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믿음이 늘 거기서 거기인 이유
마태복음 6:1-6, 16-18
오늘은 “내 믿음이 늘 거기서 거기인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교인들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습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이 교회를 다닌 햇수를 평균을 내면 아마도 최소 10년은 넘을 것입니다. 10년 이상을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면 그동안 꽤 많은 예배에 참석했을 것이며 생각보다 많은 목사의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꽤 많은 헌금도 드렸을 것입니다. 말이 10년이지 10년은 꽤 오랜 시간입니다.
스톡홀름대학의 앤더스 에릭슨 박사는 “10년의 법칙”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서 공통점에 찾는 연구를 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서 그가 찾은 공통점은 이들은 모두 최소 10년간의 집중적인 연습과 훈련이 있은 다음 비약적인 성장과 성공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기초로 해서 어느 분야이든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10년의 집중적인 연습과 훈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10년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10년의 법칙”과 비슷한 주장이 있습니다. 말콤 글래드웰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1만 시간의 법칙”입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은 누구라도 1만 시간을 들여 연습하고 훈련하면 자신이 연습하고 훈련한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1만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루에 평균 3시간, 일주일에 20시간씩 하면 10년이라는 기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앤더스 에릭슨 박사의 “10년의 법칙”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10년을 넘게 교회를 다녔으며 10년을 넘게 교회를 다닌 교인들 대부분은 교회를 다니던지, 기도를 하든지, 성경을 읽든지, 방송으로 설교를 듣던지, 찬양을 듣던지, 전도를 하거나 단기선교를 다녀오던지 1만 시간쯤은 신앙생활을 위해 투자하였습니다. “10년의 법칙”이나 “1만 시간의 법칙”에 따르면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이미 대단한 전문가가 됐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곰곰이 살펴보면 교회생활의 전문가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믿음에 대해서는 늘 거기서 거기인 신앙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꽤 잘하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믿음만큼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10년 전보다 못한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의 믿음은 늘 거기서 거기를 맴돌며 좀처럼 성장하지도 성숙하지도 못하는 것일까요? 믿음에 투자한 시간이 아직 1만 시간이 안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제대로 교회를 다닌 시간이 아직 10년이 안 되었기 때문일까요? 1만 시간이 되고 10년이 넘으면 우리의 믿음은 원하는 만큼 자랄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 가운데 저 사람은 참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소개할 수 있는 교인을 몇 명이나 꼽을 수 있습니까? 아마 다섯 손가락 채우기도 힘들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학교를 아무리 오래 다니거나 열심히 다닌다고 모든 학생들이 다 공부를 잘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학교를 오래 다니거나 열심히 다녀도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공부에 재능이 없거나 공부에는 관심이 없이 학교를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그저 교회를 오래 다니기만 한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와 신앙에 대해 착각하고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는 것이 곧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교회를 잘 다니는 것은 교회생활을 잘 하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생활을 잘 하는 것이 곧 신앙이나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잘 믿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지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10년의 법칙”이나 “1만 시간의 법칙”은 매우 위험한 주장입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1만 시간이나 또는 10년 동안 한 가지 일에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모두가 다 전문가가 되고 성공한다는 주장은 매우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노력보다 중요한 것이 타고난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며, 노력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이며, 노력보다 중요한 것이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에디슨의 말은 잘못 전해지는 대표적인 이야기입니다. 에디슨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원래 에디슨이 한 말은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노력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디슨의 말을 들은 신문기자가 에디슨을 노력하는 사람으로 미화하고 사람들에게 노력하는 삶을 선동하기 위해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하기만 하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선동이자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기만 하면, 예배나 기도나 성경읽기와 같은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주장은 신앙과 믿음에 대한 매우 위험한 선동이며 거짓말입니다. 물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신앙문제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 않아서 생겨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라는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종교행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 가지 종교 행위를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을 의로운 사람이라 여겼으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죄인이라 불의한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하나님을 믿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 행위이지만 이 세 가지를 할 때에는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고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할 때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가르쳐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제와 기도 금식 세 가지 종교 행위에 있어서 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르치신 것은 외식하는 것입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롭고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자랑하려고 진실한 마음 없이 그저 흉내만 내는, 시늉만 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마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마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예수님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라는 신앙생활에 있어 철저하게 경고하시고 금하신 것이 외식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외식하는 것을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라는 종교 행위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셨을까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하나는 외식을 통해서는 신앙을 통해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발은 회개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회개라고 하면 가슴을 치며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는 이런 감정적인 격동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뀌면 자연스럽게 말이 바뀌고 행동도 바뀌고 삶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그런데 생각이 변하지 않고,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변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 눈에 보이는 행동만 변한 척 하는 것으로는 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매우 큰 스트레스가 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힘이 들고 부담이 된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의로운 척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믿음 있는 척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괜찮은 사람인 척 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자유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오히려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외식의 문제가 예수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까지 여전히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심각하고 중요한 욕구입니다.
