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가 변하지 않는 이유
요나서 3:3-4
요나서 강해 11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요나서 3장 3절과 4절의 말씀을 가지고 “요나가(내가) 변하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선지자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저들의 악함이 하나님에게까지 들려졌음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니느웨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스로 도망치는 요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요나가 탄 배에 풍랑이 일게 하셨고 뱃사람들로 하여금 요나를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미리 예비하신 큰 물고기로 하여금 삼키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일을 지내게 하시고는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죽다 살아난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임하셨습니다. 죽다 살아난 요나에게 두 번째로 임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주셨던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니느웨로 가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려고 했던 요나에게 또 다시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다.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고 하십니다.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욘3: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두 번째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요나는 이미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곳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음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스올과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조차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명령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요나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니느웨로 갔습니다. 요나가 간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어야 할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었습니다.
욘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서 1장에서는 니느웨에 대해 그저 큰 성읍이라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서 3장에서 니느웨에 대해 소개하면서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라고 했습니다. 요나서 3장에서 니느웨를 소개하며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니느웨가 크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사흘이라는 날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흘이라는 날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던 날짜와 동일한 날짜입니다.
욘1:17 요나는 사흘 밤낮을 그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을 지내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는 물고기 뱃속과 같은 매우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사흘 동안 다니게 하시려고 미리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지내게 하시며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사흘 동안 걸아야 하는 니느웨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사흘 동안 걸으면 외쳐야 하는 니느웨 성읍을 단지 하룻길만 걸으며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습니다.
욘3:4 요나는 그 성읍으로 가서 하룻길을 걸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사흘 동안 걸어야 하는 니느웨 성읍을 요나가 하루 동안만 다니며 외쳤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나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경고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흘 길을 하루 동안에 마쳤다는 것은 요나가 마지못해 건성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니느웨까지 간 요나는 도대체 왜 건성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을까요? 비록 요나가 니느웨로 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간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곳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마지못해 어쩔 수 없어 억지로 니느웨로 간 것입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니느웨로 간 요나가 사흘 길을 하루 동안만 다니며 대충 건성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요나는 요나서 1장에서처럼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지 않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하지만 요나가 니느웨로 간 것은 니느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니느웨로 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는 니느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풍랑이 이는 거센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미리 예비하신 큰 물고기로 하여금 삼키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스올과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무려 사흘 동안을 지내면서도 죽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신비한 은혜를 베푸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깨달으라고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자신에게 베풀어준 신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요나서 2장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입니다. 요나는 스올과 같은 곳에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경험한 신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능력 있는 기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요나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지난 날 자신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대해 간증합니다. 너무나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자신이 드린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간증합니다. 자신이 기도했더니 암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자신이 기도했더니 망해가던 사업체가 대박이 났다고 합니다. 자신이 기도했더니 자식이 출세하고 성공했다고 합니다. 얼핏 듣기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믿음과 기도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나타나는 신비한 체험이나 기적 또는 기도의 응답은 그 자체가 결코 신앙의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신앙의 체험을 통해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사는 인생, 내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변화되고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하며 체험하게 되는 모든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과 기도 응답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고집스러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큰 성읍 니느웨라는 표현은 단지 규모가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성읍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중요하게 여기셨지만 요나는 니느웨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불쌍히 여기셨지만 요나는 니느웨를 망해버려야 할 원수로 여겼습니다.
