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기도, 회개입니까? 과시입니까?
요나서 2:1-10
요나서 강해 9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요나서 2장의 말씀을 가지고 “요나의 기도, 회개입니까? 과시입니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원래 제목은 “요나의 기도, 회개입니까? 확증편향입니까?”였는데 확증편향이라는 단어가 너무 생소할 것 같아 과시라는 단어로 교체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설교의 주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에는 처음에 정한 제목이 더욱 분명할 것 같아 미리 소개하고 말씀을 나눕니다.
요나서 2장의 말씀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교인들이 대단히 은혜로운 기도로 여기시는 기도입니다. 실제로 요나서 2장에 기록된 요나의 기도는 한 구절 한 구절이 감동스럽고 은혜롭기 그지없습니다. 어느 구절 하나 감동스럽지 않고 은혜롭지 않은 구절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요나서 2장에 기록된 요나의 기도를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정말 은혜롭고 감동스럽게 읽으셨습니까?
대부분의 경우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를 어떻게 해석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쳤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불순종을 깨닫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회개를 받아주시고 그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불순종을 회개하는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를 토해내게 하십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마침내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니느웨로 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나의 기도를 자신의 불순종에 대한 참회와 회개의 기도로 해석합니다.
물론 요나서의 앞뒤를 딱 잘라내고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만 놓고 본다면 이렇게 읽고 해석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요나의 기도는 대부분이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기도 내용 자체만으로는 대단히 감동스럽고 은혜로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요나서 2장에 기록된 요나의 기도를 요나서의 앞뒤상황을 무시한 채 기도문 자체로만 사용한다면 충분히 은혜로운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요나서 2장에 기록된 요나의 기도는 시편처럼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전후 상황도 없이 그저 기도만 달랑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려고 했던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된 특별한 상황에서 드리게 된 기도가 요나서 2장에 기록된 요나의 기도입니다.
만약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기도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믿음과 자신의 불순종에 대한 참회와 회개의 기도였다면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했을까요?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됐어야 합니다. 하지만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이전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이 됐습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물론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요나서 1장에서처럼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고 또 다시 다시스나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는 요나의 태도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요 자세였습니까? 아니오.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불성실한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요나서 3장 4절의 말씀입니다. 요나서 3장 3절에 의하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며칠 동안 니느웨를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까? 단 하루 동안만 니느웨 성읍을 다니며 하나님의 경고를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물론 니느웨 사람들이 하루 만에 깨달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대충하고 말았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욘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욘3: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요나서 4장은 물고기 뱃속에 밤낮 삼일 동안을 들어갔다 나왔지만 이전보다 더 고집스러운 요나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서 4장 1장은 요나에 대해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도무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 요나에게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요나는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하나님께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기도합니다. 이것이 회개한 사람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욘4:1-2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묻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께서 무려 두 번에 걸쳐서 똑같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요나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틀렸고 자신이 옳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가르쳐 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회개한 사람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욘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이처럼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를 앞뒤 전체적인 맥락과 연결하여 읽게 되면, 요나의 기도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참회와 회개를 드리는 기도라고 해석할 여지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주장일 수 있지만 요나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라기보다는 확증편향의 기도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확증편향을 가장 쉬운 말로 하면 똥고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확증편향은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심리적 오류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도 좀처럼 자신의 이전 생각을 바꾸지 않으려는 이유가 바로 확증편향이라는 오류 때문입니다. 특별히 확증편향의 오류는 교인일수록 더욱 많이 나타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또는 목사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으면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나 목사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 믿어왔던 자신의 신앙이 다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우리의 신앙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은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돕지 결코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를 조금도 바꾸지 않으려는 태도가 믿음을 무너뜨리게 만들 것입니다.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어야 했던 요나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여야 했습니까?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 대한 반성과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가진 잘못된 신념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려고 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물고기 뱃속에 드린 요나의 기도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참회와 회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나는 “내가 받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라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시작부터 문제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고난이라고 여겼습니다. 과연 요나가 겪게 된 이 모든 어려움을 고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오.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고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는데 세상의 악함 때문에 당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고난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욘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는 자신을 스올의 뱃속에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을 뜻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우리말로는 상황에 따라 무덤, 음부, 또는 지옥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요나가 놓인 처지는 분명 스올의 뱃속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큰 물고기에 삼켜진 요나는 이미 죽었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여전히 죽지 않은 자신을 깨달았습니다. 요나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리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오해이며 착각입니다.
