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바꾸시는 하나님
창세기 17:1-8, 15-16
창세기 강해 38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7장의 말씀을 가지고 “이름을 바꾸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창세기 17장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꾸시는 말씀과 다른 하나는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명하시고 할례를 행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꾸시는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고 다음 시간에는 언약의 증표로 명하신 할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10년이 지났지만 아브람과 사래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래는 자신의 몸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그의 아기를 임신하게 합니다. 사래의 계획대로 하갈은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합니다. 아브람의 아기를 임신한 하갈은 주인이었던 사래를 무시하고 멸시하게 됩니다. 하갈의 무시와 멸시를 참지 못한 사래는 아브람의 묵인아래 하갈을 학대합니다.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피해 임신한 채로 아브람의 집에서 도망칩니다.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피해 막상 도망쳤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던 하갈은 사막 한 가운데 오아시스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을 받습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는 도망쳤던 아브람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온 하갈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직접 주신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고통을 들으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가 86세였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 난지 13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람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사래에게는 자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의 나이 99세 사래의 나이 89세, 이젠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아이를 생산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사래에게서 아들을 얻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창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분명한 언약을 받고도 그 언약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자 어떻게 생각하고 믿었습니까? 사래가 아닌 하갈을 통해 얻은 아들 이스마엘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아들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사래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말씀하셨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생각한 때에, 자기가 기대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분명한 언약조차 제 멋대로, 제 맘대로 함부로 왜곡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창17:17-18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브람의 나이 99세, 더 이상 그 어떤 희망이나 기대도 가질 수 없었던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과 사래 모두 나이 들어 더 이상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굳이 아브람에게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지 아브람이나 사래가 아님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창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인생의 고비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절망에 사로잡혀있을 때는 소망의 하나님으로 오시고 상처받아 괴로워할 때는 치유의 하나님으로 오십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려고 북쪽 네 나라 연합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이겼습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아브람은 저들의 보복이 두려워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얻은 막대한 전리품을 포기하고 살렘왕 멜기세덱에게는 십분의 일을 주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에 나타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항상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함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으로 사람들 눈을 피하고 사람들을 속이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피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속이며 살 수는 없습니다. 아브람의 저지른 실수는 모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부담스러운 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것은 우리를 감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도록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실수와 죄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성전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요즘 아침묵상에서 몇 주에 걸쳐 성전 파괴를 예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오랫동안 비슷한 말씀을 반복하는지 지루해 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간단히 생각하고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성전의 완전한 파괴를 예언하심으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성전 신앙을 무너뜨리셨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교회는 예수님께서 무너뜨린 성전 신앙을 다시 만들고 있습니다.
성전 신앙이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에만 계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장소이고, 거룩한 장소인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교인들은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 성전에서만, 교회건물에서만 경건한 척, 신실한 척 행동합니다. 성전을 나서는 순간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의 삶과는 상관없는 분으로 여깁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성전에 모시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람이 만든 건물에 가두어 놓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람이 제단을 쌓은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아브람이 사는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언약이 무엇입니까? 아브람의 후손을 번성케 하시어 그에게서 여러 민족들과 왕들이 나오게 할 것이며 가나안 땅을 아브람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 그들의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신다는 언약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언약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기 12장과 창세기 15장의 언약을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이전 두 번의 언약에서는 없었던 두 가지 사건이 추가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는 아브람과 사래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람을 부르실 때 주셨던 언약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시는 사건입니다.
한국의 문화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종교 문화에서 이름은 단순히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모든 이름에는 나름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것이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보면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는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라는 이름은 아마도 저들의 아버지 데라가 지어준 이름일 것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높으신 아버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이름에는 “공주”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아브람과 사래라는 이름에는 아버지 데라의 소원이 담겨진 이름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99년 동안이나 사용하였던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십니다. 이제부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 주신 아브라함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만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바꾸십니다. 이제부턴 사래가 아니라 사라라는 것입니다. 사라라는 이름에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의미가 담겨진 이름입니다.
