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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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베드로전서 4:8-11

 

6월 한 달 동안은 창세기 강해를 잠시 중단하고 몇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방금 읽은 베드로전서 48절로 11절의 말씀을 가지고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최고의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 다 다르겠지만 저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다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지만 단 한 가지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었습니다.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함께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부부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모든 인간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 함께 살아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혼자서 하나님은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통해 함께 어울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은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이것이 혼자 사는 사람에게 사람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창조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라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축복이며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은 모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롯되고 얻을 수 있습니다.


남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아내에게서 옵니다. 아내가 누릴 수 최고의 행복 역시 남편에게서 옵니다. 그래서 남편이고 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최고의 행복은 자식에게서 오고요, 자녀의 최고의 행복은 부모에게서 옵니다. 그렇다면 목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누구에게서부터 옵니까? 성도에게서 옵니다. 반대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목사에게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좋은 목사를 만나고 좋은 성도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점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좋은 것만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가장 큰 축복을 얻기도 하지만 사람이 받는 가장 큰 상처 역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을 통해 얻는 축복이 큰 만큼 사람을 통해 받는 상처 역시 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는 가장 큰 축복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처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우리 속담 가운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음 사용하는 낯설고 생소한 연장을 사용할 때보다 자주 사용하여 내 손에 가장 익숙한 도끼가 내 발등에 상처를 낸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처음 쓰는 연장은 잘 모르고 서툴기에 조심하여 사용하기에 실수로 다치는 일이 적습니다. 하지만 자주 사용하여 손에 익은 연장은 잘 안다고 해서 막 사용하다가 발등에 상처를 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상처받는 경우는 대부분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가장 믿는 사람에게 비롯됩니다. 남편을 찰떡같이 믿는 아내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이 누굴까요? 찰떡같이 믿었던 남편입니다. 아내를 찰떡같이 믿는 남편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이 누굽니까? 찰떡같이 믿었던 아내입니다. 자녀를 믿었던 부모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항상 자녀입니다. 성도를 믿었던 목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목사가 가장 믿었던 성도입니다. 목사를 믿었던 성도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 역시 자신이 가장 믿었던 목사입니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25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제가 섬기던 교인들을 통해 참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을 통해 축복만 받지는 않았습니다. 교인들에 받은 축복 이상으로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었던 교인은 제가 가장 믿을만하고 의지할 만한 교인으로 생각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믿었던 교인에게서 도무지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시골에서 개척교회 목회를 하다가 서울 이촌동에 있는 나름 꽤 괜찮아 보이는 교회로 청빙을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저를 청빙한 장로님은 처음 교회에 저를 소개하면서 어떻게 저를 소개하셨냐 하면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최고의 목사님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목사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습니다. 저는 칭찬하며 젊은 목사를 극진히 섬겨주시는 장로님을 그야말로 찰떡같이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돈독한 관계는 불과 6개월도 채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장로님이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설교를 하니까 새벽기도 때마다 제 뒷자리에 앉아서는 독사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며 저 부정한 입술을 숯불로 지져주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그 장로님 부인은 주일 설교시간마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는 뱀 소리를 내며 대놓고 설교를 방해하셨습니다. 결국 그 교회에 간지 채 일 년도 채 안 되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교회를 떠나고 나서도 얼마나 상처가 되었는지 그 교회 방향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저에게 매우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사람이 받는 상처는 가장 믿었던 사람, 가장 의지하였던 사람, 가장 기대하였던 사람에게서 오기 때문에 상처입니다. 믿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받는 배신은 결코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의지하지 기대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배신하는 것은 결코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왜 믿지도 의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기대도 소망도 가지지 않았고 아무런 기대도 소망도 없기에 이런 사람의 배신이나 아픔은 우리 삶에 그리 큰 영향력을 주지 못합니다. 물론 아주 잠깐 동안은 기분이 나쁠 수 있으나 마음 깊숙이 상처를 남기지 못합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가끔 자신의 실수나 아니면 무례한 사람에게서 욕을 얻어먹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욕을 얻어먹으면 당장은 이것 때문에 몇 십분 길면 몇 시간 동안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밤잠을 설쳐가며 며칠을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금방 잊어버리고 맙니다. 만약 이런 것 때문에 몇날 며칠을 밤잠을 설친다면 욕 한 사람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때문에 심지어는 말하는 뉘앙스 때문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정말 남들이 들으면 아무 것도 아닌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습니다. 심지어 사소한 말 한 마디에 받은 상처를 수 십 년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함께 신앙 생활하는 목사나 교인들이 무심코 한 말 때문에 말 한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는 상처를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믿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까울수록 더더욱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가깝다는 것은 아주 친밀하다는 뜻이지만 조심하고 동시에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하였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의 기억과 아픔 때문에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상처가 너무나 커서 더 이상 누구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목사나 교인들에게 상처를 받고는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워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포기한다면 역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누릴 수 있는 모든 축복이나 행복도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나 교인들에게 받는 상처 때문에 교회를 포기하고 가나안 교인이 된다면 교회를 통해, 신앙공동체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은혜나 축복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말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는 말이 있습니다. 장을 장독에 담아 잘 발효시키려면 여름철에 장독 뚜껑을 열어 두어 햇볕에 말려야 합니다. 그럼 이 때 파리가 열어놓은 장독에 알을 낳게 되고 구더기가 생기게 됩니다. 이 속담이 구더기 생기는 것이 무서우니 장을 담그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니요. 비록 구더기가 생길까 무섭더라고 장을 만들어 합니다. 그래야 한 해 동안 먹을 기초 양념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늘 기쁨이 되거나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사람이 항상 축복의 통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상처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기쁨이 되기보다는 상처를 받는 일이 훨씬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보다 사람으로 인해 받는 기쁨이 훨씬 더 중요하고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로 인해 상처를 받는 경우가 교회로 인해 기쁨을 얻는 경우보다 더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교회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교회를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의 은혜와 축복은 교회로 인해 받게 되는 그 어떤 상처보다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마음에 깊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상처를 받지 않을 완벽한 사람과의 관계는 이 땅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지 말고 살아야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상처가 있기에 회복의 기쁨이 있고, 상처가 있기에 사람은 성숙하고 발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아픔과 상처의 크기만큼 사람은 성숙합니다. 상처가 없이 성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상처가 아닙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는 그 어떤 완벽한 관계라고 할지라도 늘 존재합니다. 진짜 문제는 상처가 아니라 상처에 잘못 대응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냐의 문제이지 언제라도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을 수 있음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라는 것이 늘 상호적인 것이어서 나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것은 상처를 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받을 때에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키워보면 이 사실을 너무나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정말 금 쪽 같이 다루어도 자라며 여기 저기 상처를 내며 자랍니다. 좋은 부모는 자식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온실 속에 자식을 가두어 두는 부모가 아닙니다. 정말 좋은 부모는 자식이 상처를 입을 때마다 상처를 잘 치료해 주어 상처를 잘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돕는 부모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사람에게 사람을 서로가 돕고 살아가는 축복의 관계로 주셨습니다. 하지만 축복의 관계를 주신 인간관계가 축복이 되는 경우보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사람의 실수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믿음의 대상으로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사람을 믿고 의지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235, 사랑이라는 단어가 556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찾아 본 것에 의하면 믿음이라는 단어를 특정한 사람에 대해 사용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모두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하여만 사용되었지 사람에 대해 사용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모세를 믿으라고 하거나, 다윗을 믿으라고 하거나, 바울을 믿으라고 하거나, 베드로를 믿으라고 기록한 구절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사람을 믿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17: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우리 이웃, 교우들은 직장의 동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사람에게 사람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이라는 축복으로부터 기쁨과 감사를 경험하기보다는 상처받는 일이 더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을 사랑하기 보다는 사람을 믿고 의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사람을 믿는 모든 믿음은 결국 실망과 낙심 절망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송한 얘기이지만 세상에 믿을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별히 자기만 믿으라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려 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목회하면서 제가 깨닫고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결코 사람을 믿지도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결코 믿고 의지할 만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다 좋은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다 좋은 분이시라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들을 믿거나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든지 그리고 그 누구라도 심각한 실수나 죄를 지을 수도 있고 또는 저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교회를 떠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믿어 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지는 마세요. 저는 교인들만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제 자신 또한 믿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라도 시험에 들어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저를 잘 아는데 어떻게 제가 저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제가 우리교회 성도님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목사도 성도를 믿지 않으니까 여러분들도 절대로 저를 믿거나 특별한 기대를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냥 여러분이 다니는 자유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로서 사랑해 주시길 바랄뿐입니다.


