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요나강해14-내가 아끼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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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끼는 것은 무엇인가?

요나서 4:5-11

 

요나서 강해 14번째 시간이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요나서 45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내가 아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요나서 1장과 요나서 4장은 지극히 대조적인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나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려고 했던 요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요나서 4장에서는 요나서 1장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이용해 이루려고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니느웨의 멸망입니다. 요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 니느웨가 멸망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니느웨의 회심을 보시고는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기대한 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는 요나가 화가 났습니다. 자신이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대놓고 불평불만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 화까지 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싫어하며 화까지 내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 그의 믿음에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으며,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싫어하고 화를 내었습니다. 다시 말해 요나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뜻과 소원을 믿은 것입니다. 요나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바라고 소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때만 순종하고 믿을 수 있는 분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요나의 믿음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요나서 42절에 나오는 요나의 기도입니다.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의 기도는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항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40일 후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니느웨가 철저하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요나는 이럴 줄 알았다며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시스로 도망쳤던 자신의 불순종 대한 변명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불필요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일을 시키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친 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불필요한 명령을 내린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성경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모든 행위들을 정당화시키며 심지어 하나님을 비아냥합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고백은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는 제멋대로였습니다.


그는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자신의 모든 불순종과 항변을 정당화시켰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친 것도, 풍랑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침몰할 것만 같았던 배에서 기도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던 것도, 뱃사람들로 하여금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도, 물고기 뱃속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던 것 모두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불순종과 무례한 항변조차도 용서하시고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이 선포한 대로 악독한 니느웨에 재앙을 내려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뜻을 돌이키시어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비아냥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즘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참 대단하십니다.” 뭐 이런 뉘앙스의 매우 무례한 비꼼입니다.


요나의 비아냥거림은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라는 그의 기도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요나는 뜻을 돌이키시어 악독한 니느웨에 내리시기로 하신 재앙을 거두시는 하나님에게 이런 꼴 보고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라고 기도합니다. 그럼 정말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길 원하신 것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자신을 위해 니느웨를 심판하라고 하나님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자신이 쓴 기도라는 책에서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벌였던 씨름은 대체로 두 가지 주제를 맴돌았다. ‘하나님은 어째서 인간이 기대하는 대로 역사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과 나는 어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다. 기도는 이 두 가지 주제가 한데 겹쳐지는 중요한 지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 불행하게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요나서는 사람과 하나님의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바라셨고,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역사해 주시길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과 사람의 충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시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바라고 소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시길 원합니다. 이 두 가지가 충돌하는 대표적인 종교행위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신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더 복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요나는 성경에 나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하나님을 비아냥거립니다. 심지어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며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며 하나님을 협박합니다. 이런 요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요나의 무례한 모습에는 일절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물으셨습니다.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상상하기도 힘든 요나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성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성내는 것에 대해 잘못됐다고 책망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신 것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서만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것에 대해 요나가 성을 내고 있는데 과연 성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불순종한 요나를 용서하실 때에는 성내지 않던 요나가 악독한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성내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니느웨 성읍에서 나가 동쪽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는 니느웨 성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지켜봅니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 동쪽에 앉았다는 것은 매우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표현입니다.


4: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히브리어로 동쪽은 케뎀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동쪽이라는 뜻과 함께 오래됨 또는 과거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요나가 성읍 동쪽에 앉았다는 것은 오래된 과거의 신앙전통에만 안주하려고 하는 요나의 모습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오래된 신앙전통에 근거해서는 니느웨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심지어 요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까지 제멋대로 판단하고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요나의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나 많은 목사들과 교인들에게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자신들이 아는 성경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마저 제멋대로 판단하고 제한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오래된 성경지식이나 교리를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요나의 실수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오래된 성경지식이나 교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함부로 제한하거나 단정하는 것은 요나의 실수를 또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성경지식이나 교리로도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이나 교리로 제한할 수도 단정할 수도 없는 크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니느웨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앉아서는 초막을 짓고 니느웨 성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가를 기다리는 요나의 모습은 요나서 1장의 모습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요나서 1장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아무리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려고 해도, 요나가 아무리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해도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나는 과거에 주저앉는 대신 과거의 실패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과거에 주저앉을 줄만 알았지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씩이나 듣고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엄청난 은혜와 자비를 체험하고도,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정작 요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실패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과거의 실패가 현재의 나를 붙잡고는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을 요나의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도대체 요나는 니느웨 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초막을 짓고는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는 니느웨에 거두신 재앙을 다시 내리셔서 니느웨 성읍을 무너뜨릴 것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오래된 신앙전통과 교리에 사로잡혀서는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이해하려고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꺾어서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길 원했습니다.


