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영혼의 문제로만 제한하지 말라!
로마서 8:5-11
구원 시리즈 세 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구원을 영혼의 문제로 제한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가장 중요한 신앙의 가치이자 목적입니다. 어떤 면에서 구원은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 교인이 구원을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신앙의 목적이라고 여기면서도 오늘날 대부분 교회와 교인들이 추구하는 구원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과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대부분의 목사와 교인들에 의해 유통되고 소비되는 가장 대표적인 구원론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인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라고 믿으며 신앙생활 합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천당 가자”는 구원론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세상을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로 나누는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이 가르치는 구원론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간다”라는 이원론 철학의 구원론에는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주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구원은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구원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만 해당하는 문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구원은 지상에서 천당으로의 공간이동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플라톤 철학에 근거한 주장입니다.
지난주에는 구원을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여기는 잘못된 구원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총 541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541번이나 나오고 있는 구원이 죽음 이후의 사건과 연관하여 사용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결코 죽음 이후의 문제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고 한결같이 구원을 지금 현재의 문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은 다음 천국에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았으며 예수님은 지금 이 땅에서 구원받은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치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듯 하나님의 구원도 지금 여기서 호흡하며 누려야 하는 실재입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구원은 죽음 이후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구원은 죽음 이후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사건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죽은 후에 그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혼자서는 힘들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함께 모여서 서로서로 돕고 섬기며 가르치고 배우라고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은 구원을 육체가 아닌 오직 영혼의 문제로만 여기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천당에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대부분의 교인들 생각은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단지 기독교인들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사후 세계나 내세를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후 세계 또는 내세는 영혼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사람이 죽으면 그 육체는 썩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썩어져 사라지는 육체는 내세에 들어가지 못하고 육체를 떠난 영혼만이 내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이든 내세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거의 모든 드라마나 영화가 이런 식으로 죽음 이후를 그리고 있습니다.
육신은 사라지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구원관은 얼핏 생각하기에 인간의 죽음과 구원을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설명처럼 여겨집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죽은 사람의 육체는 땅에 묻는 매장을 하거나 불에 태우는 화장을 하거나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한 줌의 흙이나 재로 변하고 맙니다. 따라서 썩고 분해되어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지만, 육체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은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비롯된 가르침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플라톤 철학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몸은 시간이 갈수록 늙어지고 약해지다가 마침내 병들어 죽습니다. 반면에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어떻습니까? 시간이 갈수록 늙어지고 약해지는 육체와는 달리 영원을 생각하고 영원을 꿈꿉니다. 마치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몸과 영혼은 전혀 다른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플라톤 철학은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고 일시적이고 타락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영원불멸하는 존재의 근원이며 깨끗하고 순결하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육체와 감각은 저급하지만, 영적인 것은 고상하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영혼을 담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또한, 영혼이 육체와 결합한 상태를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육체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며, 육체 안에 갇혀있던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인간의 구원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여러분은 플라톤 철학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당히 합리적이며 논리적으로 들리는 그럴듯한 주장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모순, 몸과 마음의 모순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사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매력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수천 년에 걸쳐 심지어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이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육체와 영혼이 마치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는 이원론과 인간의 육체는 소멸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영혼 불멸설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에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한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7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영혼이 떠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초대교회 순교자로 알려진 스데반 역시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예수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죽음에 관해 설명하기를 마치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가는 것처럼 표현하였습니다.
