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도대체 누구냐?
요나서 1:7-10
요나서 강해 6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요나서 1장 7절로 10절의 말씀을 가지고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대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다시스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던 니느웨와는 정반대 지역이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탄 요나는 매우 특별한 예외적인 승객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요나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를 자신의 배에 태웠던 선장에게는 자신이 태운 요나가 어떤 사람인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를 다시스로 가는 배에 태웠던 선장이 요나에게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일까요?
선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 삯을 지불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했습니다. 나머지는 알 필요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선장은 요나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서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아무 것도 몰랐지만 그가 지불한 배 삯을 받고는 자신의 배에 태웁니다. 성경은 요나가 배 삯을 지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음을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 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선장과 뱃사람들 그리고 요나가 한 배를 탔다는 것은 저들이 운명을 같이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하지만 운명을 같이한 선장과 요나는 서로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선장은 요나가 어떤 사람인지, 요나는 선장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지불한 배 삯만으로 선장과 뱃사람과 요나가 한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별 것 아닌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교훈과 도전을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우리가 다니는 교회 역시 다시스로 가는 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운명을 같이 한 배에 탄 사람들입니다. 운명을 같이 했다고는 하지만 서로가 누구인지 몰라도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익이 되기만 하면 상대가 누구인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느 대학을 졸업했어? 어느 직장에 다녀? 연봉이 얼마야? 재산은 얼마나 되? 남자라면 키는 얼마나 되고 얼굴은 잘 생겼어? 여자라면 몸매는 어때? 얼굴을 예뻐? 이런 것들만 가지고 결혼이라는 운명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익과 계산만 가지고 결혼을 하고 나면 그 결혼생활은 얼마 가지 않아 반드시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풍랑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네가 누구냐'를 묻게 됩니다. 살아보니까 결국 '네가 누구냐'가 제일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연봉, 직장, 학력 재산 외모만 가지고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멋진 결혼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혼식이 끝나고 허니문 여행이 끝난 후에 함께 살아야 하는 결혼생활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만으로는 결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살다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문제에 반드시 부딪치게 됩니다.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력, 스펙, 재산, 연봉이 아니라 인격과 성품, 삶을 사는 태도와 자세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진 믿음과 영성입니다.
선장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치는 요나를 배에 태우지 말아야 했습니다. 요나를 태우고 다시스로 가던 배는 얼마가지 못해 큰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선장과 뱃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폭풍이 단순한 자연재난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자신들이 겪는 폭풍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폭풍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이르자 선장은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는 요나를 깨웁니다. 그리고 이 모든 풍랑의 원인을 찾는 제비뽑기를 합니다. 뱃사람들이 행한 제비뽑기에 요나가 뽑힙니다. 자신들이 겪는 풍랑의 원인을 찾는 제비뽑기에 요나가 뽑히자 비로소 선장과 뱃사람들은 요나가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해졌습니다.
뱃사람들은 요나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위해 그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네 생업이 무엇이냐? 네가 어디서 왔느냐? 네가 속한 나라가 어디냐? 너는 어느 민족 사람이냐? 뱃사람들의 질문은 요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정체성을 알고자 하는 질문들이었습니다. 그의 정체성을 알아야 자신들이 겪는 무지막지한 폭풍의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욘1: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신분이나 정체성을 숨기고 익명으로 무명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로 언제 이런 생각이 듭니까? 내가 누구인지 신분을 밝히거나 드러나면 사람들이 내 신분에 걸 맞는 행동을 기대할 때입니다. 그러면 원치 않아도 그들의 기대에 맞게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에 걸 맞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을 때에는 익명으로 무명으로 사람들 사이에 숨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분이나 영적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소속이나 신분을 분명하게 드러내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제복에는 그 사람의 소속과 그 사람의 이름을 알리는 명찰을 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어떤 신앙 정체성을 가지고 사느냐 역시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물론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신앙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는 것이 여전히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대접을 받거나 이익을 얻기보다는 손해나 불이익을 받아야 할 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크리스천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내가 자유교회 교인이다. 이것이 드러내는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첫 목회를 하였던 시골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첫 목회하던 시골교회에 별명이 바께스 집사님이신 분이 계셨습니다. 왜 바께스 집사님이라고 했냐면 교회에 오실 때마다 항상 바께스를 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집사님께서 매 주일마다 바께스에다 무엇을 가지고 오셨을까요? 저는 처음 이 분이 바께스를 들고 교회를 오는 것을 보고는 성미를 담아서 가지고 오시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께스를 가지고 교회에 오신 집사님께서 꺼내는 것은 성미가 아니라 성경책을 꺼내시는 것입니다.
