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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다에 던져라!
요나서 1:11-16
요나서 강해 7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요나서 1장 11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나를 바다에 던져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방인 선장과 뱃사람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는 당장이라도 배를 침몰시킬 것 같은 폭풍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도 도무지 폭풍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뱃사람들은 자신들이 겪는 엄청난 폭풍에는 이유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선장과 뱃사람들은 자신들이 겪는 폭풍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신의 노여움이라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겪는 폭풍이 신의 노여움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선장과 뱃사람들은 누가 신을 노엽게 했는지를 찾으려 했습니다. 신을 노엽게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선장과 뱃사람들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실행합니다. 뱃사람들이 실시한 제비뽑기에 제비를 뽑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장이라도 배를 침몰시킬 것 같은 폭풍 가운데서도 혼자 태평하게 배 깊은 곳에서 깊은 잠을 잤던 요나가 뽑힌 것입니다.
제비에 뽑힌 요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요나는 생각하기를 우상숭배나 하는 이방인 뱃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바다에 제물로 던질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자신을 바다에 제물로 바쳐서는 풍랑을 잠재우려 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당장이라도 배가 침몰할 것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뱃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져 성난 신에게 제물로 바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시가 급박한 상황에서도 이방인 뱃사람들은 재앙의 모든 책임을 제비에 뽑힌 요나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재앙이 정말 제비에 뽑힌 요나 때문인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지 말해보라 합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며, 당신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인지를 묻습니다. 한 마디로 제비에 뽑힌 요나에게 자신을 변명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욘1: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뱃사람들의 질문에 요나는 솔직하게 이 모든 폭풍이 하나님을 얼굴을 피해 도망치려고 했던 자신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뱃사람들은 요나의 고백을 듣고도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이 폭풍을 잠재울 수 있느냐며 요나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자신 때문에 폭풍이 일어난 것이니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폭풍이 잔잔해 질 것이라 말합니다.
욘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도대체 요나는 어떤 심정으로 뱃사람들에게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할 것일까요? 마침내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였던 자신의 죄를 깨닫기라도 한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불순종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정반대로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는 것까지 막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의 마음이었을까요? 니느웨로 가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겠다며 끝까지 하나님에 대해 반항하려는 마음이었을까요?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회개하는 마음에서 나온 고백은 아닙니다.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대답에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였던 자신의 잘못에 대한 그 어떤 깨달음이나 참회도 없습니다. 요나서의 나머지 이야기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요나는 끝끝내 독선적이며 교만한 선민주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요나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말은 폭풍을 일으키면서까지 자신이 도망가는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께 반항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니느웨로 가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면 요나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지며 하나님께 반항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고 대신에 뱃사람들에게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요나의 숨겨진 솔직한 심정을 발견할 수 있는 실마리는 뱃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에 있습니다. 뱃사람들은 폭풍의 책임을 묻는 제비뽑기에 요나가 뽑혔지만 함부로 요나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지 않았습니다. 한시가 급박한 순간에도 뱃사람들은 요나의 정체를 물으며 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은 이방인에 대해 가졌던 요나의 편견과 오해를 깨뜨리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는 뱃사람들의 질문에 요나는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당신들을 위해 잔잔해 질 것이라 말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 깊은 곳에 숨어서 깊은 잠에 빠졌던 던 요나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책임을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책임을 회피만 하려고 했던 요나가 목숨까지 내 놓으며 폭풍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요나의 태도 변화에 대해 은혜롭게 해석한다며 비로소 요나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무릎 꿇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치는 요나를 폭풍까지 일으키시며 그의 가는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요나가 비로소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서 어디에도 이러한 해석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성경구절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나서는 요나에 대해 소개하기를 이방인에게 은혜와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나가 자신 때문에 일어난 폭풍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거나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나가 폭풍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은 뱃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생겨난 변화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도전을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사단이 왜 생기게 된 것입니까? 요나가 하나님의 주시는 사명을 거부하였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지금까지 요나가 믿었던 하나님은 오직 자기 민족만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자기 민족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은혜와 자비 용서를 베풀기 원하셨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지만 뱃사람들의 모습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이방인들의 대한 편견과 오해가 깨지지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자신은 배가 침몰하려는 순간에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뱃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은 아니지만 각자가 알고 있고 자신들이 섬겨왔던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급박한 순간에도 요나를 존중했으며 함부로 정죄하지 않고 그의 정체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제비에 뽑힌 요나를 죽이는 대신 그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요나에게 어떤 무례함도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뱃사람들의 행동이 요나의 무관심을 쫓아내고 그의 양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너무나 단순하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세상을 정죄하려고만 합니다.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조건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여기며, 믿는 사람들은 정결하고 의롭다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대해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제가 충격적으로 읽은 책이 있습니다. 