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아닌 구원
디모데전서 2:1-4
(녹음이 되지 않아 음성설교가 없습니다.)
오늘부터 당분간 구원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구원 아닌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제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이왕 시작했으니 가능하면 구원이라는 주제에 대해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싶거나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면 12월 한 달 동안만 하고 그만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가지진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설교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막상 구원이 무엇이냐? 물으면 누구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실제로 구원론은 신학에서도 가장 어려운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다가 1500년 이상을 논쟁해왔으며 지금까지도 교단과 교파에 따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대단히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특별히 구원에 대한 신학에서는 장로교와 감리교는 거의 정반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소속된 교단이 감리교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교회 교인 대부분은 감리교회보다는 장로교단에서 신앙 생활했던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몇 번을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구원론에 관한 저의 설교가 장로교 신앙 배경을 가진 교인들에게는 거부감이 너무 심할 것 같다는 지레짐작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구원에 대한 주제를 더는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강력하게 들었습니다. 구원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하지만 갈수록 교회와 교인들이 추구하는 구원이 성경이 가르치고 말씀하고 있는 구원과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구원이 교회에 무분별하게 유통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잘못되면 그 사람의 삶이나 행동도 잘못되게 됩니다. 교회도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영적 타락과 부패는 잘못된 신학과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학에 문제가 있기에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 신앙에 문제가 있기에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특히 구원론 문제가 그렇습니다.
한국교회 목사 대부분과 교인들이 믿는 구원론은 정체불명의 비성경적 구원론입니다. 인간의 세속적인 종교적 욕망에 근거한 욕망의 구원론입니다. 더 많은 교인을 교회로 끌어모으기 위해 문턱을 낮춘 싸구려 구원론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종교 행위를 가지고 천국행을 보장하고 확신하는 자기 확신의 구원론입니다.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구원론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에 대한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앞으로 구원에 대한 설교를 듣다 보면 혹여 그동안 여러분들이 듣고 배우고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거부감이 드는 것이야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귀를 막고는 듣지 않으려고 하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설교하는 것을 그대로 믿으라고 강요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다분히 논쟁적일 수 있는 설교를 굳이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듣고 배우고 확신한 것이 기독교 구원론의 전부가 아님을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구원에 대한 다른 주장이나 신학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짐으로 우리의 신앙이 잘못된 확신에서 벗어나 좀 더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는 아주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전도 구호였습니다. 물론 요즘은 “예수 믿고 부자 되세요.” 나 “예수 믿고 대박 나세요.”가 더 많이 사용되는 전도 구호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전도 구호는 교인들을 삐끼로 만들고 교회를 영적 유흥업소로 만들어 버리는 매우 심각한 영적 타락이며 신앙의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는 전도 구호처럼 구원은 예수를 믿는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물론 요즘은 구원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이 예전처럼 그리 절실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구원은 기독교 신앙이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목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는 기독교, 구원이 빠진 기독교는 앙꼬 없는 찐빵처럼 더는 기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온통 구원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를 고쳐주신 이유도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으며,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구한 것도 구원이며,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그것도 그 안에 구원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것도,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공생애 사역을 하신 것도,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도, 죽음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도 그리고 재림하신다는 약속도 결국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합니다. 구원이야말로 성경의 핵심 메시지이며 기독교 신앙 최고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롬1:16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물론 구원이란 것이 기독교 신앙에만 있는 전유물은 아닙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가 그 내용과 방법에서는 다르지만 하나같이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 중에도 자기 인생에 대한 구원을 소원하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가 가르치는 구원과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구원은 전혀 다릅니다. 구원의 방식도 다르고 구원의 내용도 다릅니다.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더는 기독교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구원은 다른 종교가 말하는 구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내세우는 교리나 방법은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독교의 구원이나 이슬람의 구원 불교의 구원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구원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목사 대부분과 교인들에 의해 유통되고 소비되는 가장 대표적인 구원론이 무엇입니까? 살아서 예수 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좀 더 매력적으로 표현하면 예수 잘 믿으면 살아서는 복을 받으며 살다가 죽어서 그 영혼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마다 목사마다 교인마다 조금씩은 다를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요 구원이라고 여깁니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대표적 구원은 죽은 다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한국교회의 구원론은 천국이라고 하는 낙원(파라다이스)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방법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유통되고 있고 가르치고 있는 천국 가는 방법론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요약하면 대충 이런 식일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가야 하는 천국이라는 좋은 곳과 지옥이라는 무서운 곳이 있습니다. 지옥은 무섭고 두려운 곳이니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살아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 예수를 믿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면 됩니다. 그럼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잘 다니는 것입니다. 교회를 잘 다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 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 내고, 이런저런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하고, 전도 열심히 하며 목사님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이상이 교회에서 유통되고 있는 구원 받는 비결입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구원입니까? 도대체 성경 어디에서 이런 구원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과연 이런 구원이 다른 종교의 구원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구원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식의 구원은 형식과 모양만 다르지 그 내용은 다른 종교와 심지어 미신과도 다를 게 없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유통되고 있는 이런 식의 구원은 다른 종교들이 가르치고 추구하는 구원보다도 더 속물적이며 가볍고 이기적이기까지 합니다. 교회가 이런 식의 싸구려 구원론을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이 가진 종교적인 욕망을 부추기고 만족시켜 더 많은 교인을 교회로 모아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열정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물론 이것보다는 좀 더 세련된 형태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고통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살지만 죽어서는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이라는 낙원에서 영생토록 복을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세상에서의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이나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또 다른 다른 주장으로는 세상은 악하고 타락한 곳이며, 인간의 육체 역시 타락하고 썩어질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세상의 일, 육체의 일에는 상관하지 말고 오로지 죽음 이후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이 가는 천국만 바라보며 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죽음으로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주장합니다.
