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를 명령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7:9-14, 23-27
창세기 강해 39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7장의 말씀을 가지고 “할례를 명령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아마도 오늘 설교는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들었던 할례에 대한 설교와는 다른 관점에서 설교할 것입니다. 혹시 자신과 다른 해석과 설교에 거부감이 들더라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여기시며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오랜 역사와 그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 대해 배우고 본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어떤 위대한 성경의 인물이라도 그대로 본받아야 할 만큼 완전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인생을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에 대해 깨닫고 발견하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조상이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을 롤 모델로 삼아 그의 믿음을 그대로 본받기 위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가, 창세기가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를 배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창세기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아직 이름을 바꾸기 전이므로 아브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그리고 하란의 아들이자 데라의 손자인 롯을 데리고 갈대아인(바벨로니아)의 우르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으로 가려던 데라는 하란이라는 땅에 이르더니 더 이상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을 멈추고는 그곳에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창11: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에 머물러 사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인도하시는 땅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복 주어 아브람으로 하여금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하시는 것 이것이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람은 조카 롯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미지의 땅을 향해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아브람이 하란에 있는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창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람으로 하여금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껏 아브람이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아브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75세가 되도록 대를 이를 자식이 없었던 자신에게 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이야 많은 젊은 부부들이 무자식이 상팔자라며 의도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브람 시대의 종교문화에 의하면 대를 이를 자식이 없는 것은 가장 큰 신의 형벌이며 저주라고 여겼습니다. 신의 형벌로 저주를 받아 자식이 없다고 생각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내린 신의 형벌인 무자식의 저주를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쌓아올린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인도하신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신 가나안 땅으로 왔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브람은 큰 민족을 이루기는커녕 당장 자신의 대를 이를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도무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브람은 불안과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빠진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들을 보여주시고는 그의 후손들이 도무지 셀 수 없는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 주셨던 언약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주십니다.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은 단지 하늘의 별과 같이 수많은 후손들을 주신 다는 언약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먼 훗날의 일이지만 아브람의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언약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후손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아브람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을 언약하신 것도 아브람의 후손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에게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후손을 주시고 그의 후손들이 장차 그 땅의 주인 되게 하신다고 언약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아브람과 그의 후손을 통해 이루시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아브람의 후손들을 통해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언약을 받았을 때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은 깨닫지 못하지만 먼 훗날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신 사건이 창세기 17장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후손을 번성케 하시어 그에게서 여러 민족들과 왕들이 나오게 할 것이며 그와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언약을 주십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과 15장에서 아브람에게 주셨던 언약을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창세기 17장이 이전과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라함으로 바꾸게 하시고, 사래의 이름 또한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사라로 바꾸게 하셨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지난번 “이름을 바꾸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창17: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17: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창세기 17장에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사건과 함께 매우 중요한 사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신 사건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한국에서는 포경수술이라고 합니다. 고래 잡는다는 은어로 표현됩니다. 한 마디로 할례는 남자의 성기에 앞으로는 민망하니까 거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지나친 상상은 금물입니다. 아무튼 남자 거시기에서 포피라고 하는 껍데기 끝부분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 거시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징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의 증거로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는 단지 아브라함에게만 해당하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대대로 지켜야 하는 명령이자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남자는 태어난 지 팔일 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창17:9-11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심지어 할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이나 장차 그의 후손들에게만 해당되는 명령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속한 이방인 종들까지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아브라함의 핏줄이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더 나아가 할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사람 몸에 새긴 가장 중요한 표징(증거)로 삼았습니다.
창17:13 집에서 태어난 종과 외국인에게 돈을 주고서 사온 종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나의 언약이 너희 몸에 영원한 언약으로 새겨질 것이다.
언약의 표징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할례는 하면 좋고 안 해도 아무런 상관없는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예외도 없는 모든 남자들은 반드시 받아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 후손이 끊어질 것이며, 할례를 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사람,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창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 즉시로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집에 속한 종들까지 할례를 거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거행한 때부터 아브라함 가문에 태어난 모든 남자들은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했습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아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가문에 속한 종의 아들이라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행하였던 할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엄격히 지켜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종교의식입니다. 아브라함은 대략 BC 2100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니까 무려 4천년이 넘도록 지켜지고 있는 것이 할례라는 종교의식입니다.
