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죽음 이후로 미루지 말라!
누가복음 19:1-10
구원 시리즈 두 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구원을 죽음 이후로 미루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구원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의 가치이자 목적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인 대부분이 주로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무려 541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 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대부분과 교인들이 추구하는 구원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과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목사 대부분과 교인들에 의해 유통되고 소비되는 가장 대표적인 구원론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 대부분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라고 믿으며 신앙생활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어 천당 가자.”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구원론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구원론은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성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장입니다. 성경은 이런 식의 구원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 믿어 천당 간다는 구원론에는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첫째, 구원은 철저하게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구원은 지상에서 천당으로의 공간이동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세 가지는 결코 성경에 근거한 주장이 아닙니다.
오늘은 세 가지 주장 가운데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 여기는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가끔가다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나쁘지 않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꼭 젊어서부터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녀야 할 필요가 있나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니 젊었을 때는 세상 재미 좀 보면서 살다가 죽기 전에만 예수 잘 믿으면 천국 갈 수 있지 않나요?” 생각보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교인 중에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의 예를 들며 질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달렸던 강도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하나님 나라에 임하실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강도를 부러워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 구원받은 강도처럼 자신도 죽기 전에만 구원받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눅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구원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강도를 부러워하는 질문을 합니까? 기독교의 구원을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가는 것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어서 믿으나 죽기 직전에 믿으나 죽은 후에 천국에만 갈 수 있다면 굳이 젊어서부터 믿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너무 일찍 예수를 믿는 것이 손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강도마저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목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목사가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집사님은 죽은 다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특별히 구원파 계열의 목사들은 “오늘 밤 죽는다면 형제님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묻습니다. 왜 이렇게 묻습니까? 대부분의 목사 역시 구원이나 천국은 죽음 이후의 문제라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목사나 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곧 천국에 가는 것이고 천국은 죽은 다음에나 가는 곳으로 믿습니다. 이런 구원관은 딱히 기독교만의 구원이라고 할 수 없는 구원관입니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는 대부분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구원관입니다. 심지어 무신론자이지만 사후 세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관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는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이 생각하는 구원관은 무엇입니다. 이들 대다수가 생각하는 사후 세계 구원관은 “착하게 살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좋은 곳에 간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마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보면 대부분 이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기독교의 구원관은 다른 종교가 주장하는 구원관과 크게 다른 것처럼 여겨집니다. 기독교인들의 구원관에는 ‘단순히 착하게 살면’이라는 조건 대신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만’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사후 세계도 단순히 ‘이 세상보다 좋은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이 사는 거룩한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천국에 간다는 기독교인들의 구원관이 사후 세계를 믿는 다른 종교의 구원관과 완전히 다른 것일까요? 저는 여기에는 그리 큰 차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후 세계를 가리켜 ‘천국’이라고 하느냐 ‘극락’이라고 하느냐 ‘좋은 곳’이라고 하느냐만 다를 뿐이지 구원은 죽음 이후의 문제다, 구원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구원은 영혼이 받는다는 면에서 기독교의 구원관과 비기독교의 구원관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후 천국행이라는 구원관이 과연 기독교 신앙의 구원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총 몇 번이 나온다고 했습니까? 총 541번이 나옵니다. 그럼 성경에서 천국이라는 단어는 몇 번이나 나올까요? 37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구약성경에는 천국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만 천국이라는 단어가 37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천국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마태복음에만 36번 나오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딱 1번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교인이 예수 믿고 천당 간다고 믿는데 천당이라는 단어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신다고 믿는 분들은 도대체 어디를 가신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단순한 말장난처럼 들으시면 안 됩니다.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니까 잘못된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총 541번 나오고 있는 구원이 죽음 이후나 천국과 연관하여 사용된 경우는 몇 번이나 될까요? 제가 확인한 바로는 디모데후서 4장 18절 딱 한 번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540번의 구원은 모두 이 땅에서 구원, 현실 세계에서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대부분의 구원은 지극히 현실적이며 실제적이며 현세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경의 가르치고 있는 구원에는 죽음 이후 천국에 가는 것도 포함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딤후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성경은 구원을 결코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그리고 한결같이 구원을 지금 현재의 문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목사와 교인들은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만 제한하는 잘못된 구원관은 기독교 신앙을 매우 심각하게 왜곡시키며 타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만 제한하는 잘못된 구원관은 교회에서만 믿는 척하고 교회 밖에서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교인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결코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이라 가르칩니다. 야고보의 교훈처럼 믿음은 반드시 삶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믿는 대로 행동하거나 살지 않는 것은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마음으로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믿음대로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 여길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 삶의 문제로 여겨야 합니다. 구원을 지금 내 삶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면, 구원은 이 땅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 여기서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게 되니까 교회에서는 믿음 있는 척하지만 교회를 나가는 순간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로만 제한하는 구원관은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사후 천국행을 보장받는 보험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신앙생활은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사후 세계의 천국행을 보장받는 보험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공기를 호흡하며 살듯이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이 죽음 이후의 사건으로 밀려나면서 지금 이 세상에서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의 구원을 기뻐하고 구원을 사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해졌습니다.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은 분리되어, 신앙생활이 지금 이 땅에서 구원을 누리며 구원을 기뻐하며 사는 일이 아니라 죽고 난 후에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한 사후 보험으로 변질시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상당수의 교인이 교회 안에서는 신앙을 고백하지만, 교회 밖에만 나가면 성경의 가치관이나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아갑니다.