눅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마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행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또한, 성경은 구원을 죽음 이후의 사건과 연관시킨 말씀은 단 하나도 없지만, 구원을 영혼의 문제로만 여길 수 있는 말씀들은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믿음은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으며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고전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얼핏 읽기에 이 모든 신약성경의 말씀들이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한 것이라든지 기독교의 구원 역시 육체와는 상관없는 오직 영혼에만 해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와 상황을 무시한 채 문자 그대로만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매우 심각한 오해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한다는 말씀이나 마태복음에서 영혼이 떠나셨다고 표현한 것은 몸은 죽었으나 그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으로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육체만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존재 전체가 세상을 떠났다는 상징이며 메타포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을 구원한다는 히브리서나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는 베드로전서의 말씀 또한 육체와 영혼을 둘로 나누고 오직 영혼만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구원을 의미하는 상징이자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육체는 소멸하고 영혼만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속에 속한 모든 삶의 방식은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 말씀 다음에 한 말씀만 읽어봐도 그 의미를 분명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고전15:52-53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는 혈과 육, 썩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고는 53절에서는 썩을 몸이 썩지 않는 몸을 입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50절에서 말한 ‘혈과 육’을 문자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면 뒤에 말씀을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게 됩니다. ‘혈과 육’을 문자대로 읽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 모든 것’,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한 모든 삶’을 비유하고 상징하는 것으로 읽어야만 비로소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영혼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고 여기서 육체와는 전혀 다른 존재인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영혼은 육체와 영혼 전부를 포함하는 인간의 전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철저하게 둘로 나누고는 육체는 소멸하고 오로지 영혼만 구원받는 주장은 플라톤 철학의 구원론이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구원론입니다.
만약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 플라톤 철학의 구원론처럼 육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로지 영혼에만 해당하는 것이라면, 만약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저 세상이라고 하는 영적 세계만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그야말로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 됩니다.
만약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 육체와는 상관없는 영혼만의 문제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나 예수님의 부활은 불필요한 사건이 되고 맙니다. 구원이 영혼만의 문제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굳이 사람의 몸으로, 사람의 육체로 세상에 오셔야 할 필요가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은 더더욱 불필요한 사건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몸이 다시 사신 사건입니다. 만약 육체는 불필요한 것이며 단지 썩어 없어질 것이며 오직 영혼만이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육체의 몸으로 부활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게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기에 성경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말씀하고 있으며 전 세계의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 사도신경에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사도신경에서 고백하고 있는 몸이 다시 산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신학적 해석이 가능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성경과 교회의 신앙은 육체는 소멸하여 사라지고 오로지 영혼만이 구원받는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이 주장하는 구원과는 전혀 다른 구원을 추구하였습니다. 따라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기독교의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는 바른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 육체와는 상관없는 영혼만의 문제라고 한다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육체로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맙니다. 영혼만이 인간의 참된 실재이고 영혼만이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가 영적 세계에서 사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육신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파괴되고 멸망되어야 할 것들을 만드신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무의미한 일을 하신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사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 세 가지를 꼽으면 첫 번째는 천지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사건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사랑하시어 세상을 살리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몸소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이 세 가지 사건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적으로 이 세 가지 사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사건에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천지창조, 예수님의 성육신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세 가지 사건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세상과 육체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는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시고는 “보시기에 참 좋았더라.” 말씀하심으로 세상을 좋은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어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시므로 인간의 육체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육체의 몸으로 부활하시므로 육체가 단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변화되는 것임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부활 사건은 플라톤 철학이 무시하고 외면하고 쓸데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 세상과 인간의 육체에 대한 존귀함과 소중함을 선포하고 가르쳐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심으로써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소중한 수단임을 선포하셨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몸은 결코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임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던 시대와 사람들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와 사람들이었습니다. 육체는 약하고 악하고 타락한 것이기에 소멸할 것이고 오직 영혼만이 영적 세계라고 하는 저세상에서 구원을 누릴 것이라고 믿던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어떻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영혼만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또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을 이용하여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처럼 영과 육을 둘로 나누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이해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롬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과 영혼을 둘로 나누고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혼의 생각은 생명이라고 설명하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결론으로 가르친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 죽을 몸도 살린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몸의 부활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의 회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창조하신 대로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모든 교회와 교인들은 주일예배로 모일 때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매 주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육체는 소멸하고 오직 영혼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악하고 부정한 것으로 그래서 파괴되고 멸망되어질 세상으로 여깁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성육신과 부활을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기독교 신앙의 왜곡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믿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셨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