또한 요나는 자신은 비록 하나님에게서 쫓겨났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합니다. 이 또한 말도 자기 확신에 빠진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쫓아 내셨습니까?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했습니까?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쫓아낸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확증편향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욘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7절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요나가 여호와를 생각하고 간절히 기도해서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 죽기까지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나를 끔찍이 생각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요나로 하여금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일을 지내게 하시며 그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욘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더 나아가 요나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이방인, 이교도들은 자신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스스로 버렸다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하나님께 감사하며 제사를 드리고 서원을 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 자신에게 임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물고기 뱃속에서도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자신에 대한 과시일 것입니다.
욘2:8-9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하지만 8절과 9절의 기도는 요나의 확증편향과 자기과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요나의 기도처럼 선장과 뱃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던 이교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상을 숭배하던 선장과 뱃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교도 선장과 뱃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하였습니다. 정작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친 사람은 요나였습니다.
욘1: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요나가 기도했던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니느웨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서 3장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요나를 통해 건성으로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온 나라가 하나가 되어 철저히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심지어 니느웨에 사는 짐승들까지 회개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는 요나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함부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삼킨 물고기에게 말씀하시어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요나를 살리시는 요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말씀은 상한 것을 잘못 먹은 물고기로 하여금 상한 것을 토해 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새번역 성경은 이 말씀을 “물고기가 요나를 뭍에다가 뱉어 냈다.”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원어 성경을 보아도 영어성경을 보아도 뱉어 냈다는 표현하지 않고 토했다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욘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로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과 세리가 같은 날, 같은 시간 성전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자기는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 불의, 간음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리와 같지도 않다고 감사합니다. 심지어 율법이 정한 대로 금식하고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렸다고 기도하였습니다. 누가 봐도 흠 잡을 것이 없는 바리새인의 모습이며 기도였습니다.
눅18:11-12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반면에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세리는 바리새인과 멀리 따로 떨어져서 성전 구석에서 기도합니다. 세리는 왜 이렇게 기도했습니까? 세리는 스스로 자기가 죄인임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유대인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데,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오직 자기 가슴만 치며 죄인 중에 죄인인 자기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의롭게 여기신 기도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의 기도 대신 죄인 중에 으뜸이라고 하는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도대체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까?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신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도구였으며 심지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세리를 정죄하고 비난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매우 악하게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경고로 여겨야 합니다.
새벽기도 잘하는 사람에게 새벽기도 안하는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주일성수 잘하는 사람은 주일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다 지옥에 갈 사람입니다. 매주 규칙적으로 금식하는 사람에게 금식하지 않는 사람은 다 식탐에 빠진 사람입니다. 십일조 잘하는 사람은 십일조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새벽기도를 하던, 성경을 매일같이 읽던, 십일조를 하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의 영적성숙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잘 한다고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들려지는 기도를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영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흔히 정성이나 열심을 말하는데 이런 것은 대부분 미신이나 우상 신들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기도의 영성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를 의롭다 하신 것은 자신을 변명하지도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던 세리의 정직함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를 대부분의 경우처럼 요나의 참회와 회개의 기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저처럼 자기과시와 확증편향의 잘못된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이 두 가지를 비교하며 설교를 했지만 요나의 기도를 어떻게 해석을 하던 이것이 요나서 2장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기도를 자기의 생각과 신념에 콘크리트를 붓는 어리석은 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말해 기도를 확증편향의 도구, 자기 확신의 도구, 자기 과시의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확증편향의 도구로, 자기 확신의 도구로 사용하게 되면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려 들것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만날 때 마다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생각이 변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며, 마음이 바뀌어야 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에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