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요나강해8-요나의 위기 형벌인가 징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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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위기, 형벌입니까? 징계입니까?

요나서 1:17

 

 

요나서 강해 8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요나서 117절의 말씀을 가지고 요나의 위기, 형벌입니까? 징계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모든 일에 나 하나쯤이야!’ 생각하며 살아가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모든 일에 나 하나만이라도!’ 생각하며 살아가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교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상반된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 하나쯤이야!’나 하나만이라도!’ 서로 다른 상반된 두 가지 삶의 태도 가운데 어떻게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을까요? 세상에는 나 하나쯤이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어떤 생각과 태도로 살아가는 교인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교인들 역시 나 하나쯤이야!’ 생각하며 살아가는 교인들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떤 태도로 교회를 섬기고 신앙을 지키는 교인들이 더 많을까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지모르지만 우리 교회역시 세상 사람들이나 다른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생각하며 신앙 생활하는 교인들이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교인들 보다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 하나쯤이야!’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 하나쯤이야!’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마저 위험에 빠지게 만드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남들은 다 피하려고 하는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나 하나쯤이야!’라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 하나쯤이야!’ 하며 살더라도 기독교인들만큼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은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은 우리만 사랑하시고, 우리만 축복해 주시고, 우리만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통해 세상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뜻을 제멋대로 왜곡하고 오해합니다. 천하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들만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수호신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요나는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감당해야 하는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은 니느웨로 가서 저들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외면하고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요나로 하여금 나 하나쯤이야!’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피해 도망치게 만든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외면하고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지만 요나를 태운 배는 얼마가지 못해 큰 폭풍을 만나게 되었고 금방이라도 침몰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배가 침몰할 위기에 놓이자 이방인 선장을 비롯하여 뱃사람들은 침몰하려는 배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정작 이 모든 폭풍의 원인이 되었던 요나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나 하나쯤이야!’하는 마음으로 배 가장 깊은 곳에 숨어서는 깊은 잠에 빠졌던 것입니다.


요나가 탄 배에 불어 닥친 큰 폭풍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해 도망치려는 요나를 막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나 하나쯤이야!’하는 마음으로 도망쳤던 요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이 모든 재앙의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이방인 이교도 뱃사람들은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말을 듣고는 그 즉시로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지 않았습니다. 뱃사람들은 자신들도 살고 요나도 살리기 위해 배를 육지로 돌리기 위해 힘써 노를 저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폭풍은 더욱 거세어지기만 했습니다. 뱃사람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배를 침몰시킬 것 같았던 큰 폭풍이 순식간에 잠잠해 졌습니다.


1: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물론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진 것은 뱃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왜냐하면 뱃사람들은 끝까지 요나를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큰 폭풍을 내리시어 뱃사람들의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폭풍을 통해 뱃사람들로 하여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뱃사람들로 하여금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도록 인도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했던 요나가 괘씸하여 요나를 벌주고 심판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 단순히 요나를 벌주고 심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요나의 이야기는 116절에서 모두 끝나고 말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다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나서 1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큰 물고기로 하여금 삼키게 하고는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그곳을 지나가던 큰 물고기가 우연히 삼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물고기가 바다에 던져지는 요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삼키게 한 것입니다.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로 하여금 삼키게 한 것은 요나를 벌주고 심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로 하여금 삼키게 한 것은 요나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자비이며 사랑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4장에 나오는 박 넝쿨 사건도 같은 의미입니다.


요나가 그러했던 것처럼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하나님을 벌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하나님을 잘못한 사람을 벌주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교인들이 가진 신앙의 밑바닥에는 심판과 지옥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매우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물질을 성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주일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교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주일 성수 하지 않으면 혹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지 않을까,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주일성수하고 마지못해 십일조 하는 교인들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꾸중하거나 벌주 것은 꾸중이나 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부모가 주는 벌은 자녀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르게 함이 목적입니다. 자녀로 하여금 제대로 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꾸중이나 벌의 유일한 이유요 목적입니다. 이것을 징계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disciplines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법이 죄를 지은 범죄자에게 내리는 벌은 징계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처벌 또는 형벌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punishment 라고 합니다. 징계와 처벌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습니다.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처벌 또는 형벌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바르게 하기 위해, 사랑하기 때문에 벌을 주는 것은 징계라고 합니다. 이처럼 징계와 형벌은 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동기와 목적은 서로 다른 것임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징계와 형벌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잠언 3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선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징계는 죄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벌이 아닙니다. 징계는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깨닫게 하기 위함이요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반면에 잠언 175절에 나오는 형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대한 대가로서 처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형벌이라고 할 때는 이러한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용서와 기회가 없는 하나님의 단호함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잠언 3: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잠언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