스웨덴 출신의 의사였으며 통계학자였던 한스 로슬링이 쓴 Fact Fulness 라는 책입니다. 이 책이 세계적으로 유명해 진 것은 마이크로 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가 2018년 미국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저에게 준 가장 큰 충격은 세상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지고 있으며 지금도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자신들이 발을 딛고 사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여깁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생각하기를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있으며 점점 더 타락하며, 점점 더 부패한다고만 여깁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지키고 보전해야 할 세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은 하루라도 빨리 멸망되어야 할 부정한 곳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하면서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로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은 교회로 모일 때마다 이 망할 놈의 세상 빨리 망해 버리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보는 근본적인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더 이상 교회의 미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이방인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폭풍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뱃사람들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과하다 해도, 타인에 대한 경멸보다는 연민이 훨씬 나은 일입니다. 종종 우리가 영적으로 정신을 차리는 첫걸음은 우리가 마침내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처음으로 자기가 아닌 남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아닌 남을 생각하기 시작하자 요나는 비로소 자신에게 이 모든 폭풍의 책임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깨닫게 된 요나가 뱃사람들에게 자기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성난 바다가 비로소 잔잔해 질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무슨 일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반드시 책임을 지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책임을 지거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랑은 한 마디로 대속적 희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속적 희생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사랑하기에 그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을 대속적 희생이라고 합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예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녀를 낳고 자녀가 성인으로 자라기까지는 부모의 수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수많은 희생이 없이는 어떤 자녀도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자녀가 건강하게 자라 성인이 되기까지는 부모의 일방적인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자녀를 키우기 위해 부모는 여러 해 동안 자기희생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단지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만 해당하는 원리가 아닙니다. 무슨 일에 책임을 지거나 이웃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영적원리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에너지든, 우리가 잃어버리는 만큼 상대방이 얻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커지려면 우리가 작아지는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싼 대가를 감수하고 약속이나 맹세를 지킬 때마다, 보복하지 않고 상대를 용서할 때마다 우리는 대속적 희생을 하는 것이며 이것이 이웃을 책임지는 것이고 이웃을 책임지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속적 희생을 하는 것이 항상 손해 보는 것이며, 항상 잃는 것이며 항상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속적 희생이 당장은 자신이 손해를 봐야 하고, 자신이 낮아져야 하고, 자신이 작아져야 하는 것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속적 희생만이, 대속의 사랑만이 자신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요나의 이야기, 뱃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통해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 사역 동안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은 ‘많은 사람을 대신해 바쳐진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단순히 우리만을 위한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살리고 구원하고 이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책임을 지려는 대속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처럼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사랑의 본질은 대속의 사랑입니다. 대속의 사랑은 곧 누군가를 대신하여 내가 치르는 희생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처럼 누구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먼저 희생하거나 손해를 감당하거나 낮아지거나 작아지면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속의 사랑인 것입니다. 타인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랑은 오직 대속의 사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이 모든 폭풍의 책임이 있으니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면 이 모든 폭풍이 잔잔해 질 것이라는 요나의 말을 들은 뱃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말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까? 아니오. 뱃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나의 제안들을 듣고도 요나를 들어 던지기는커녕 육지를 향해 노를 저었습니다. 하지만 뱃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풍랑은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도무지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욘1: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요나의 말대로 그를 바다에 던지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풍랑을 잠재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어떤 자신들의 노력으로도 풍랑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뱃사람들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요나를 바다에 던집니다. 요나가 던져져 바다의 거대한 풍랑으로 들어가는 순간, 마치 전기불이 꺼지듯 당장이라도 배를 침몰시킬 것만 같았던 풍랑이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욘1: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마자 당장이라도 배를 침몰 시킬 것만 같았던 풍랑이 완전히 잔잔해 졌습니다. 이 사건은 풍랑으로 당장 배가 침몰할 것만 같았던 순간보다 이방인 뱃사람들에게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은 풍랑이 주는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욘1: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뱃사람들은 즉시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며 서원을 합니다. 처음에 그들은 요나가 말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요나의 수호신이나 이스라엘의 민족신 쯤으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요나의 수호신이나 이스라엘의 민족 신이라 여길 수 없었습니다. 요나가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요나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한 지금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뱃사람들의 회심을 나타내는 메타포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모든 상황이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난 것은 사악한 이방인 이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던 요나는 결국 이방인 뱃사람들에게 대속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눠주게 된 것입니다. 요나의 반 선교활동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 이교도들의 회심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 어떤 대속의 희생일지라도, 그 어떤 대속의 사랑일지라도 모든 대속의 희생과 사랑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됩니다. 대속의 희생, 대속의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