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나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12 22:37-40
사람들이 직장에 가기를 싫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일이 힘들기 때문도 있지만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학생이 학교에 가지 싫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부가 힘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함께 다니는 교우들과의 관계에 갈등이 있고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이것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싫어서 교회 다니기 싫다고 하는 교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교회를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가장 먼저는 다니는 교회 목사가 싫거나 목사와 갈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함께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이 싫거나 교인들과 갈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 갈 때 피하고 싶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과의 갈등입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라고 할지라도 사람과의 관계에는 늘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갈등이 없는 인간관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라 할지라도 여전히 갈등이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자식과의 사이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직장이나 운영하는 사업체라고 할지라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똑같이 일어나는 문제가 바로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심지어 인간관계의 갈등은 교회라고 해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교회는 천사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어쩌면 교회는 그 어떤 공동체보다 실수 많고 죄 많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함께 모였으며 갈등이 생기고 파벌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만나는 곳에는 늘 갈등이 끊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사람은 얼핏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하고 추구하고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심지어 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람은 똑같지 않고 다 다르기에 사람이 모이고 만나는 곳에는 늘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다르게 창조하신 것은 갈등하고 싸우며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다르게 창조하신 것은 사람들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돕고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행동, 나와 다른 가치, 나와 다른 태도, 나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도우려 하기보다는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 나랑은 틀린 사람이라며 멀리하거나 적대시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 나하고 틀린 사람이라고 여기는데서 인간관계의 갈등이 시작된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면서 서로를 도우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도우며 살아갈 수 있는 중요한 영적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제자들과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말씀은 딱 두 번이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7장 12절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마태복음 22장 37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두 말씀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신 이유는 구약 성경의 모든 가르침과 교훈은 결국 이 두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수많은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사람에게 가르치길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라고 하신 마태복음 7장과 22장의 두 말씀은 결코 서로 다른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무엇이든지 간에 내가 남에게 대접이나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처럼 내가 먼저 남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인간관계의 영적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대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기준으로 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것같이 남을 대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남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내가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지를 잘 모르고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대접을 받기를 원하는지 모르고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니까 당연히 남을 대접할 줄 모르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이 살면서 맺는 관계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의 관계, 두 번째는 이웃과의 관계, 세 번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 중 가장 어려운 관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가장 대하기 어려운 상대는 하나님도 아니고 아내나 남편도 이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사실 생각하는 것 보다 너무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내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기가 어떤 대접을 받고 싶은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알아야 자기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고 자기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며 또한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기에 사람들은 온갖 중독에 자신을 내어버립니다. 알코올, 마약, 도박, 인터넷, 약물, 일, 돈 중독에 빠져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와 마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귀하게 다루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자아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 보다는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부정적인 자아상을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것은 열등감입니다. 맥스웰 말츠는 ‘사이버네틱스’라는 자신의 책에서 “95%의 사람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열등감으로 인해 심한 무력감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열등감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두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천적인 조건들에 의한 열등감입니다. 주로 외모나 지능에 관한 열등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이 지나치게 큰 사람들은 얼굴에 대해 열등감을 가집니다. 눈이 매우 작은 사람들도 눈에 대한 열등감을 가집니다. 키가 작아도, 뚱뚱해도, 너무 말라도 열등감을 가집니다. 얼굴이 못생겼다는 열등감도 있습니다. 지능이나 타고난 선천적 능력도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두 번째는 후천적인 조건에 의한 열등감입니다. 이것은 환경에 의해 생겨나는 열등감입니다. 주로 가난이나 학력, 성공 등 사회적 활동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열등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보며 열등감을 가집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보며 열등감을 가집니다. 자신의 사업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열등감과 좌절에 빠집니다.
