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입니다.
요나서 1:4-12
요나서 강해 5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요나서 1장 4절로 12절의 말씀을 가지고 “나 때문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혹시 지난주 요나서 강해 4번째 설교 제목을 기억하십니까? 지난 주 저는 “누구 때문입니까?”라는 제목으로 설교 했습니다. “나 때문입니다”라는 오늘 설교는 지난 주 설교 “누구 때문입니까?”라는 설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십니다. 이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단 한 번도 변함 없으셨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지만 일부 목사나 교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에 초점을 둡니다. 이런 식의 성경 읽기는 성경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나서는 하나님의 뜻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물론 요나서는 니느웨의 악독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니느웨의 악독함이 너무나 심각하여 저들의 악함이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느웨의 악함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저들의 악함을 경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하지만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은 선지자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어 저들의 악함을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어 저들의 악함을 경고하시는 이유가 니느웨를 심판하여 멸망시키기 위함이었습니까? 아니오. 하나님은 니느웨의 악함을 경고하심으로 저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야 말로 말세라고 주장했습니다. 자기가 살던 시대가 말세라는 주장은 지난 이천 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단골 레퍼토리(Repertory)입니다. 자기가 살던 시대에 일어났던 각종 전쟁과 기근 재앙을 두고는 이것이 곧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말세의 징조라며 이제 곧 말세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나 사이비 교주들 심지어는 일부 목사들조차 말세의 징조와 심판을 강조하며 교인들을 두려움과 공포에 빠지게 만듭니다.
물론 말세의 징조와 현상에 대해서는 성경이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말세의 징조와 심판에 대한 경고는 구원이 목적이지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말세의 징조와 현상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을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은 항상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의 경고이며 심판입니다. 니느웨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니느웨를 심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니느웨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니느웨를 구원하시기 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지금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입니다. 하지만 요나의 관심은 니느웨의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요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 역시 구원이 아니라 심판일 때가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에게 데려 왔습니다. 율법에 명한대로 심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셨습니다. 죄 없는 자는 돌로 이 여인을 치라 말씀하시고는 땅에다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러자 돌을 든 이들이 손에 든 돌을 버리고는 모두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여인에게 죄가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다.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이고, 심판이 아니라 구원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구원하시기 위해 선지자 요나를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원하는데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에 필요한 것은 구원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요나는 니느웨에 필요한 것은 심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요나는 결국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탑니다. 그런데 다시스로 가는 배가 얼마가지 못해 바다 한 가운데서 엄청난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풍랑이 일자 이방인 뱃사람들이 자기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간청합니다. 심지어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물건까지 바다에 던지면 침몰하려는 배를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 뱃사람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풍랑이 잠잠해 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집니다. 왜냐하면 뱃사람들이 겪는 풍랑은 이유가 있는 풍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겪는 풍랑은 하나님께서 도망하는 요나를 붙잡기 위해 일으키신 풍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자신의 책임을 깨닫기 전에는 절대로 잠잠해 질 수 없는 풍랑입니다. 하지만 정작 풍랑의 책임이 있었던 요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배 가장 깊은 곳에 내려가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요나는 배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갔고 깊은 잠에 빠져서는 자신이 져야 할 모든 책임을 피해버린 것입니다.
욘1: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배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에 혼자 배 가장 깊은 곳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요나를 발견한 선장이 요나를 깨우며 외칩니다. 일어나서 네가 믿는 하나님께 구하라며 잠자는 요나를 책망하며 깨웁니다. 선장이 요나에게 책망하며 했던 일어나서 구하라는 히브리어(Gum lek)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주셨던 일어나 외치라 라는 히브리어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욘1: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욘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를 보내어 니느웨에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장을 통해 요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듣게 하십니다. 이방인 선장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요나를 꾸짖은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난 사건은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풍랑을 만난 이방인 뱃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습니다. 요나가 깊은 곳에서 깊은 잠을 자는 동안 저들은 저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였습니다. 이방인으로서 그들의 의무를 다하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풍랑은 잠잠해지지 않고 배는 여전히 침몰하기 일보직전의 상황이 계속됩니다.
도대체 왜 뱃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뱃사람들이 침몰하는 배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배 가장 깊은 곳에서 깊은 잠만 자고 있던 요나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상이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를 모두 세상 탓으로 돌립니다. 세상이 악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서를 통해 세상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세상이라는 같은 배를 타고 가면서도 세상을 향해 잠만 자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때문임을 경고하십니다.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이방인 뱃사람들이 행한 제비뽑기입니다. 오랫동안 배를 타고 항해하던 뱃사람들은 자신들이 겪는 풍랑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이 겪는 풍랑이 신의 노여움으로 인한 것이라 여긴 뱃사람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뱃사람의 제비가 요나에게 뽑혔습니다. 비록 이방인 뱃사람들이 행한 제비뽑기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뱃사람들이 행한 제비뽑기를 통해 이 모든 풍랑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욘1: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내가 잘못이 없어도 내 잘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예수님의 죄 때문에 지신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모든 죄가 마치 예수님의 잘못인양 십자가를 지신 것 이것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앙입니다.