말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요 멸망 받을 세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부귀영화 온갖 좋을 것들은 다 누리고 싶어 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쥐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입만 열면 이 세상은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세상이요 심판받을 세상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좋은 자리, 좋은 것은 다 얻으며 살려고 합니다. 이보다 더 욕심스러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기독교인들은 입만 열면 세상은 죄악과 어둠이 가득한 곳이라며 오직 저 천국만 바라보며 살자고 찬송합니다. 하지만 정작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 세상에서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길 원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저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데 세상 사람들 눈에는 이런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목사들은 구원을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잘못 가르쳤고 교인들은 구원을 ‘사후 천국행’ 쯤으로 잘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라면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신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굶주린 자들에게는 왜 먹을 것을 주셨습니까? 한 끼 먹을 것 해결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빨리 굶어 죽어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이 아닐까요? 심지어 예수님은 죽은 회당장의 딸과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저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보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두어 저들의 영혼이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일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라면 예수님께서 육체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나, 육체의 몸으로 부활하신 사건, 부활하신 몸으로 하늘로 승천하신 사건,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언약은 모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불필요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야말로 예수님께서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일을 하신 것이 되고 맙니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며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악하고 타락하여 곧 멸망할 것이니 악한 세상에 대한 미련일랑 모두 버리고 어서 죽어서 천국이나 가자고 하셨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 이 땅에서 다가올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구원은 지금 여기의 문제였지 결코 죽음 이후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 소문을 듣고는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빠져나가신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급하게 가시던 길을 멈추고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옷을 만진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뭐라고 선포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여인에게 선포하신 구원은 죽음 이후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사건이었습니다.
마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께서 여리고라는 지역을 지나가실 때 일입니다. 삭개오라고 하는 세리장이 사람들 틈에 끼어 예수님을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었던 삭개오는 그 누구도 키가 작은 그에게 자리를 비켜 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려고 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에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탐욕스러운 삭개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신다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예수님과 삭개오를 욕했습니다. 그러자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며 만약 다른 사람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에게 구원은 죽은 다음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 땅에서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로 언약받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다음 천국에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았으며 예수님은 지금 이 땅에서 구원받은 삶을 살아갈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마치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듯 하나님의 구원도 지금 여기서 호흡하며 누려야 하는 실재입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구원은 죽음 이후에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죽은 후에 그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혼자서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함께 모여서 서로서로 돕고 섬기며 가르치고 배우라고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죽음 이후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죽음 이후의 사건으로 미루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함께 모여 있는 예배하는 우리 교회에서부터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은 땅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아픔 가운데 뒤섞여 있고, 이 땅의 어둠 속에 숨어 있고, 우리의 슬픈 상처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을 보려고 할 때만,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려고 애쓸 때만 겨우 찾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지금 여기 이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만남 속에도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드리는 작은 예배 속에도 있습니다. 정성껏 준비하여 함께 나는 식탁의 교제에도 숨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와 섬김과 나눔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 할지라도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다음 천국 가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을 사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한 구원이 죽는다고 저절로 생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