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불순종, 우리의 불순종
요나서 1:1-3
요나서 강해 2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도 지난주와 같은 요나서 1장 1절로 3절의 요나서 말씀을 가지고 “요나의 불순종, 우리의 불순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요나서 1장에 기록된 요나의 불순종은 단순히 요나에게만 해당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우리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불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신앙 생활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요나서의 이야기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럼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매우 심각한 착각이며 오해입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에 대해 질문하고 연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철학자들의 질문에 수많은 철학자, 신학자들이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주장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어떤 철학자나 신학자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해 누구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분명하고 명확한 설명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여부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분명하게 증명하는 데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습니다.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이것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이미 전제하고 기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꽤 그럴듯한 생각이며 주장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여부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이미 전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존재와 비존재라는 프레임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 요한일서 4장 말씀입니다.
요일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기를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존재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흔히 무엇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와 같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사랑하는 마음속에 존재하시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삶 속에 존재하시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사랑을 통해 존재하시고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구약의 말씀이 바로 요나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분명하게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라고 하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명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오히려 니느웨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도대체 요나는 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가려고 했을까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한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합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지 않습니다.
요나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인지 불순종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따라서 우리 대부분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불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저지르는 불순종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왜 하나님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니느웨가 제멋대로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던 것입니까? 요나는 비록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분명하게 들었지만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까지 자신의 생각과, 지금까지 자신의 신념과 지금까지 자신의 확신과는 너무나 달랐기에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나의 불순종의 일차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순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하신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요나의 조국 북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침략하고 괴롭히는 나라였으면 훗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요나의 입장에서 앗수르는 원수의 나라요, 니느웨는 원수의 수도였습니다. 요나는 자신에게 원수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도 원수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에게 니느웨는 원수의 도시가 아니라 니느웨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실 도시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요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의 기대와 자신의 바램과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 다른 하나님의 모습에 요나는 너무나 실망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알던 하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려고 한 것입니다.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가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도망치는 것은 그리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우리 중 누구라도 요나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요나와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요나의 불순종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같지 않기 때문에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불순종합니다. 그리곤 자신의 불순종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정당화하려고 하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누구 뜻을 따라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자신의 뜻을 하나님이 따라주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소원을 이루어 주길 바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전락시키는 우상숭배입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누구의 마음을 따라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현실은 늘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따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기보다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것은 자기 신념, 자기 확신이 만들어 낸 가짜 하나님을 믿는 가짜 신앙 가짜 믿음입니다.
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지 못하였습니까? 요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알았지만, 요나의 마음에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믿었지만, 요나의 마음에는 은혜가 없었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아는 것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알지 못하니까 머리로 안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성경공부를 하고 예수님을 믿어도 변화되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믿지 않고 머리로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사람의 지식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머리로 아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마음으로 아는 것을 요구합니다.
신약성경 빌립보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칩니다. 설교를 들어서 알고 성경공부를 통해 아는 예수님으론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과 말과 삶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생명이 역사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주장이 옳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대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신학교를 다닐 때 제가 생각하였던 진리는 항상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저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회의 잘못된 것, 교단과 교회의 거짓된 것에 대해 반항하고 저항하기 위해 대학생활 4년을 보냈습니다. 자유교회를 개척하고서도 건강하고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하여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신앙과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목회를 하면 할수록 깨닫는 사실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 결코 좋은 교회, 좋은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옳은 생각, 옳은 행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 옳은 행동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을 상처 내는 싸가지 없는 말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진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진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옳은 일과 바른 생각을 한다고 하여도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기 못하면, 우리는 교만해져서 스스로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같이 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일과 바른 생각 때문에 사람들과 다툼이 끊이지 않게 되고, 사람들과 만나기만 하면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아닌 자기 신념이나 자기 확신에 빠진 신앙인들을 보면 교회를 다닐수록 이전보다 더 너그럽고 포용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나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 적대감을 가집니다. 교회를 다닐수록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데 전문가가 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죄인들 이방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진심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배우고 품으려는 사람은 교회를 다닐수록 그 믿음이 깊어질수록 이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을 품어주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믿음이 자기신념이나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믿음인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배우려는 믿음인지를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개인의 원한에 해당하는 원수를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시하고 저주하였던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방인들도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유대인들은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저주하였습니다.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저들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독점하며 하나님을 자신들의 민족신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여겼던 유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떻하십니까? 여러분 마음에 드십니까?
마5:45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만약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게 도무지 억울해서 견디지 못하겠다면 아마도 기독교인이 되시는 것을 포기하셔야 할 겁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봉사하는 나와 건성으로 교회를 다니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차 공평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겠다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는 별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자신들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른 민족이나 사람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며 그들이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을 이유도 없었고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이유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모든 민족 모든 열방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민족신 또는 수호신쯤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비를 내려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까지 수천 년간 지속되어왔던 유대인들의 믿음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민족신 수호신으로서의 하나님에서 모든 민족, 모든 열방,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시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선지자 요나에게 패러다임의 전환, 믿음의 전환을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도저히 지금까지 자신이 확신하던 믿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요나로부터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믿음은 요나의 믿음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은 내 편만 되어주셔야 하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싫어하셔야 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벌 주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지금까지 요나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꾸라는 명령입니다. 요나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니느웨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다시스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에 대한 자기 확신과 편견에서 벗어날 것을 명령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자기 확신과 편견의 신앙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과 믿음을 바꾸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가치관과 삶 전체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요나처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려 할 때 도무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처럼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멀리 도망치고만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너머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한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유교회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