비록 주장하는 것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교회에서 유통되는 구원이란 살아서 예수 잘 믿어 죽어서 그 영혼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론은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주장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첫째, 구원은 철저하게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둘째, 구원은 지상에서 하늘, 세상에서 천국으로의 공간이동이다. 셋째, 구원은 육체가 아닌 영혼이 받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주장이 과연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 가지 주장은 기독교 신앙의 구원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하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성경은 결코 이런 구원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삶을 구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세 가지에 대해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다시금 조화롭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갈라진 하늘과 땅이 다시금 통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셨던 구원이라고 가르칩니다.
엡1:10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마6:10 나라가 임하게 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삶과 죽음, 세상과 천국, 육체와 영혼을 철저하게 둘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을 이원론적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따라서 죽어서 육체는 소멸하고 영혼만 천국에 간다는 구원론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 아니라 플라톤 철학이 가르치는 구원론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세계를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질료)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형상 Idea)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는 불안정하고 소멸하여질 열등한 세계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물질세계를 악한 세계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Idea)는 영원히 변하지 않은 이상적이며 완전하고 선한 세계라 여겼습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를 구분하고 영적 세계와 물질세계를 구분하여, 영적 세계는 선하고 영원한 것이며 물질세계는 악하고 소멸할 것이라고 여긴다면 구원이란 무엇이 되겠습니까?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 물리적 세계를 떠나서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한 세계인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구원은 당연히 죽음 이후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도 플라톤의 철학에 유래한 것입니다. 중세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을 정신적인 사랑만이 고귀하고 진정한 사랑이라 여겼습니다. 플라톤 철학의 주장처럼 사람은 몸과 마음이 따로 일 수 있는 지극히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몸은 여기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 가운데 어떤 것이 있으면 더 좋겠습니까? 몸이 있는 게 좋습니까? 마음이 있는 게 좋습니까? 진정한 사랑이라면 둘 다 있어야 합니다. 둘 중 하나만 있으면 그것만 가지고는 절대로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몸과 마음이 늘 따로 노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인 사람을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몸은 없고 마음으로만 하는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만 있고 마음은 없는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어야 하고 마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몸도 있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따로 나누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플라톤 철학의 구원일 뿐입니다.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처럼 세상은 정말 악한 것이고 육체는 썩어 없어질 불필요한 것일까요? 세상은 정말 심판받고 멸망 받아야 할 저주받은 곳인가요? 플라톤 철학의 주장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썩어 없어질 악하고 불필요한 세상을 창조하신 나쁜 하나님이 되십니다.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타락하여 세상이 악해진 것입니다. 육체가 악하거나 타락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타락하니 육체가 타락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고 불안전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고 노화되는 것이 육체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으로는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모두 나타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육신의 한계라고 여겨야지 육신이 열등하거나 악하다고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지 악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교인 대부분은 이 말씀을 육신이 악하다고 여깁니다. 약한 것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약한 것은 도와주거나 더 많은 배려를 해야 하지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마26:41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요한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는 자꾸만 세상을 멸망해야 할 악한 것으로만 여깁니다. 육체를 부패하고 썩어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만 여깁니다. 어차피 멸망할 세상이기에, 어차피 썩어질 육체이기에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육신의 삶을 바꾸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 결과가 교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매우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생각하는 천국이 무엇입니까?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들이 세상을 떠나갈 수 있는 신비하고 영적인 세계로만 천국을 믿습니다. 물론 성경은 영적인 세계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나 하나님 나라를 세상이나 육체와 구별하여 오로지 영적인 세계로만 제한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플라톤의 이원론에 갇히게 되면서 기독교의 구원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 영혼의 문제일 뿐이지 내가 사는 세상이나 내 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을 마치 죽음 이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사건에 대한 보험쯤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매우 위험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부활하셨을 때도 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실 때도 영혼만 하늘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몸과 함께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만약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성경의 구원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육체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나, 육체의 몸으로 부활하신 사건, 부활하신 몸으로 하늘로 승천하신 사건,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언약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되고 맙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일을 하신 것이 되고 맙니다.
또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며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악하고 타락하여 곧 멸망할 것이니 악한 세상에 대한 미련일랑 모두 버리고 어서 죽어서 천국이나 가자고 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새로운 삶을 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라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왜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까?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까? 굶주린 자들에게 왜 먹을 것을 주어 그들을 살게 하셨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은 심지어 죽은 회당장의 딸과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의 전부라면 오히려 죽도록 도와서 하루라도 빨리 영혼이 천국에 가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곧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다시 말해 몸과 마음이 하나였던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곧 성경이 가르치는 최고의 구원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