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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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뛰어넘는 믿음.mp3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

마가복음 5:21-36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마다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는다는 소문이 나자 예수님 주변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질병을 치료받고 싶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신비한 이적을 구경하려고 모여든 사람이었습니다. 구경꾼이 더 많은 것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의 교회나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을 때에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자신의 딸이 곧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께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놀라서 회당장 야이로를 바라보았습니다.


5:22-23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간곡히 청하였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회당장은 말 그대로 회당(synagogue)을 총 책임지는 지도자였습니다. 유대 종교문화에서 회당은 매우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유대교 신앙은 성전과 제사장 중심에서 회당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율법을 배우고 공동체의 크고 작은 일을 논의했습니다. 그야말로 회당에서 공동체의 종교와 교육, 정치가 모두 이루어져졌던 것입니다.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랍비라고 했고 회당을 총괄하여 책임졌던 사람을 회당장이라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회당장이라고 하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당장에게 고개를 숙였지 회당장이 사람들에게 고개 숙일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당장 야이로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을병에 걸린 것입니다. 아마도 야이로는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재물, 그가 가진 명예, 그가 누리는 종교적 지위를 가지고도 딸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는 그 어떤 것으로도 딸의 병을 고치지 못하자 회당장 야이로가 마지막 소망을 걸고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린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사건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회당장 역시 나름대로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종교 지도자가 예수라고 하는 젊은 종교 지도자를 찾아와서는 그 발아래 엎드려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회당장 야이로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 발아래 엎드리게 된 것일까요?


한국에서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던 이어령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88서울 올림픽의 개막식을 기획한 것으로도 유명한 분이십니다. 또 이 분이 유명했던 것은 한국의 대표적인 무신론 지성인이었습니다. 이 분은 여러 방송에 나와서는 당당하게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소개하며 신이 있었다면, “6.25 전쟁 당시 신은 무엇을 하고 있어나?”라는 비판을 하며 이 세상에 신은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이처럼 숱한 방송과 자신이 쓴 책에서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주장했던 분이 갑자기 2007년에 회심을 하더니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어령 교수의 회심과 세례는 많은 사람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어령이 예수를 믿다니? 나이가 들더니 노망이 들었다며 조롱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졌던 관심은 따로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신론자임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지성인이 회심을 하더니 스스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느냐? 는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에게는 이민아라고 하는 딸이 있었습니다. 이어령 교수의 딸 이민아 씨는 아버지와는 반대로 신실한 기독교인 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무신론자의 딸이 신실한 기독교이 되고 심지어 목사가 되기까지는 그녀가 겪어야 했던 그야말로 그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고난과 역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암 발병과 암 투병, 망막 박리로 인한 시력 상실의 위기 그리고 자신의 26살 된 맏아들을 병명도 모르 채 19일 만에 떠나보내야 했던 고난과 시련은 그녀를 목사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던 그녀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자신에게 닥친 그 엄청난 시련을 도무지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이어령 교수는 사랑하는 딸이 결혼에 실패하고 이혼을 한다고 해도 무신론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딸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심지어 딸에게 암이 재발하여 재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무신론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딸이 자식을 잃고는 망막박리로 시력마저 잃게 된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딸이 수술을 받는 하와이의 작은 교회당을 찾은 아버지는 딸이 기도하던 영혼의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가 드린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 찬란한 빛과 아름다운 풍경.

생명이 넘쳐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당신께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당신의 딸 민아 에게 그 빛을 거두려 하십니까. ()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 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자신의 딸이 자식을 잃고는 눈물로 지새우다 자신의 시력마다 잃게 되는 고난에 처하게 되자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았던 이민아 씨의 아버지가 마침내 회심을 하고는 자신의 무신론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회심을 한 이어령 교수는 고난 받는 딸을 위로하며 아버지는 딸에게 한 마디를 건넵니다. “나 세례 받는다고 목사님께 말해딸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위기가 없었다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회당장이 예수님께 나왔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비난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딸의 문제, 인생의 역경이 회당장 야이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리게 만든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지위나 신분으로는 도무지 예수님께 다가 갈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체면이라는 장벽이 있었고 다른 사람의 시각이라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겹겹이 둘러싸인 장벽을 뛰어넘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위기입니다. 딸의 죽을 위기! 위기가 자신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야 말로 고난이나 역경이 주는 가장 큰 유익이자 은혜라고 믿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평탄함과 풍성함 그리고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척척 이루어지는 형통함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내 삶이 좀 더 풍성하면, 내 삶이 좀 더 여유로워지면, 내가 좀 더 성공하면 이전 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형통하면, 평탄하면, 부유해지면 높아지려고 하지 결코 넓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한 번도 안 해 보았던 일을 하고,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려 하고, 이제까지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기도할 때가 언제입니까? 고난의 때입니다. 위기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은 높아지는 인생이 아니라 넓어지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축복받은 인생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넓어지는 인생입니다. 형통함이 우리를 넓게 하는 것 아니라 고난이 역경이 시련이 우리를 크게 만들고, 우리를 넓게 만듭니다.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한계를 뛰어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넘을 수 없는 인생의 한계를 고난이라는 축복을 통해서 넘게 만드십니다. 딸의 질병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으로 하여금 도저히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었습니다. 딸에게 닥친 고난은 무신론자 이어령으로 하여금 무신론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까지 다섯 곳의 교회를 섬겼는데 그 중 세 교회가 개척교회입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한 곳은 충북 음성군 문암면이라는 농촌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5년간을 농촌에서 할머니들을 모시고 목회를 했지만 혈기왕성한 20대 목사가 견디기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도시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도시의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마침 인천에 있는 한 교회를 소개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선배 목사님들이 하나같이 그 교회에 부목사로 가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니가 거기가면 한 달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거나 아니면 교회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 부목사로 있었던 선배 목사의 사정을 들어보니 정말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부목사로 가는 것을 포기 하였습니다.