시골이라 변변한 성경가방 하나 없으셔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얼른 성경 가방을 쓸 수 있는 가방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웬걸 다음에 교회 오실 때에도 바께스를 들고 오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바께스에는 성경책을 넣으셨고요. 그분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어느 날 제가 작심을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의 대답인 즉은 교회 다니는 것이 마을 사람들 보기에 민망해서 밭에 일하러 가는 척하며 바께스에 성경책을 넣어 오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고는 하지만 세상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나은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자꾸만 숨기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다고 해도 크리스천이라는 자신이 신앙 정체성을 밝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분명히 밝힐 수 있어야만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거나 잘못된 길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탈 때 선장은 요나가 어떤 사람인지 묻지도 않고 관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선장의 관심은 오직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비싼 배 삯을 지불할 수 있느냐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 역시 다시스로 가면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밝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나는 왜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습니까? 자신이 가려고 하는 다시스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우리의 신앙 정체성을 숨기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길, 내가 마땅히 가야하는 사명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숨기고 감추려 합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가는 교인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사람들과의 모임에서도 주변사람들에게도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합니다.
크리스천 역시 세상 사람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면서 크리스천이라는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해야 하고, 더 성실해야 하고, 더 착해야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더 정직하고 더 착하기에 크리스천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자신들은 온갖 편법과 부정한 방법을 다 쓰면서도 자신들과는 다른 높은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그러다보니 교인들 중에는 이런 분도 있습니다. 자기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 욕먹게 할 바엔 차라리 크리스천이라는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감추고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직장에서 자신이 예수 믿는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며 신앙 생활합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이 주님을 위하는 대단한 일처럼 여깁니다.
자신의 부족한 말과 행위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욕먹게 하지 않으려는 의도는 참으로 갸륵합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요나처럼 자신의 정체성이 밝히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반드시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감추었던 것이 오히려 더 심각한 문제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구약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열한 번째 계명이 나옵니다. 탈무드에 기록된 열한 번째 계명은 “사람을 속이려면 절대로 들키지 말라.”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명입니다. 누군가를 속이려면 감쪽같이 속여 속는 사람이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탈무드에 나오는 십일 계명에 숨겨진 진짜 의미는 들키지 않고 끝까지 속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속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치면서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감추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무도 모르게 더욱 깊이 감추고 숨기기 위해 배에 올라가자 마다 배 가장 깊은 곳에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숨기고 감추려고 했던 요나의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에 풍랑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선장으로 하여금 깊은 잠에 빠진 요나를 깨우십니다. 뱃사람들의 제비뽑기를 통해 이 모든 풍랑의 책임이 요나에게 있음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뱃사람들의 질문을 통해 요나의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 없다고 여긴 요나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욘1:9-10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요나의 답변에는 매우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물었던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생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뱃사람들은 요나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혹시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신의 노여움을 사서 폭풍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히브리 사람이라며 자신의 민족을 가장 먼저 소개했습니다. 요나가 어떤 민족이냐는 질문은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물었던 마지막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자신을 소개하며 가장 먼저 히브리 사람임을 앞세웠고 그 다음에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소개한 것입니다. 그리고 폭풍이 일어나게 된 것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려고 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임을 고백합니다.
요나가 자신은 히브리 민족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밝혔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부분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실이나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자신은 히브리 사람임을 가장 먼저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나는 자신은 히브리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자신의 사명보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의 민족만큼 그의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에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자신이 속한 민족과 나라를 지켜주실 때에만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정체성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민족이 더 근본적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 요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나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신의 민족과 나라에 대한 중요성만큼 절대적이고 근본적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유익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충돌하자 그는 자신의 민족의 유익을 앞세우려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는 민족이나 나라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한다면 우리가 민족이나 나라의 유익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자신의 민족이나 나라 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인류의 유익입니다. 입니다. 인류의 유익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자기 민족과 나라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이 속한 민족의 이익을 하나님 나라보다 인류의 유익보다 더 앞세웁니다.
우리 대부분은 요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말로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을 사랑해 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속한 나라, 내가 속한 민족, 내가 속한 교회, 내 가족만 특별히 사랑해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속한 민족, 내가 속한 나라, 내가 속한 교회를 가장 먼저 앞세우는 얄팍한 신앙 정체성은 요나처럼 매우 편협한 신앙인이 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인종차별주의자가 되고, 물질만능주의자가 되고, 쾌락에 중독되거나 불안에 시달리고, 걸핏하면 과로하며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신앙 정체성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뱃사람들은 요나의 고백을 듣고는 요나를 꾸짖었습니까? 뱃사람들이 요나를 꾸짖은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요나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정작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요나의 고백과 요나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뱃사람들에게 요나의 고백과 어긋나는 요나의 행동은 대단히 어리석고 위험한 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피해 바다로 도망하는 요나의 모습이 뱃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이익을 앞세우려는 우리의 영적 정체성이 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역시 요나의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