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한 삶을 삽시다.
이사야 32:5-8
오늘은 2020년 첫 번째 주일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존귀한 삶을 살아가는 2020년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새해 첫 번째 주일 설교는 이사야 32장 5~8절의 성경 말씀을 가지고 “존귀한 삶을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 함께 옆 사람을 축복해 줍니다. “존귀한 삶을 사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제가 기도하거나 설교하면서 빼먹지 않고 매번 반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존귀한 삶입니다. 저에게 있어 존귀한 삶은 제 목회의 목표이자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 존귀한 삶은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구원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리고 목사의 설교와 기도를 통해 인생은 단 한 번뿐인 유 일회적인 사건이며 자신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존귀하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의 일상을 존귀하게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유대인 철학자는 “소유냐 존재냐”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에릭 프롬이 주장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두 가지 유형은 소유형의 인간과 존재 형의 인간입니다. 소유형의 인간이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존재 형의 인간이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인간다움이라는 가치에 두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소유형의 사람은 더 많은 소유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양심이나 신념 또는 자 자존심도 포기할 줄 아는 지극히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존재형의 사람은 자신의 양심이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사용하거나 심지어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부류의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이 더 존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존귀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소유형의 인간이며 소유형의 삶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그리고 매우 집요하게 이전보다 더 많은 소유가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며 더 많은 소유만이 사람을 이전보다 더 존귀하게 만든다고 가르칩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격이나 양심, 자존심 같은 것은 잠시 포기하고 살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며 양심이나 소신 자존심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고 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점점 사람이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살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개들은 사람보다 더 대접받으며 삽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그리스도 구세주로 믿는 기독교 신앙은 이전보다 더 많은 소유를 얻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까? 기독교 신앙은 이전보다 더 부자가 되고, 이전보다 더 성공한 사람이 되고, 이 전보다 더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고 육체적 욕구만을 가진 인간이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인간의 존귀함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성전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왜 가장 거룩한 장소로 여겨졌습니까? 성전이 거룩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이 대단히 웅장하고 훌륭하게 그리고 각종 보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요. 성전을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로 건물로 여겼던 유일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가 성전을 거룩하게 만든 것이지 성전을 만들었던 각종 백향목이나 금은보석이 성전을 거룩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사람을 존귀하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이 가진 재산이 많기 때문입니까? 그 사람이 사는 집이 화려하고 비싼 집이기 때문입니까? 그 사람의 권세가 높아서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걸친 값비싼 명품 옷이나 가방 때문에 존귀하다고 합니까? 물론 세상은 이런 것들로 그 사람을 존귀하다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것들이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솔로몬이 누렸던 모든 영광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에 핀 꽃 하나만도 못하다고 했습니다.
마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대단한 성공을 하거나 엄청난 부를 소유했거나 저들이 입은 옷이나 장신구가 대단히 비싸고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것은 저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은 이전보다 더 많은 소유나 더 큰 성공을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적으로 이전보다 더 존귀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은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이전보다 더 많은 소유를 얻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성공했더라. 예수 믿고 부자가 되었더라. 예수 믿고 출세했더라. 이런 것들이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신앙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간증과 고백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겨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매우 심각한 왜곡입니다.