사람들이 외모와 몸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유도 결국 남들에게 잘 생긴 사람, 멋진 사람, 섹시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이 돈이나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남들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 또는 실력을 인정받고 자랑하고 싶은 욕구에서 시작됩니다.
부모들이 지나치게 자식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자식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 속마음은 자식을 통해 자기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욱 더 자식을 통해서라도 인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성공이나 출세에 지나치게 집착을 합니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쳐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적인 신앙훈련에 있어서도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자신의 내면을 성숙케 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기 위한 영적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초점을 두어야 할 영적훈련이 자꾸만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이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으면 더 좋겠지만 세상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원하고 바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 결코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많으며 반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이 사람에게는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태반인 것이 세상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며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이 세상을 바꾸는 믿음입니다. 남이 인정하든 안하든,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다면 옳은 것이고, 잘못된 일을 했다면 잘못한 것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옳은 게 틀린 게 되지 않고, 남이 알아준다고 틀린 게 옳은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정받으려는 욕구, 여기에서 위선과 조작은 시작됩니다. 남의 생각이나 판단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정말 내가 가는 길이 옳다면 그 길로 가면 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람이 주는 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소원한다면 남의 시선, 남의 눈치에 너무 연연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이 인정해주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앞서게 되면, 옳은 일, 바른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인정받기 위한 일을 하게 됩니다. 남들이 ‘잘 한다’고 인정해주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하지 않는다. 교인들이 삯꾼 목사나 종교지도자들에게 속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고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에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데서 생겨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해도 자기 믿음의 성장과 속사람이 성숙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 존경을 받기 위해서 합니다. 이런 데서 신앙생활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이것은 더 이상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경계하셨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외식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외식에 대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해결책으로 주신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은밀하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은밀함입니다. 은밀함이야말로 가짜 변화가 아닌 진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앙훈련입니다.
마6: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으려는 신앙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내면이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점점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신앙생활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삶을 더 무겁게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래 교회 다녀도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마23:27-28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아름답게 장식한 무덤 같아서 겉은 좋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온갖 위선과 죄가 가득 차 있다.
정말 내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인 은밀함을 원리를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라는 신앙훈련에 적용해야 합니다. 은밀함이야말로 습관적이고 고질적인 우리의 외식하는 신앙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하고, 가장 효과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변화 되는 것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은밀하게 하였던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자기 입으로 구제한다, 기도한다, 금식한다고 떠벌이는 사람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 대부분은 종교 사기꾼일 가능성이 큽니다. 가짜 신앙인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하게 행해져야 할 신앙훈련 사람에게 자랑하는 것은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제발 기도빨 영빨이 세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기도 받으러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기도하면 들어주시지 않는 기도를 기도빨이 센 사람이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하나님 절대로 아닙니다. 누군가의 중보 기도가 필요하다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탁해도 충분합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건해 보이려고, 믿음 있는 척 하려고 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기도와 금식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나 금식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전부입니다. 참된 경건은 사람을 의식할 때 나타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할 때 나타나는 행위가 진정한 성도의 경건이 됩니다. 그리고 이 경건이 사람을 제대로 변하게 합니다. 정말로 변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이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구제하고,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하게 기도하고, 금식 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수염을 깎아 도저히 금식하고 있는지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가려치신 것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라는 종교 행위를 은밀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담긴 가장 중요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남에게 보이기 위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건을 이루기 위한 종교행위를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수단을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엉뚱하게 해석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골방 기도실을 만듭니다. 심지어 큰 교회 건물을 짓고는 담임목사를 위한 조그마한 골방 기도실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동네방네 골방 기도실에서 몇 시간 기도했다고 떠들고 다닙니다. 교회 좀 다녔다고 하는 교인들이나 목사들이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기도원 간다고 광고하고 갑니다. 기도원 가는 건 좋은데 제발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다녀오세요.
말씀을 마칩니다.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개입될수록 그것은 가짜가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해도 자기 믿음의 성장과 속사람이 성숙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 존경을 받기 위해서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경계하셨던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인지상정이라고 하지만, 신앙생활에서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지나치게 되면 그 신앙은 결코 제대로 된 신앙이 되기 어렵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개입될수록 가짜 신앙이 되고 맙니다. 자기 신앙성숙을 위한 경건으로 구제를 하고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하는 것과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기를 들어내기 위해 구제를 하고 기도를 하고 금식을 하는 것은 아무리 그 행위가 똑같다고 해도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위선입니다.
내가 정말 변화된 삶을 살기를 원하고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외식하는 신앙을 멈추어야 합니다. 사람을 속이고 스스로를 속이고 나아가 하나님마저 속이려는 위선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은밀함이라는 영적원리에 신앙생활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하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진짜 나의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내가 정말 믿음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상급을 바란다면 사람의 시선, 사람의 칭찬, 사람의 인정으로부터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남을 무시하거나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만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남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입니다.
교인들의 시선에서, 목사의 시선에서 좀 더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우리를 늘 보시는 하나님을 좀 더 민감하게 느끼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조금씩 더 많이 성숙하고 성장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에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