할례를 명하시는 창세기 17장의 말씀을 읽으며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필이면 왜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신 것일까요? 창세기는 할례를 사람의 몸에 새긴 영원한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을 사람의 몸에 새기는 이유는 아마도 몸에 새긴 표징을 볼 때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지 말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몸에 새겨 잊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라면 다른 좋은 방식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팔이나 다리 또는 몸에 문신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도가 있었음에도 굳이 남자의 거시기 포피를 자르는 할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할례라는 특정한 형식을 지정하여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신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첫 번째 언약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 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거시기의 포피를 잘라내므로 임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렇지 않는 남자들보다 수배로 높였습니다. 게다가 한 달에 한 번 아니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목욕할 수 있는 무더운 사막이라는 환경에서 남자의 거시기를 청결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할례 밖에 없었습니다. 할례를 통해 남자 거시기를 청결케 하므로 아내가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케 하기 위한 것이 할례의 일차적인 목적이지만 이것이 할례를 명하신 하나님의 뜻 전부는 아닙니다. 할례는 사람의 몸에 새긴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남자의 거시기에다 하나님의 언약을 새기게 하셨을까요? 저의 개인적인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성적인 타락과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할례를 받은 자신의 거시기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해야 했습니까? 할례를 받은 자신의 거시기를 볼 때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관계 외에는 함부로 자신의 거시기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두 가지가 성경에 나옵니다. 창세기 34장을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세겜이라는 추장에게 강간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한 세겜이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을 찾아와서는 원하는 것은 다 줄 테니 디나를 자신의 아내로 달라고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누이를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너희 부족 모두가 할례를 행하여 우리와 같아지면 그때 자신의 누이를 주겠다고 합니다. 세겜은 디나를 얻을 욕심에 자신의 부족 남자들 모두에게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이들이 할례를 시행한 삼일 째 제대로 거동도 하지 못할 때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기습하여 세겜을 비롯한 모든 남자들을 죽입니다.
창34:25-26 사흘 뒤에 장정 모두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아파하고 있을 때에 야곱의 아들들 곧 디나의 친오라버니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읍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들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도 칼로 쳐서 죽이고, 세겜도 칼로 쳐서 죽이고, 세겜의 집에 있는 디나를 데려왔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야곱의 아들들이 거짓 술수를 써서 잔인하게 복수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가 디나가 강간당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굳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증표인 할례와 연관시킨 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증표인 할례를 이용해 디나를 강간한 세겜의 잔혹한 성범죄를 단죄한 사건을 창세기가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여자를 강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거스르는 것이며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면 할례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아모리 족속들과 가나안 여러 족속들은 용기를 잃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격하기만 하면 손쉽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길 돌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전쟁을 눈앞에 둔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수5:2-3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물론 성경에 기록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이유는 전쟁에 나서는 남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로 이들은 광야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어려서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라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전쟁을 눈앞에 둔 남자들에게 할례를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하라고 하거나 아니면 전쟁하기 훨씬 전에 하라고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이제 막 전쟁을 치러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할례를 하라고 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치르게 되면 가장 큰 치욕을 당하는 사람들은 늘 여자였습니다. 전쟁에 이긴 부족은 전쟁에 진 부족에 속한 여자들을 마음대로 강간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고대의 전쟁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잔혹하고 역겨운 인간들의 죄악입니다.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쟁에는 여성에 대한 강간이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상대방에는 수치와 공포심을 주기 위해 병사들로 하여금 전략적으로 강간을 저지르게 한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2차 대전 당시 독일을 점령한 소련은 독일군에게 복수한다는 명목으로 무려 2백만에 가까운 독일 여성들을 강간했습니다. 심지어 소련 군대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여자를 강간했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집단 강간 사건으로 강간으로 인한 사망자 수만 24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아무리 나치 독일군이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독일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으로 복수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악한 일입니다.
남자가 자신의 욕정을 채우기 위해 폭력을 이용해 여성을 강간하는 것은 전쟁 시에만 일어나는 범죄가 아닙니다. 성범죄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 끊임없이 지금도 계속되는 남자들의 죄입니다. 아마도 남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죄는 성범죄일 것입니다. 성범죄는 목사들과 교인들이 가장 많이 범하는 죄이기 합니다. 요즘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별장 성폭행 사건의 주인공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는 신실한 집사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할례를 명하셨습니까? 비록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치루지만 가나안 부족의 여자들을 함부로 강간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징하는 표시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은 남자들로 하여금 도무지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런 욕정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할례 받는 자신의 거시기를 볼 때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욕정을 다스릴 것을 깨달아야 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유대인들과는 달리 기독교인인 우리는 더 이상 할례라는 종교 형식을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할례 대신 세례라는 종교 형식을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으로 삼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신 할례를 세례라는 종교 형식으로 대신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절대로 깰 수 없는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럼에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영원한 언약 대신에 주일을 지켜도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31: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할례라는 특정한 형식과 안식일이라는 특정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를 행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특정한 형식을 함부로 어겨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특정한 형식만을 고집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특별한 형식 특별히 하나님께서 명하신 종교 형식에는 그 형식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함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형식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식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 형식은 하나님의 뜻을 담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릇이 있어야 음식을 담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밥을 먹는데 음식보다 그릇이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나 요즘 아침묵상에서 나누고 있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나 기도에는 오랜 세월 지켜져 온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형식에만 집착하느라 예배나 기도를 통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본질을 잊어버리면 아무리 훌륭하게 준비된 예배나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된 기도라 할지라도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예배나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와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고 본질이며 형식은 내용과 본질을 잘 드러낼 수 있기만 하면 형식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충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