성경에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올 것 같습니까? 단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또는 선한 이라는 단어는 거의 300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앙은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지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 행복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좋은 사람이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부자에 관한 이야기가 가끔 나오고 있는데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것 인양 왜곡합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부자가 되지 못하고 출세하지 못하면 무언가 신앙의 열심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더 큰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반드시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 이런 신앙의 왜곡이 생겼습니까? 복에 대한 잘못된 신앙과 신학 때문입니다. 초기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 한국 사람들이 복을 너무나 좋아해서 기독교를 믿으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고 그래서 성경을 복음서라고 했으며, 전도하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복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복을 바라고 복을 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목표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복되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복되길 원하고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사람이 복되게 사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 사람이 가장 소원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도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복되게 살게 하셨음에도 사람이 복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행복인가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요?” 이 물음에 대해 지금까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시도한 답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이것은 굳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어떤 사회체제에서나 소유는 행복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고 생각해 왔으며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이, 더 많은 소유가 사람을 이전보다 더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고 더 많은 재산과 소유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심지어 건강과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으며 더 많은 소유를 두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많은 소유와 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다 여기지 않습니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오늘날 미국에서 우울증은 1960년대보다 10배나 증가했고, 우울증이 발병하는 평균 나이가 1960년대의 29.5세에서 14.5세로 낮아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미국의 경우만 아니라 대부분 선진국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소유를 통해, 더 높은 권세를 통해, 더 황홀한 쾌락을 통해 인생의 행복을 찾아보려고 숱한 노력을 하지만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잡았다고 생각하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낭패를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못된 행복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소유는 절대로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소유는 늘 우리를 불만족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끊임없이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복을 의미하는 영어단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fortune, luck, happiness 그리고 blessing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영어단어 가운데 영어 성경에서 복을 표현하는 단어는 딱 한 가지입니다. 무엇입니까? blessing입니다. 영어 성경은 복을 fortune, luck, happiness라고 쓰지 않고 오로지 bless, blessed, blessing이란 단어만 사용하여 복을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이 담겨 있습니다.
fortune이나 luck, 그리고 happiness는 무엇인가를 얻는 것을 의미하거나 또 는 우연히 운이 좋아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happiness의 어원은 happe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좋은 일이 happen 되었을 때 happiness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bless의 어원은 bleed라고 합니다. bleed는 피를 흘린다는 뜻으로 희생을 상징합니다. 내가 피 흘림으로, 내가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이 말하는 행복인 fortune, luck이나 happiness는 나에게 운이 좋거나, 나에게 횡재가 생기거나,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내가 무언 가를 소유할 때 가지는 행복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예수님이 몸소 가르쳐 주신 행복은 내가 희생하여, 내가 낮아져서, 내가 돈을 써서, 내가 수고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때 누리는 행복입니다. 이 사실 이 주는 영적 도전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저를 포함하여 우리는 모두 다 이기적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이기적이냐면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손해를 입히더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없거나 이익이 되면 좋아 합니다. 그것으로 행복해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해서 얻는 행복은 그리 대단하지도 않으며 오래가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사람을 인간답다거나 존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가장 큰 만족이나 행복을 누릴 때는 본능적인 자신의 이기심을 뛰어넘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대부분의 엄마는 배고픈 자신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것보다 굶주린 자식의 입에 음식이 들어갈 때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 나니
기독교 신앙의 복은 소유에 대한 복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복입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였기에 복된 인생이 아니라 내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 운이 좋거나, 횡재하거나, 좋은 일이 생기거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할 때 가지는 행복이라면, 성경이 말씀하고 예수님이 말씀하는 행복은 내가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나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노년에 자신의 인생에 대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고백했습니다. 그야말로 살아생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과 쾌락과 부와 권세를 누린 솔로몬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무익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도대체 왜 모든 것을 누린 자신의 인생에 대해 헛되고 무의미하다고 고백한 것일까요?
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이 너무나 쏜살같이 지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엊그제 2019년을 맞이한 것 같은데 벌써 2020년 하고도 닷새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고백처럼 인생은 허무하고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고백처럼 정말 우리의 인생의 헛되고 무의미한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인생)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허무한 인생을 살았기에 인생이 허무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헛되고 헛된 인생, 허무한 인생을 살라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너 무나 많은 사람이 인생을 헛되다고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더 많은 소유에만 두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내 꿈이 이루어지면, 내 야망이 이루어지면 행복해질 것이라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 꿈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서라도 반드시 그 꿈과 야망을 이루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내 꿈과 야망을 이루었다고 사람이 행복 해가 질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꿈과 야망을 이루는 순간 솔로몬이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허무함이 밀물같이 몰려올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 인생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이를 통한 삶의 소중함, 더 나아가 인생의 잔을 채울 수 있는 참된 만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길은 결국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살라고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 존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 하나님의 형 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존귀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내가 가지고 누리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바르게 사용 되는 하나님의 권세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내가 누릴 영광(명예)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있어도 저절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있어도 저절로 좋은 사람이 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도 맨 날 그 모양 그대로 인 것입니다.
사32:7-8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존귀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더 많은 수고와 노력과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보다,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확신하는 것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성공하고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것보다,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고, 우리를 더 존귀하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더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