그런데 열등감이 만들어지는 선천적인 조건과 후천적인 조건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비교의식입니다. 열등감은 사람이 사람을 비교하면서 생겨나는 내면의 상처입니다. ‘나는 못생겼어’, ‘나는 무능해’, ‘나는 가난해’ ‘나는 공부를 못해’ ‘나는 뚱뚱해’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남들 보다 먼저 자기 스스로를 무시하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예수님의 달란트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의 비극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다른 사람이 받은 달란트와 비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의 금액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6000데나리온은 노동자의 20년 품삯입니다.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한 달란트가 왜 초라하고 작게 보였습니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열등감에 빠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교하려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함으로 자기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남들과 비교하다 보니 자기의 능력이나, 재능보다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하게 됩니다. 욕심이죠. 자신보다 잘 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고,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면서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라고 하는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제사와 동생의 제사를 비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열등감으로 인해 실패한 인생을 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사울 왕이 열등감을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목동 출신의 청년 다윗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였던 사울이 열등감에 사로잡혀서는 평생을 다윗을 질투하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립니다. 사울왕의 열등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윗과 자신에 대한 비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삼상18:7-8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그럼 열등감 대신에 우월감을 가지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요? 우월감 역시 열등감과 같은 뿌리에게 나온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우월감 역시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나온 열등감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태어날 때부터 키나 눈이 크고, 예쁘거나 잘 생긴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보다 못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가지게 되는 감정이나 생각을 우월감이라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이나 부자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를 통해 자신이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이 우월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가졌던 우월감은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바로 열등감으로 뒤집혀 진다는 것입니다.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얻은 자신감 또는 우월감은 언제든지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열등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월감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아니라 지극히 상대적이고 불안정한 감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학생들 중 열등감으로 인해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 학생들에 대해 조사했습니다. 어느 대학교 학생이 가장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까요? 서울대학교 학생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부분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 2등을 하던 학생들입니다. 자신감과 우월감으로 서울대에 왔는데 막상 와보니 나만 전교 1등 2등 한 게 아니라 거의 모두가 다 전교 1,2등 하던 애들입니다. 그리고 서울대에도 1등이 있으면 꼴찌가 있기 마련입니다. 매번 1등만 하던 애들이 1등을 하지 못하면 그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해 심각한 상처를 입고는 누구보다도 강한 열등감에 사로잡힌다고 합니다.
비교의식으로 생겨난 열등감이나 우월감은 감정적인 상처를 만들어 냅니다. 무엇입니까?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히면 사람들은 두려움, 불안, 자기 학대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작은 실수나 문제에도 심하게 불안해하고 자기를 비하하며 자책합니다. 또한 자기의 열등감을 감추고 보호하려고 남들보다 더 강한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열등감이 심한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완벽 주의적 증상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열등감으로 인해 남들에게 지나치게 겸손하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관계가 좋아 보일 수 있지만, 내적으로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깊이 발전하지 못하며 조그마한 갈등이 시작되면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관계를 단절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피해의식을 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열등감은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굴복적이며 스스로를 비하합니다. 반대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열등감이 우월감으로 변해 함부로 사람을 대하고 무시하거나 군림하려고 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존귀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나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자존심을 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가진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열등감이나 우월감이라는 잘못된 자아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내 인생의 유일한 가치의 기준으로 삼을 때만 열등감이나 우월감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우리의 가치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이란 결국 내 인생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 기준에 내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내 가치의 기준을 내 주변의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내 가치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면 환경이 하나도 바뀌지 않아도 관계없습니다. 신체장애가 더 이상 열등감을 조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키가 작은 이유로 더 이상 위축되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학벌이 좋지 않은 것이 더 이상 열등감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우리 그 자체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우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잘 대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앤드류 매튜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자신의 인생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절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존귀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물론 자기 사랑에 있어서 주의해서 분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사랑인지 아니면 자아도취나 이기심이 아닌지를 제대로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아도취나 이기심을 자기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보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내가 가장 잘 낫다고 생각하거나,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아도취이며 이기심입니다.
진정한 자기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기 사랑이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장점과 약점을 모두 인정하고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것을 지금 당장 멈추어야 합니다. 자기 사랑은 자기 스스로를 존귀한 존재라고 여겨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소중하게 여겨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자기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고 내게 주어진 삶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삶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며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을 강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이웃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나와 비교하고 경쟁해서 내가 이겨야 하는 적이 되고 맙니다. 결국 이런 세상이 만들어 내는 세상은 힘 센 사람만이, 부자만이, 성공한 사람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그들의 밥이 되거나 들러리가 되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세상입니다. 과연 이런 세상이 우리에게 진짜 행복을 줄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을 해봐도 이런 생각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지고는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의 삶은 결국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고 주변의 사람도 불행하게 만들고 맙니다. 내 인생이 행복해지고 존귀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원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존귀하게 여기고 아름답게 만들려고 애써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은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욕심에 있지 않고 내 주변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삶에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선지자이며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이것이 우리의 선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