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이유
요나서 1:1-3
지난 5월말 42번째로 중단했던 창세기 강해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창세기 강해가 너무 지루하고 어렵다는 분들이 있어서 좀 더 시간을 두고 창세기 강해를 준비한 다음 창세기 강해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강해 대신 오늘부터는 구약성경 요나서의 말씀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요나서는 4장 밖에 되지 않는 동화 같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성경입니다. 요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 이야기나, 하룻밤에 자랐다가 하루 사이에 사라지는 박 넝쿨 이야기 때문에 그저 재미난 우화쯤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재미나고 신비한 이야기 정도로 여길 수 있는 단순한 성경이 아닙니다. 요나서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 누구나 들어도 쉽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절묘하고 정교한 메타포로 가득한 문학작품이자 심오한 신학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는 수천 년간 지속되어 왔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매우 심각하면서도 충격적인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이시며,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오로지 자신들만의 하나님이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유일한 민족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며 자신들만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저들의 믿음과 생각을 깨뜨립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에는 하나님은 모든 나라, 모든 사람,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모든 나라,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직 내 나라, 내 교회, 내 가족 더 나아가 항상 내 편만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은 진짜 하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마음이 만들어 낸 가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요나서가 주는 영적도전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요나서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초점을 둡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가지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가두어 두고는 자신의 틀 안에 가두어 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신념을 믿는 믿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진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가짜 하나님을 믿으며 신앙 생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성경말씀입니다.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예언자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남들보다 먼저 듣거나 깨닫고는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비둘기라는 뜻을 지닌 요나라 이름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 요나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상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하게 선지자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도 분명하고 명확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라고 하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요나는 왜 하나님이 가라는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갔을까요? 요나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니느웨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어디로 가려고 했습니까?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요나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도대체 요나는 왜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려고 했을까요?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다시스로 가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듣고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선지자라고 하는 요나가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확실한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가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니느웨는 요나의 조국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아시리아는 훗날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이기도 합니다. 자기 조국을 괴롭히고 장차 자기 조국을 멸망시킬 원수의 나라를 요나가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요나의 마음엔 니느웨에 대한 깊은 원한과 미움이 있습니다. 원수의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 멸망하기만을 원했습니다. "니느웨는 망해 버려라" 이것이 요나의 마음이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에게 니느웨로 가서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는 명령을 통해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요나가 깨달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여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 주는 말씀은 요나서 4장 2절의 말씀입니다.
욘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 다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요나의 불순종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효자라고 해도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자식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보다는 모른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중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을 습관처럼 반복합니다. 물론 틀린 주장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부 목사나 교인들 가운데 말끝마다 하나님을 앞세우면 마치 자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목사나 교인을 보면 사기꾼이라 여기시면 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부 목사나 교인들 중에는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성경을 배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바른 태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다는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핑계로 자신들의 불순종을 합리화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는 불순종에 대한 변명이요 핑계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제멋대로 살지 않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합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죄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내 이익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특별히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저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교인들에게는 대부분 비슷한 특징이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계획대로 잘 풀리지 않는 경우입니다. 도대체 왜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묻던 교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계획이나 뜻대로 잘 풀리기 시작하면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형통할 때는 결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으면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교인들이 정말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정말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언제쯤이나 되어야 이루어질 것인가 입니다. 교인들이 정말 이루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계획입니다. 한 마디로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신앙생활을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까?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이것이 우리의 실제 모습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인간 최초의 불순종이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으신 모든 것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했습니까?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명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창2:16-17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도대체 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까?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죄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저지른 불순종이요 죄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일 날 교회를 오는 도중에 뺑소니 사고로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가야 할까요? 아니면 쓰러진 사람을 먼저 도와주어야 할까요? 쓰러진 사람을 외면하고 드리는 이 사람의 예배를 하나님의 기뻐하실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절대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사람의 예배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교회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해 보려고 노력하면서 계속 교회를 다녀야 합니까? 교회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교회를 찾아 다녀야 합니까? 아니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해 보려고 더 많은 노력해 해야 합니까? 도대체 어떤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뜻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쉽고 분명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많이 그리고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많이 그리고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우리의 뜻과 생각하고 너무나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이렇게 행동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살면 세상에서 손해 보아야 할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정말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내 뜻이고 내 생각이고 내 이익입니다. 자신의 뜻과 생각과 이익을 따라 행동하고 결정하고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몰랐다고 변명하며 핑계합니다.
정말 내 인생과 신앙이 달라지길 원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변명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른다고 변명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능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려고 하면 그 길을 막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 항에 도착했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됩니다. 이 부분을 주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특별히 마침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이야기는 무려 27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요나가 가려고 했던 다시스라는 도시는 지금의 스페인 남부 항구도시입니다. 요나 시대에 다시스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곳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다시스로 가는 배도 자주 있지 않았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 항에 도착하니 마침 다시스로 가려는 배가 있어서 요나가 그 배를 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도 세상 살아가는 데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쉽습니다.
세상에서는 의인보다 악인이 형통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보다 악하고 아부하고 이간질하고 사기 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세상에서 승승장구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성경을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제가 마음에 두는 말 가운데 하나가 부러워하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잠24: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요나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막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합니다. 마치 기계에 윤활유가 잘 쳐진 것처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척척 맞아 떨어집니다. 하지만 불순종의 항구에서 '마침' 만나게 되는 배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인생의 위기의 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순조롭게 척척 이루어질 때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일까요?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 뜻을 이루며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내게 유익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추는 것이지 우리의 뜻에 하나님의 뜻을 맞추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가 원하는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함을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은 내 뜻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뜻이 이루어질 때 내가 복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내가 진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이 우리 모두의 신앙의 여정에 반드시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