과거의 신앙전통이나 오래된 신앙지식이 만들어낸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나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시고 진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는 요나에게 큰 바람과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어 요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 것처럼 이번에는 세 가지를 예비하시어 요나로 하여금 자신의 편견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세 가지는 박 넝쿨과, 벌레와 뜨거운 동풍이었습니다.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4: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박 넝쿨은 하루 밤사이에 자라서는 다음날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요나는 박 넝쿨이 만들어준 그늘로 인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벌레가 박 넝쿨을 갉아먹어 시들게 하였습니다. 다음 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뜨거운 동풍이 불고 이전보다 더 뜨거운 태양이 요나의 머리를 비추었습니다.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요나는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또 다시 죽기를 원하였습니다.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요나는 박 넝쿨이 없을 때에는 자신이 지은 초막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중동의 뜨거운 태양 빛으로 인해 괴로워했지만 그렇다고 죽기를 구할 만큼 힘들어 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박 넝쿨이 생겨나더니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요나는 박 넝쿨로 인해 너무나 기뻤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박 넝쿨이 시들어 버리자 이전까지 잘 참고 견디던 더위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며 또 다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며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다는 박 넝쿨과 벌레와 뜨거운 동풍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 가지는 여러 가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메타포입니다. 인생에는 나를 기쁘게 하는 박 넝쿨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기쁘게 하는 박 넝쿨을 빼앗아 가는 벌레도 있습니다. 있다가 빼앗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없었을 때보다 더 큰 분노와 상실감을 가집니다. 아예 없을 때에는 잘 견디며 살다가도 있다가 빼기면 없을 때보다 더 크게 분노합니다.


박 넝쿨이 주는 시원함 때문에 잠시 사라졌던 분노가 이전보다 더 크게 솟구쳤습니다. 요나는 또 다시 하나님께 분노하며 따지고 듭니다. 요나가 화를 내며 따지고 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화를 내는 요나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가 하나님의 질문에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대답합니다.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요나는 걸핏하면 죽음을 들먹입니다. 요나서 4장에서만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에게 요나 한 사람의 죽음이 무슨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걸핏하면 죽음을 들먹이는 요나에 대해 참으십니다. 우리 역시 걸핏하면 죽음을 들먹이며 삽니다. 막상 죽음을 감당할 용기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장이라도 요나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수 있지만 끝까지 참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죽기 전에 요나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인생의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선포한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는 철저히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들에게 내리려 하였던 재앙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께 화를 내었습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화만 내고 미워하고 파괴되기만을 원했지 무엇인가를 기뻐하거나 긍휼히 여기고 아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요나가 유일하게 기뻐하고 불쌍히 여기며 아꼈던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박 넝쿨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박 넝쿨을 아꼈다고 하십니다. 아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후쓰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후쓰의 뜻은 긍휼히 여기다또는 불쌍히 여기다는 뜻입니다.


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나님은 요나는 박 넝쿨을 기뻐하고 아꼈다고 했습니다. 요나가 아꼈던 박 넝쿨은 그가 심지도 않고 키우지 않았으며 하룻밤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식물이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은 하룻밤에 자랐다가 하룻밤에 사라져 버린 박 넝쿨도 아꼈습니다.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한낱 박 넝쿨도 아낄 줄 알면서 12만 명의 사람들과 수많은 짐승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 물으십니다.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도대체 요나는 자신이 심지도 가꾸지도 않은 박 넝쿨은 아끼면서 니느웨 백성들을 심판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화를 낸 것일까요? 요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알았지만, 요나의 마음에는 자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믿었지만, 요나의 마음에는 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게 되면 예배, 기도, 성경읽기, 전도, 봉사, 선교와 같은 종교행위를 하도록 요구받습니다. 이런 종교 행위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자라고 성숙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종교행위를 하는 것만으로 신앙이 자라고 성숙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우리에게 하도록 하시는가를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하도록 나에게 요구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이루시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가기 싫어하는 요나를 끝내 니느웨로 보내시려고 했는가? 왜 내가 이런 일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으면 자기가 한 열심 때문에 바리새인과 같은 잘못된 자기 확신과 영적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나님을 원망하는 요나와 같은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박 넝쿨은 무엇입니까? 돈일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고, 사업일 수도 있고, 사람들의 칭찬일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박 넝쿨이 자신의 실수든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든 갑자기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시들어진 박 넝쿨이 주는 영적도전이 무엇입니까? 박 넝쿨과 같은 기쁨에 빠져서 하나님께서 정말 아끼시는 것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행위를 규칙적으로 성실히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배우기 위해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배워야 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배우지 못하고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가장 나쁜 결과를 얻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것을 나도 아낄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나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을 나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숙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변화되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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