징계와 형벌에 대한 구구절절 설명하는 이유는 이것을 제대로 구별하는 일이 우리 인생의 승패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꾸중을 징계로 받아들이느냐, 처벌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자녀들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부모의 꾸중을 징계로 받아들인 자녀는 부모의 꾸중과 훈계를 통해 이전보다 더욱 나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꾸중을 처벌로 받아들인 자녀는 부모의 꾸중이나 훈계를 받을 때 마다 그의 인생은 더욱 나빠질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 인생에 닥친 감당하기 힘든 위기나 고통 또는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은 180도로 달라집니다. 풍랑이 이는 거친 바다에 던져진 요나의 위기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야 했던 밤낮 삼일간의 고통은 징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대가로 받아야 하는 형벌입니까? 요나가 겪은 위기와 고난은 형벌이 아니라 징계였습니다.


이것이 만약 불순종한 요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형벌이었다면 요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고 말아야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더니 결국 벌을 받아 바다에 던져져 죽었더라. 벌 받았더라. 이렇게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를 형벌로 다스리지 않고 징계로 다스렸습니다.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고 그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밤낮 삼일을 지옥과 같은 곳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징계는 보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요나를 징계하시지만 그가 완전히 엎드러지지 않고, 완전히 절망하지 않고, 그의 생명이 위험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물론 징계의 순간, 고통의 순간에는 다시는 회복되지 않을 것 같고, 다시는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요나가 배에서 던져질 때 그리고 큰 물고기가 자기를 삼켰을 때에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인생의 시련이나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평탄하고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고난이나 시련 또는 재난으로부터 면제되고 형통한 인생만 살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며 신앙생활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해도 결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며 신앙생활을 할까요?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을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처벌로 형벌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꾸짖고 때로는 벌을 주는 것은 꾸짖고 벌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더 나은 길을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이런 부모의 심정을 자녀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장 받은 꾸짖음이 서러워 부모의 품에서 도망합니다. 가출을 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다 겪게 되는 고난이나 실패 또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징계로 이해하지 못하고 형벌로 처벌로 심판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도망치려고만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니고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으면 뭐해요! 맨 날 그 모양 그 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처벌하시지 않으시고 징계하셨습니다. 요나를 징계로 다루시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같은 원리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가 겪게 되는 모든 위기와 역경은 형벌이 아니라 징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분명히 구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징계의 목적은 벌 그 자체가 아닙니다. 징계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회복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변화입니다. 징계의 목적은 훈련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 인생에서 반복되는 징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도대체 왜 성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징계가 떠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징계를 받으면서도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징계를 받아도 도무지 변화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징계를 통해 자신을 훈련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해하고 섬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피했으면 하는 인생의 위기나 역경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을 때로는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통은 사명입니다. 우리의 당한 고난을 징계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을 사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를 위해 사역할 때 누가 가장 이들을 잘 도울 수 있을까요? 과거에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문제를 극복하고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보다 그들을 더 잘 인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혼한 사람을 위로함에 있어 이혼의 아픔이 있는 사람보다 그 사람을 더 잘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국에는 쓰레기통이 없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버릴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형벌이 아니라 징계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어떠한 고난이나 아픔도 낭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우리가 겪었던 가장 큰 아픔, 우리가 견뎌야 했던 가장 큰 고통, 우리가 경험했던 가장 큰 실패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나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요나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고난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겪은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은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은 고통과 실패를 사용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형통함으로 평탄함으로 풍요로움으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는 살면서 내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위기 그리고 역경을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고통과 고난 시련은 하나님의 징계이자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의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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