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로 나타나신 이유
창세기 18:17-33
창세기 강해 41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8장 17절로 33절의 말씀을 가지고 “나그네로 나타나신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창세기 18장은 하나님께서 낯선 나그네로 변장하여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사람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아마도 구약성경에서는 이 사건이 유일한 사건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교리를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사건일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창세기 18장과 19장의 말씀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선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변장하신 하나님과 천사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변장하신 하나님께서는 두 번에 걸쳐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창세기 19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창세기 19장에서는 하나님은 빠지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두 천사들만 롯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변장한 낯선 나그네를 만났지만 저들이 낯선 나그네를 대하였던 태도는 정반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였지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낯선 나그네를 적대시 하였습니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의하면 낯선 나그네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심판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였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였고 낯선 나그네를 적대시 하였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습니다.
환대는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한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환대는 ‘warm welcome’이나 ‘hospitality’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대의 가치는 그 대상이 익숙한 이웃이 아니라 낯선 타인일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왜냐하면 익숙한 이웃을 환대하는 것은 쉽지만 낯선 이는 환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낯선 이는 환대를 받기보다는 적대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는 것보다는 경계하고 꺼려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낯선 이를 환영하고 환대하기 보다는 경계하거나 꺼려하는 마음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도 인간의 역사에서 낯선 이를 환대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낯선 이들을 무조건 환대했다가 낯선 이들에 의해 약탈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낯선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고 오히려 점령을 당한 경우가 인류의 역사에는 너무나 많이 등장합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였다가 심각한 위험에 처하거나 배신을 당하는 이야기는 영화나 문학작품에도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레파토리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라는 책을 보면 미리엘 신부가 감옥에서 막 나온 낯선 사람 장발장을 선한 마음으로 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장발장이 어떻게 했습니까? 은촛대를 훔쳐 도망쳤습니다. 장발장은 미리엘 신부의 환대를 배신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에서 낯선 이는 환대의 대상이기 보다는 늘 적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낯선 이가 돌변하여 내 것을 빼앗아가기라도 할까봐 괜스레 의심의 눈초리로 낯선 이를 경계하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낯선 이를 환대하기보다는 냉대와 홀대를 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학교나 방송에서는 절대로 낯선 이를 조심하고 경계하고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아마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습관처럼 자신의 자녀들에게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와 적대의 문화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낯선 나그네를 극진히 환대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아브라함처럼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고 자신의 집에 맞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도박과도 같은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환대하는 낯선 이가 천사와 같은 좋은 사람일수도 있지만 언제 어떻게 악마로 돌변하여 자신을 약탈하고 자신의 재산을 빼앗으려 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낯선 나그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 역시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오랜 세월을 낯선 나그네로 여기 저리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우물을 찾아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은 아버지와 형 에서를 속인 대가로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들의 질투 때문에 이집트로 팔려가 죽을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의 땅에서 나그네로 죽어야 했습니다.
야곱과 요셉의 후손들은 비록 이집트에서 큰 민족을 이루었지만 무려 430년 동안을 노예로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을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성경이 묘사하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는 낯선 이, 나그네, 떠돌이 이주민, 난민 같은 단어들이 제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살아야 했기에 하나님의 도움은 물론이요,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낯선 이를 환대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답게 살기위한 도덕적 윤리적 의무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이자 반드시 지켜야 하는 종교적 의무로 여겨졌습니다.
레19:33-34(표준새번역) 외국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너희의 땅에서 너희와 함께 살 때에, 너희는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성경이 가르치려는 환대의 본질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광야의 날씨에 장막 어귀에 앉아 쉬던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 세 사람이 무더운 광야를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낯선 나그네를 발견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달려가서는 땅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야말로 극진한 환대입니다. 낯선 나그네들에게 극진히 인사를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제안합니다.
손님들이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가져다 드릴 것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그늘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저는 손님들을 위해 먹을 것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준비한 음식을 드시고 기력을 보충한 다음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부탁에 낯선 나그세 세 사람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를 위해 차려온 것은 먹을 것 ‘조금’이 아니라 성대한 잔칫상이었습니다. 고운 밀가루 세 스아(한 스아는 약 2갤런 정도)를 가져다가 빵을 굽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고, 엉긴 젖과 유유를 내놓았습니다. 낯선 나그네 세 사람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브라함이 준비한 음식을 먹는 동안, 아브라함은 그들 옆에 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주인이고 누가 나그네입니까? 그런데 환대가 진정한 환대이기 위해서는 정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관건입니다. 주인이 여전히 주인으로 남아서 나그네를 불편하게 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면, 그런 행동은 결코 환대일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를 진심을 다해 그리고 최선을 다해 환대를 하였습니다.