욘3:3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신비하고 놀라운 신앙체험이 사람을 바꾼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위험한 착각입니다. 물론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더 많은 경우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이 이전보다 더 성숙한 사람, 이전보다 더 유연한 사람, 이전보다 더 포용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보다는 바꾸기보다는 이전보다 더 교만해 지거나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도대체 요나는 왜 죽다 살아나는 엄청난 체험을 하면서도 이전의 생각을 바꾸지 못한 것일까요? 도대체 요나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씩이나 들었으면서도 이전의 생각을 바꾸지 않은 것일까요? 이것은 요나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이전보다 더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살면서 “사람 참 안 변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처럼 정말로 사람 참 안 변합니다.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날마다 깨닫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정말 사람은 잘 안 변합니다. 그래서 어쩌다 변한 사람을 보면 어떻게 말합니까? 저 사람 이제 죽을 때가 됐나보다 말합니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여기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을 정도 쯤 되어야만 사람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나는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변화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사람이 좀처럼 변하는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물론 사람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꼽는 가장 중요하는 이유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은 항상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항상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항상 모든 일에 자기가 기준이 됩니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틀린 것이라 여깁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이기적 본능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는 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자신이 아는 하나님이 마치 하나님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 잘못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여깁니다. 심지어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되면 자신과 다른 생각을 요구하는 하나님마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요나입니다
남녀가 처음 사랑하게 되면 서로에게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에게 간섭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상대방을 자신이 바라는 대로 바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꿀 것이 없으면 간섭할 일도 없습니다. 처음 사랑을 할 때는 간섭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즐깁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간섭하는 대로 대부분 맞춰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시간이 지나게 되면 더 이상 상대방의 간섭을 자신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쓸데없는 잔소리로 여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부관계가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입니다. 어느 한 쪽이 상대방에게 일방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없는 지극히 평등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상대방과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상대방에게만 자신에게 맞출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대방에게 맞추려는 것은 대단한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자신은 상대방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만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맞출 것을 요구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정신적 폭력입니다. 일방적인 관계가 지속되게 되면 결국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양보하거나 맞추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서로가 변하지 않는 배우자를 보면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이 항상 옳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기준으로 삼고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내 행동이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준은 항상 자기 자신이 됩니다.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 그 누구도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남편은 아내가 아내는 남편이, 부모는 자식이 자식은 부모가, 목사는 교인들이 교인들은 목사가 도대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상대방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변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이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저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결국 그 사람이 내 생각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한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은 조금도 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만 변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언을 하거나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변한 척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잠깐 동안만 변한 척 하는 것뿐이지 실제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좋은 방향으로 변했으면 좋겠다는 아무리 순수한 의도를 가졌다고 해도 남이 하는 충고를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그것을 잘 포장하거나, 친절하게 전달하지도 못합니다. 내 뜻대로, 내 기대대로 되지 않는 조바심에 뱉어낸 조언이나 충고는 결국 상대방을 탓하는 말로 내뱉어집니다.
“너는 일을 왜 그렇게 해?”
“너는 왜 항상 약속 시간에 늦어?”
“너는 왜 항상 그런 식이야?”
아무리 맞는 말 옳은 말이라도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은 그 누구라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충고’나 ‘조언’은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부작용도 없고 효과도 큽니다. 그럼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부모님일까요? 아무리 나를 사랑하시는 부모님의 충고라고 해도 결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 평생을 같이 산 남편이나 아내일까요? 이건 그야말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형제자매 또는 가장 친한 친구들을 모두 떠올린다고 해도 막상 그들이 나에게 따끔한 충고나 조언을 했을 경우 마냥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대부분은 귀에 거슬리거나 변명하거나 못들을 척 회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항이나 거부가 들지 않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다면 과연 누구입니까? 그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가장 확실한 사실을 똥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똥 냄새를 역겨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똥 냄새를 맡으며 역겨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하는 충고는 가장 부작용이 적습니다. 앞서도 설명을 드렸지만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가장 좋은 충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 해주는 충고나 조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던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심들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드는 모든 원동력은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좋은 충고를 100번 해줘도 나에게 깨달음이 없으면 변화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는 한 마디에도 내가 깨닫는다면 반드시 변화는 일어나게 됩니다.
제 아내가 저에게 몇 년 동안 입이 닳도록 제발 좀 걷고 뛰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모두가 오로지 저를 위하는 말이었지만 들을 때마다 못마땅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런 제가 어느 순간 아내가 떡 하니 사 놓은 트레드밀을 보고는 뛰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제발 그만 뛰라고 합니다. 그래도 하루에 한 시간씩 꼭 뜁니다.
깨달음에 의한 변화만이 사람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고 믿음을 바꿉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의 어원은 ‘깨다’와 ‘알다’가 합쳐진 말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벽을 깰 수 있을 때에 그리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인생과 믿음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설교 후에 질문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질문을 통해 제 설교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마음에 두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의 설교에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가질 때마다 여러분 스스로도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틀릴 수 있는 것처럼 내 생각이나 믿음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작 자신은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아마도 “저 사람이 변하면 내가 좀 더 편할 테데..”라는 이기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상대방이 변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변함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아 변화되면, 다른 사람도 변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남을 변화시키려고 하면 변화는커녕 남의 마음에도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만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군가를 정말 변화시키고 싶다면, 나 자신을 먼저 보고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변하여 바라보는 세상과 인생은 내가 바라는 세상과 인생에 조금은 더 가까워져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나는 왜 그토록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을 하고도 변하지 않았습니까? 요나는 왜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이나 임하였음에도 변하지 않았습니까? 자신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누구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생각도, 지식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신이 믿음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녀도 맨날 똑같습니다. 조금도 성장하지도 성숙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옳고 내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옳고 내 기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옳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내 생각이 옳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옳습니까? 이기적인 내 뜻대로 되어야 합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야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