예수 믿어 나 하나 잘 되길 바라는 것, 예수 믿어 내 가족만 잘 되길 바라는 것, 예수 믿어 내 교회만 잘 되길 바라는 것, 더 나아가 예수 믿어 내 나라 내 민족만 잘되길 바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이웃의 고통을 돌아볼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나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고난당하는 자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쓰려야 비로소 신앙인이 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사람에 대한 무관심은 하나님에 대한 죄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 몰아닥친 풍랑이 어떻게 잠잠해 졌습니까? 이제까지 깊은 곳에서 깊은 잠을 자면 모든 책임을 회피하던 요나가 이 모든 문제가 자신에게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선장과 뱃사람,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깨달은 요나가 이 모든 것이 자기 때문임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이토록 심각한 상황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큰 폭풍을 만난 이유가 자기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요나의 고백이 침몰하는 배를 구하게 됩니다.
욘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잘된 것은 모두 나 때문이고, 잘못된 것은 모두 너 때문이라며 공은 자기에게 돌리고 잘못이나 책임은 남에게 떠넘기려는 마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지극히 본능적인 마음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범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자기가 잘못했다고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 때문이라고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떠넘깁니다. 하와 역시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이 만드신 뱀의 꼬임이라며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과 뱀에게 떠넘깁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잘못이든 상대방의 잘못이든 무조건 남에게 떠넘기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실수와 허물을 감추기보다는 들추어내고 지적함으로 자신은 의로워지고 깨끗해지는 줄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절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자꾸만 커집니다. 반면에 내가 책임을 지기 시작하면 문제는 점점 작아지고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1990년도에 카톨릭 교회에서 “내 탓이오”라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먼저 책임지겠다는 캠페인이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나누어 주며 자동차에 부착하고 다니게 했습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의 일들이 남의 탓이 아니고 내 탓이라고 생각하자는 취지였습니다. 당시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붙인 자동차가 40만 대가 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 탓이오”라는 캠페인은 교회가 기대한 것처럼 그렇게 큰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비난만 받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받은 기독교인들이 “내 탓이오”라는 스티커를 어디다 붙였느냐면 자기 자동차 뒤 유리창에 붙였습니다. 자동차 뒤 유리창에 붙인 “내 탓이오” 스티커는 누가 볼 수 있습니까? 내가 아니라 뒤에 있는 차에 탄 사람이 보게 됩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탓이오”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며 실제로는 이 모든 게 니 탓이라는 책임전가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 폭풍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 교회에서 일어나는 폭풍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풍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폭풍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는 한 번도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여긴 적이 없습니다. 그저 남 탓, 이웃 탓, 세상 탓만 합니다. 남 탓하는 것으로 당장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남 탓으로는 결코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내 책임을 인정할 때만 비로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 불어 닥친 큰 풍랑은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풍랑입니다. 풍랑의 모든 책임은 분명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이방인 선장의 책망과 뱃사람들의 제비뽑기를 통해 요나는 이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깨달은 요나는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풍랑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비로소 풍랑이 잠잠해 질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풍랑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했지만 정작 뱃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풍랑을 피하기 위해 당장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았습니다. 뱃사람들은 무고하게 피해를 보면서도 부당하다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초래하지 않은 위험한 상황에 처하고도 모두의 유익을 위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았고, 풍랑을 일으킨 신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요나에게 문제가 있어 풍랑이 일어난 것임을 알았지만 그를 표적으로 삼아 바다에 던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뱃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풍랑은 점점 더 커져갔습니다. 뱃사람들은 끝까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그 위기를 넘어보려 노력했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요나가 뱃사람들 앞에 나가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며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결국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지 비로소 풍랑이 잠잠해 졌습니다. 언제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인정하며 받아들일 때,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생길 뿐만 아니라 문제가 해결됩니다.
요나가 책임을 지고 죽기를 각오했을 때 풍랑이 멈춘 것처럼, 교회가 세상을 책임지려고 할 때 세상의 풍랑을 잠잠케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이웃을 책임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이웃을 구원하십니다. 책임을 지는 것은 결코 망하는 것이나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가 책임을 지고 바다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큰 물고기를 예비해 놓으시고 바다에 던져진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풍랑을 책임지고 성난 바다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풍랑이 마치 예수님 때문인 것처럼 여기시고는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날 때마다 남의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너 때문이다’라고 할 때는 문제가 커지지만, ‘나 때문이다’라고 할 때에는 문제가 작아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너 때문이야 했을 때 죽이는 자가 되지만 나 때문이다 했을 때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 때문입니다.” 고백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며, 또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도 공급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