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요나강해13-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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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서 4:1-4

 

요나서 강해 13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요나서 41절부터 4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요나에게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요나에게 두 번째로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첫 번째로 임한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니느웨로 가서는 저들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요나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갑니다.


비록 요나가 니느웨로 갔다고는 하지만 그가 여전히 니느웨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나가 사흘길이나 되는 니느웨 성읍을 단 하루 동안만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했다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야 했던 사흘간의 시간과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라는 표현은 요나가 니느웨 성읍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해야 하는 시간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그렇다면 사흘 동안 다녀야 할 니느웨 성읍을 단 하루 동안만 다니며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하는 요나의 모습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함입니까? 록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을 수행한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쳤던 요나서 1장에 나오는 요나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메타포입니다.


반면에서 요나가 건성으로 대충대충 전한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백성들의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습니다. 니느웨 왕으로부터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심지어 키우는 짐승들까지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자신들이 행하였던 악한 길에서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며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는 뜻을 돌이키시어 저들에게 내리려고 했던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3: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선지자라고 하는 요나는 두 번씩이나 자신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끝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이자 이교도였던 심지어 악행을 일삼던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통해 건성으로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악행에서 돌이켰습니다.


요나서 3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을 바꾸지 못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요나를 통해 건성으로 전해진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도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니느웨 백성들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요나서 3장은 끝내 변하지 않는 요나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니느웨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요나서를 읽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요나는 왜 끝내 변하지 않은 것일까요? 요나에게는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졌고, 심지어 큰 물고기 뱃속에 삼켜져,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끝내 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하는 선지자 요나는 두 번씩이나 임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끝내 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는 송두리째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행동까지 바꾸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오게 만든 것입니까?


요나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확신했던 요나는 정말 하나님을 잘 안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제멋대로 규정하고 제한한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과 이스라엘에게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제한하고 규정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제한하고 규정해 놓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믿은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오래된 종교생활을 통해 자신의 신앙이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두어 놓은 요나가 변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반면에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선포하는 경고를 들을 때까지도 하나님이 누군지 조차 몰랐던 이방인 이교도들이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몰랐기에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편견이나 제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회개를 하려고 노력했으며 자신들이 행하였던 악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3:8-9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니느웨 백성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무엇이어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요나처럼 자신이 아는 지식이나 자신이 경험한 영적체험을 가지고 하나님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니느웨 사람들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며 자신들이 장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함부로 규정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지나친 자기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나 불신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음을 요나를 통해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아주 적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에 대해 함부로 확신이란 걸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아는 성경지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확신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영역이 더욱 커지는 신비로우시며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1996년에 아내랑 결혼을 했습니다. 올해로 결혼 23주년을 맞았습니다. 결혼 전에 알고 지낸 시간 8년까지 합치면 무려 31년이라는 긴 시간을 알고 지내고 함께 보냈습니다. 30년을 넘게 지냈으니 저나 아내나 서로에 대해 모른 것보다 아는 것이 훨씬 더 많겠지요? 제가 이상한지 모르겠지만 살아갈수록 아내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더 많아요? 여전히 모르는 것이 더 많아요? 많은 부부들이 오랜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부관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배우자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배우자에 대해 아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배우자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렇지 못합니다. 마치 자신이 배우자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면 살아갑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상대방의 생각을 단정해버립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와 갈등이 시작됩니다. 아무리 친밀한 부부사이라고 해도 상대방에 대해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많은 부부사이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많다고 여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단지 부부관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식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친구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아주 적은 것으로 상대방에 대해 다 안다고 여기니까 부부관계에, 부모자식 관계에 그리고 친구 관계에 자꾸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생겨났겠습니까! 한 길 사람 속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가 아는 얄팍한 지식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믿음입니다.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으신 분이심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요나의 생각으로는 악독한 니느웨는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선포한대로 40일이 지나면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멸망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고는 저들에게 내리시기로 하신 재앙을 거두십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내리시려는 재앙을 거두시자 요나가 어떻게 했습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매우 싫어했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 화까지 내었습니다.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요나는 무엇을 싫어하고 성까지 내고 있는 것입니까? 니느웨에 대한 재앙을 거두시는 하나님을 싫어했으며 하나님을 향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지금까지 요나가 믿었던 하나님은 자신에게만, 자기 민족에게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목격한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였던 니느웨 사람들에게조차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고 심지어 뜻을 돌이켜 재앙까지 거두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요나에게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싫어하며 심지어 화까지 내는 요나를 통해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요나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믿은 것은 자신에게 또는 자기 민족에게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르게 말해 요나는 자신에게 또는 자기 민족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될 때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분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예였던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우상들을 섬기는 것이 자신들에게 더 이익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의 구원보다 자신의 이익에만 더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 역시 요나와 같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기독교의 번영과 확장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우리 역시 요나와 같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애족, 애국이 지나쳐 다른 민족이나 나라를 해친다면 이것은 더 이상 애족 애국이 아니라 인종차별주의며 제국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한 대로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매우 싫어하며 성내며 기도합니다. 요나서 42절에 기록된 기도는 요나서 2장에서 물고기 뱃속에서 드렸던 기도와 똑같은 자세와 태도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쳤던 일에 대한 변명과 자신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드러냅니다.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하나님에 대해 요나의 고백은 요나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율법을 통해 배워왔던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요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회개를 요구하며 선포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요나서 42절 후반부는 요엘서 213절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요나는 율법이 가르치고 요엘 선지자가 선포한대로 하나님에 대해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면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요나가 니느웨에 대해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시는 하나님을 보고는 매우 싫어하며 화를 냈습니다. 심지어 요나는 이런 꼴을 보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도대체 요나는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불순종에 대해서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성경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를 정당화 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미워하는 니느웨에 대해서는 아무리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일지라도 절대로 용서해 주셔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니느웨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엄격한 요나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웃에게 특별히 나에게 잘못했던 이웃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에 대해서는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제대로 된 믿음의 사람이라면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에게만 한없이 너그럽고 타인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하다면 이웃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비록 나에게 잘못한 사람일지라도 말입니다.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내가 싫어하는 이웃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에 대해서는 싫어하며 화를 냅니다.


자신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니느웨에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미워하며 차라리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며 화를 내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는 요나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화를 내는 것이 무조건 나쁘거나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불의한 일을 보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화를 내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오히려 불의한 일, 부당한 일을 보거나 겪으면서도 화조차 내지 않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화를 내야할 때는 화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화를 낼 때 내가 내고 있는 화가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나는 왜 하나님께 화를 내었습니까? 하나님 어떤 분인지 몰라서 화를 냈을까요? 아니오. 요나는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나는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는 요나에게 물으신 것은 네가 화내는 것이 옳으냐? 물으셨습니다. 정의로운 분노는 하나님을 배우고 닮아가게 만듭니다. 하지만 독선과 편견에서 나온 분노는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게 만들 것입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에 화를 내며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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