7:22-24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토록 많은 상처를 받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을 사람들이 채워 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느 사람도 우리에게 절대적인 삶의 안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람도 우리가 필요한 모든 사랑을 다 줄 수는 없습니다. 어느 사람도 우리를 완전히 행복하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부모가 목사가 그렇게 해 줄 것을 믿고 기대한다면 얻는 것은 결국 실망과 상처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유독 실수가 많았으며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신하였던 제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에 상처받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셨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그의 모든 실수와 허물 그리고 배신까지도 덮어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으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변덕을 부리기도 하고,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믿으라고 만드시지 아니하시고 사랑하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사랑만이 실수와 죄로 얼룩진 사람과의 관계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은사와 재능과 능력을 이웃을 섬기도 돕는 것이 사랑입니다.


벧전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10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특별한 능력을 주셨으니 그것을 서로 돕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의 넘치는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십시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을 잘 관리하도록 하십시오.(현대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입는 일처럼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좀처럼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아픔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사람의 실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믿음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으셨는데 자꾸만 사람을 믿으려고 하니까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세상에 믿을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남편을 어떻게 믿어요. 아내를 어떻게 믿어요. 자식을 어떻게 믿어요. 하나님은 사람을 믿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우리에게 붙이신 것은 서로 돕고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유일한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사람들로부터 그토록 많은 상처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것들을 사람들이 채워 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의 반응이나 태도와는 상관없이 내가 마땅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만이 그 많은 허물과 실수와 죄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고 능력입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에 풍성하여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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