부목사로 가는 대신 서울 동부이촌동에 있는 교회로 개척목회를 나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10개월 목회를 하며 평생 받을까 말까한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아 도무지 더 이상 목회를 하기가 싫어 졌습니다. 더 이상 목사를 못하니 전셋집이라도 얻어달라고 어머니에게 조르고 졸랐는데 어머니께서 끝내 안 해 주셨습니다.


결국 호구지책으로 부목사로 가기로 마음을 바꾸고 부목사를 구하는 교회를 찾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여러 교회에 이력서를 냈지만 한 군데서도 오라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절망하고 있던 중 이력서도 내지 않은 교회에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어떤 교회지 아세요? 시골에 있을 때 소개 받았던 인천의 교회였습니다. 일 년 전 그 교회를 소개받고는 거기는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포기하였던 그곳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인천에 있는 그 교회에 가서는 제가 견딜 만 했겠습니까? 아마 시골 개척교회에서 바로 인천에 있던 그 교회로 갔다면 선배 목사들 말처럼 정말 단 한 달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 이촌동 교회에서 받았던 연단과 시련이 너무나 컸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타코마에 있는 교회에서 부목사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타코마에서 사역했던 교회는 쉬었을까요? 아니오. 인천에 있는 교회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넉넉히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미 받은 연단과 시련이 컸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큰 고난이나 어려움을 겪었다고 인생에 또 다른 고난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고난과 고통 시련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큰 시련이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다음에는 비슷한 시련이나 어려움은 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훈련이고 연단입니다. 훈련과 연단으로 단련된 인생은 반복되는 인생의 고난이나 어려움을 능히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전에 가졌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예수님께 엎드린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을 향하여 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는 심지어 예수님을 밀치며 따라갑니다. 도대체 예수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어떻게 고치는지 보겠다는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에워싸고는 야이로의 집을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5:24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 오면서 예수를 밀었다.


예수님께 엎드린 야이로의 간청을 듣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을 향하여 갑니다. 일분일초가 급하게 가는 도중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집니다.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믿음대로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은 즉시로 병에서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5:28-29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느끼신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을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가던 길을 멈추시고는 뜬금없이 자신의 옷을 만진 사람을 찾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가는데 그래서 옷깃이 스치고 몸이 부딪치는 일은 너무나도 흔한 일인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시려 하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가던 길을 멈추시고는 옷을 만진 여인을 찾으신 것일까요? 한시가 급한 상황에게 가던 길을 멈추시고 병에서 고침을 받은 여인을 굳이 찾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12년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셨다고 자랑이라고 하시기 위함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인 지체와 멈춤을 통해 한시가 급한 회당장 야이로에게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겪어야 하는 예상치 못한 고난이나 시련을 겪으며 배우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면서 겪어야 하는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은 항상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이 잘 변하지 않지만 고난을 만나게 되면 사람은 대부분 변화됩니다. 예상치 못한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이 가져오는 변화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고난으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나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고난으로 인해 이전보다 훨씬 좋은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고난은 반드시 이 두 가지 변화 중 하나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럼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아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삐뚤어집니다. 오죽하면 시집살이 많이 한 며느리가 더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경우 예상치 못한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전보다 나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고난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대하고 너그러웠던 사람도 계속되는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으로 인해 매정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으로 인해 이전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자신이 겪어야 했던 인생의 시련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공감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고난으로 인해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던 믿음을 가지게 되기도 하고, 고난 때문에 이전보다 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비슷한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이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차이를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겪는 시련이나 고난이 자동적으로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은 이전 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어떤 사람은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내가 겪어야 하는 고난이나 시련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는 우리는 결코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쁘게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겪어야 하는 인생의 시련에는 반드시 내가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무엇을 배우길 원하십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을 바꾸길 원하십니까?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나 시련을 통해 우리는 이전 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시간을 지체하셨는지 야이로의 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종의 전해 준 소식대로 자신의 딸이 이미 죽었으니 야이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갈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이제 야이로는 딸의 죽음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엎드리게 만들었던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깨어진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 한계를 뛰어넘을 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기대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늘 자신의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사람일수록, 어려움을 겪는 사람일수록, 고난을 겪는 사람일수록 더욱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인생의 가장 값비싼 고난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겪는 고난이나 시련 때문에 이전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무시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가던 걸음을 의도적으로 멈추시므로 회당장 야이로에게 자신의 딸이 죽게 된 것이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라고 한다면,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의 문제 역시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12살이었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이라 믿습니다. 자신이 문제가 급하고 힘든 만큼, 자신이 겪는 고난이 힘들고 아픈 만큼 이웃이 겪는 아픔 역시 급하고 힘들고 아프다는 사실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우리가 가진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라는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이 겪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다른 이들의 고난과 시련을 공감하고 긍휼히 여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에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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