창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꾸신 것일까요? 아브람과 사래라는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이름으로 바꾸신 하나님을 통해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바꾸는 사건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은 단지 부르는 호칭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인생을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삶의 목적 다른 말로 사명을 바꾸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신 이유는 아브람과 사래로 하여금 과거의 생각과 이전의 마음을 버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이름에 걸 맞는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이름을 바꾸신 이유는 저들의 인생을 바꾸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저들에게 주신 새로운 이름을 통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높으신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람의 이름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공주를 뜻하는 사래의 이름을 여러 민족의 어머니를 뜻하는 사라로 바꾸셨습니다. 물론 높으신 아버지라는 아브람의 이름도, 공주라는 사래의 이름도 좋은 이름입니다. 하지만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은 지극히 개인적인 소원을 담은 이름입니다.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명예와 부를 누리기를 바라며 지은 이름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신 이름은 여러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라는 것입니다. 혼자만 잘살고 혼자만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복되게 하고 존귀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를 바벨로니아 우르 땅에서 부르시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람 혼자 하나님이 주신 새 땅에서 명예와 부를 누리며 잘 먹고 잘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통해 많은 사람과 많은 민족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많은 민족들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는 것, 이것이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자손을 약속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언약은 저들 가족만을 복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장차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생겨날 수많은 사람들과 민족들을 복 주시기 위해 주신 언약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언약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이웃의 하나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 뜻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내 가족만 잘 되기를 기도하고, 내 교회만 잘 되기를 기도하고, 내 민족만 잘 되기를 기도하고, 내가 사는 나라만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내 수호신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 이웃의 하나님 심지어 내 원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지금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하나님이기도 하고, 미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내 기준과 생각대로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심지어 지금(현재)이라는 잣대로 판단하는 것도 안 됩니다. 내 기준과 생각 또는 지금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반드시 심각한 신앙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해당하는 언약이 아닙니다. 그의 대대 후손에게도 유효한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창17: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만 제한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잘못된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잘못된 믿음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걸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내 이웃의 하나님이기도 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내가 원수같이 여기는 사람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악인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합니다.
1861년 4월 미국이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인지 지속할 것인지를 두고 남부 연합군과 북부 연합군으로 나뉘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들도 남부 연합군을 지지하는 목사와 북부 연합군을 지지하는 목사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둘로 나뉜 목사들은 자신들이 속한 연합군이 이길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남군을 지지하는 목사들은 남군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북군을 지지하는 목사들은 북군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남군에 속한 목사들과 북군이 속한 목사들이 자신들이 속한 군대가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던 하나님은 서로 다른 하나님이었을까요? 아니오. 저들은 모두 같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남군 목사들의 기도와 북군 목사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야 합니까? 미국이 남군과 북군으로 나뉘어 싸울 때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 되어 주셔야 합니까? 미국이 중국과 싸운다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 되어 주실까요? 교인과 교인이 아닌 사람이 싸우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 되어 주실까요?
사람들은 막연히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자기의 편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누구의 편이 되어주지 않으십니다. 교회에서 목사와 교인들이 서로 파벌을 만들고 싸울 때 보면 마구잡이로 성경을 이용하며 마치 하나님이 자기 편 인양 우깁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나뉘어져 싸우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 되어주십니까?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도 상대방 편도 아닌 항상 하나님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 편이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매우 위험한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항상 하나님의 편이 되시는 하나님을 항상 내 편이 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일한 비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내가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항상 내 편이 되어주십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를 아담과 하와라는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홍수의 심판 이후 노아라는 한 가정에서부터 새로운 세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모든 민족의 아버지요 어머니로 세우십니다. 이 모든 것은 창세기가 하나님에 대한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내 민족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속한 나라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모든 나라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손해가 되는 일, 내 교회에는 이익이 되지만 한국교회에는 피해가 가는 일, 내 나라에는 유익이 되지만 다른 나라에는 재앙이 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일이라고 할지라도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없는 일이 됩니다. 성경은 반복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하기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공의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만의, 어느 한 교회만의, 어느 한 나라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일하신 하나님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의와 공평이며 우리의 신앙에서 공의와 공평을 회복하는 것이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담장 너머로 야구 경기를 보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키가 큰 어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청소년이고 마지막 한 사람은 어린이입니다. 이 세 사람이 담장 너머 야구 경기를 볼 수 있도록 똑같이 상자 하나씩을 나누어주는 것을 평등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평등하게 상자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지만 키가 작은 어린이는 담장 너머 야구경기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을 공평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자가 없어도 담장 너머를 볼 수 있는 어른에게 준 상자를 키가 작은 어린아이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평이라고 합니다.
공의와 공평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주시며 계약의식을 치루는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아브람과 언약을 맺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갑이고 아브람이 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몸소 을을 자처하십니다. 갑이 되셔야 할 하나님께서 왜 스스로 을이 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는 강자들을 외면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자들을 도우심으로 약자와 강자 모두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며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만 바꾸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름도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해 새로 얻은 이름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누구라도 그 인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저 교회에 다니는 교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다고 깨닫지 못한다고 낙심하거나 절망하여 하나님에게서 도망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제멋대로였던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꾸신 것처럼 끝내 우리의 이름을 바꾸시고 우리의 인생, 우리의 운명, 우리의 믿음을 바꾸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