 따른 하갈에게만 주신 특별한 해결책입니다.


천사가 하갈에게 도망쳐 나온 여주인에게 다시 돌아가라는 것은 중요한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사람은 당장 편하기 위해 어려고 힘든 상황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당장 좀 더 편하자고 무작정 힘든 현실로부터 도망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실로부터 도망칠수록 더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갈에게 다시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라는 것은 현실을 피하기보다는 현실을 부딪쳐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단지 주인 사래에게 돌아가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래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복종하라는 말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복종이라는 말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천사는 하갈에게 사래에게 자신을 낮추라고 합니다. 사래가 비록 하갈을 학대하기는 했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갈을 학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한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자 참지 못한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갈이 더 이상 사래를 멸시하지 않고 스스로 낮추게 되면 사래도 더 이상 하갈을 학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갈은 본래 사래의 여종이었습니다. 하갈은 예전처럼 자신의 주인 사래를 존중해 주고, 사래는 자신을 대신해 아브람의 아기를 낳아줄 자신의 여종 하갈을 사랑하면 됩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힘들게 한다고 해서 늘 밖으로만 도는 남편이 있다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내에게로 돌아가서는 성경의 말씀대로 아내를 사랑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힘들게 해서 늘 밖으로만 도는 아내가 있다면 남편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남편에게 돌아가서는 성경의 말씀대로 남편을 존경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하갈에게 무조건 사래에게 돌아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특별한 언약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믿고 사래에게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하갈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이었습니까? 당장은 비록 사래의 종으로 들어가 살아야 하지만 장차 하갈이 나을 아들을 결코 사래의 아들이 되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갈에게서 나온 후손들을 크게 번성하게 하여 그 수가 셀 수 없을 만큼 많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6:10-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나님의 언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또 전하여 이르기를 하갈이 장차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장차 나을 아들의 이름까지 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주신 아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이 나을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신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히브리어로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래에게 학대받는 하갈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물론 장차 하갈이 나을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은 들나귀처럼 고집이 세고 완고하며 끈질긴 탓에 끊임없이 모든 민족들과 대항하며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실제 성경의 역사에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 민족은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언약하신대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를 살면서도 크게 번성하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나님은 왜 도망친 하갈을 만나시고 그녀를 살피시고 도우셨을까요? 도망친 하갈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아마도 임신 한 하갈을 사막에서 갈증과 굶주림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하갈이 죽었으면 이스마엘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스마엘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슬람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도망친 하갈을 도우시고 살펴주셨습니다. 심지어 하갈이 나을 아들을 복주고 장차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 언약하셨습니다.


하갈이 장차 나을 아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래에게서 학대받는 하갈과 그녀가 나을 아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녀의 신음에 응답하시어 하갈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갈은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에서 깊은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히브리어는 엘 로이라고 합니다.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나님은 사래만 사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래가 학대하였던 그녀의 여종 하갈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래의 아들 이삭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만 사랑하지 않으시고 이방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랍 사람들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미국만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한국도 사랑하시고 북한도 사랑하시고 아프리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넓으십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도무지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선민의식과 영적 엘리트 의식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독점하려고 합니다. 마치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선민의식과 영적 엘리트 의식에 빠졌던 것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들이나 무슬림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과 유대교가 믿는 하나님 이슬람교가 믿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처럼 기독교의 하나님이 유대교나 이슬람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구약을 성경으로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이 유대교의 하나님, 이슬람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주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 유대교의 하나님, 이슬람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을 두고 서로 다른 교리를 믿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서로 다른 교리를 믿는 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멸시하고 증오하고 심지어 서로에 대해 테러를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일까요? (이스마엘, 이스라엘, 임마누엘)


창세기는 왜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하갈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는 하갈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하갈은 아브람이나 사래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이집트 출신의 여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아브람이나 사래처럼 함부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어 학대받는 그녀의 처지를 보살펴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래를 만나시고 그녀를 위로하시기 이전에 사래에게서 도망친 하갈을 먼저 만나시고 그녀를 위로하시고 살펴주셨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히브리어로는 엘로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갈의 멸시를 받은 사래가 아니라 사래의 학대를 받았던 하갈을 먼저 만나시고 그녀를 위로하시고 살피셨을까요? 하갈이 사래보다 작은 자 약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모습은 세상에서 학대받는 자들, 소외된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 세상의 약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일관되고 낯선 나그네와 이방인들 그리고 약자들을 지키고 보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베푼 친절이 곧 예수님께 베푼 친절이며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무시한 것이 곧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 가르치셨습니다.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25: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창세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은 약자들의 신음 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저들을 도우시고 살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이 만났던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학대받는 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그들의 고통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라기는 하갈처럼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고통과 신음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고 살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 회피하고 도망하려고 했던 문제와 맞닥뜨려 해결하는 역사가 나타나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이웃의 고통과 신음 소리에 귀 기울여 들어 주고 저들의 연약함을 살펴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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