지난 번 설교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일부 교인들이나 목사들 중에는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한 사건이 너무나 생소하다 보니까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그토록 극진히 대접한 이유는 저들이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과 천사들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아브라함은 뛰어난 영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그네를 보고는 그들이 하나님과 천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는 나그네로 변장한 하나님과 천사들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어 극진하게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얼핏 대단히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창세기의 말씀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사막을 여행하는 세 명의 나그네들을 보고 하나님과 천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모습을 하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만에 하나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가 하나님과 천사라는 것을 알고서 그토록 극진히 대접을 했다면 이 사건은 낯선 나그네를 극진하게 환대하였던 사건이 아닙니다. 자신보다 강력한 권세를 가진 이를 극진히 대접하므로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거래나 접대에 불과한 사건이 되고 맙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힘 있는 사람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환대가 아니라 접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환대의 핵심은 조건 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상대가 나에게 이익이 될지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을지 또는 해로울지 따져서 이익이 될 만한 사람에게만 대접을 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환대가 아닙니다. 성경은 가르치는 환대는 그냥 낯선 나그네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주는 은혜입니다. 환대는 거저 베풀되, 되받을 것을 고려해도 무효입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가 하나님과 천사가 변장하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자신의 나그네 되었던 처지를 기억하며 낯선 나그네를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극진히 환대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를 극진히 환대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낯선 나그네는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선물과 축복을 전달해 주시는 하나님과 천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언제쯤 낯선 나그네들이 하나님과 천사들이 변장하여 나타나신 것임을 알아챘을까요?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를 극진히 환대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낯선 나그네를 하나님과 천사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를 극진히 환대하면서도 저들이 변장하신 하나님과 천사라는 것을 알아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아브라함과 사라가 낯선 나그네들을 극진히 환대하면서부터 저들이 하나님과 천사라는 것을 알았다면 내년 이맘때쯤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받아들여 웃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라는 내년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나그네들의 덕담쯤으로 여긴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랬기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나그네들의 말을 듣고는 웃고 만 것입니다.
창18:12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낯선 이를 환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대로부터 지금에게 이르기 까지 낯선 이는 경계와 적대의 대상이지 결코 환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못합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낯선 이를 환대하는 순간 낯선 이는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해 주는 천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헨린 나우웬이라는 신학자는 “적의가 환대로 바뀌면, 두려워하던 나그네는 주인에게 자기가 가지고 온 약속을 드러내는 손님이 된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낯선 이를 경계하고 조심하고 적대시하는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환대하는 것이라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낯선 나그네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이유는 낯선 이를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세상이 아니라 낯선 이를 환영하고 환대하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낯선 나그네들이 아브라함의 극진한 환대를 받고는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마지막까지 낯선 나그네들을 배웅하러 나섭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말씀하십니다.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여기시어 마침내 당신의 존재를 아브라함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저는 이때 비로소 아브라함이 자신이 환대하였던 낯선 나그네가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창18:17 그 때에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신 장차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여 땅 위에 있는 나라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이니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아브라함에게 반복하여 말씀하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직접 확인하시고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조카 롯이 사는 소돔 땅에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섰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소돔 땅에 가지 못하도록 붙잡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막고 서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서 계셨고 천사였던 두 사람만 소돔 땅으로 가게 됩니다.
창18: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떠나서 소돔으로 갔으나 아브라함은 주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나님은 붙잡고 늘어선 아브라함은 자신의 조카 롯을 위해 하나님께 간청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간청하기를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려 하시냐며 소돔 땅에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의인 오십 명을 위해 그 땅을 용서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간청대로 소돔 땅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소돔 땅을 용서하시어 그들에게 내릴 심판을 면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하나님의 허락은 받아낸 아브라함은 또 다시 간청하기를 오십 명의 의인 가운데 다섯 명이 부족하더라고 그 땅을 멸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도 여전히 소돔 땅에 45명의 의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아브라함은 의인 사십 명으로 그 땅을 멸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사십 명의 의인만으로도 소돔 땅에 내릴 심판을 중단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사십 명의 의인에서 다시 삼십 명의 의인으로 그리고 이십 명의 의인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 명의 의인이 있다면 열 명의 의인으로 말미암아 소돔 땅에 내릴 심판을 중단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열 명의 의인을 놓고 간청하는 아브라함의 간청도 들어줍니다. 소돔 땅에 단 열 명의 의인만 있어도 그 땅에 내릴 심판을 멈추실 것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창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 사건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과 목사들이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은 이유를 소돔과 고모라의 동성애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창세기가 주는 메시지를 제멋대로 왜곡하여 자기들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일차적 이유는 낯선 나그네를 적대시 한 것이며 이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를 들자면 소돔과 고모라 땅에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 주기를 하나님은 악인을 심판하기를 즐겨하여 그들이 심판으로 인해 죽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악인이 심판 받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고 악인들이 그의 길에서 떠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것은 낯선 나그네를 적대시하는 저들에게서 더 이상 그 어떤 변화의 가능성도 없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겔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말씀을 마칩니다. 어느 세상이나 어느 시대나 의로운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악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어느 세상 어느 시대나 악한 사람들이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세뇌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너 하나 그렇게 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세상 흘러가는 대로 살라고 합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라고 합니다. 밥이라도 먹으며 세상 편하게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불의가 벌어져도 눈 감고 귀 막고 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바뀌어야 하고 신앙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이나 목사들은 너 혼자 떠들어 된다고 교회가 바뀌지 않는다고 합니다. 굳이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다른 교회들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 여기며 신앙 생활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나 주장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저의 생각일수 있지만 세상에는 악한 이들이 선한 이들보다, 불의한 자들이 의로운 자보다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교회들이 좋은 교회들보다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이용해 종교 장사를 하는 교회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려고 하는 교회들보다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세상과 타락한 교회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미루게 만드는 열 명의 의인, 열 개의 교회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열 명의 의인, 열 개의 교회는 실제 열 명과 열 개의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중단하게 만드는 메타포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자유교회가 세상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연기하게 만드는 열 명의 의인, 열 개의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