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하나님 나라6-왜 하필 겨자씨 한 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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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겨자씨 한 알인가?

마태복음 13:31-32

 

 

하나님 나라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왜 하필 겨자씨 한 알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지난주 설교했던 가라지의 비유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지난주 설교가 끝나고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을 함부로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면 자칫 교회나 세상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일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방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모두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라고 여겨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겠지만 가라지의 비유 역시 예수님의 본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는 하나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비판하거나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 합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건 심판이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사명이며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세상이나 교회에서 벌어지는 나쁜 일이나 악한 일에 대해 방관하거나 무관심 하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자칫 알곡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나쁜 일이나 악한 일을 방관하고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고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와 같은 열심 당원들은 저들이 가라지라고 여겼던 로마제국을 유대 땅에서 쫓아내려고 끊임없이 무장테러를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늘 참담했습니다. 한 명의 로마인에게 테러하면 로마제국으로부터 수십 명의 무고한 유대 백성들이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이슬람 과격분자들의 테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테러리스트는 거대 악에 대항한다는 명분을 앞세웁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일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밭에 난 가라지가 어떻게 생겨난 것입니까? 저절로 생겨났습니까? 아니요. 원수가 몰래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당장 밭에 난 가라지를 뽑아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아내면 원수가 또다시 와서는 가라지를 뿌리고 갈 것입니다. 나쁜 놈 하나 제거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가라지가 아니라 몰래 가라지를 뿌리고 도망가는 원수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원수는 사탄이며 악마입니다. 사탄은 인간의 악한 탐욕이나 악한 사회 구조를 의미합니다. 사탄에게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에게 지지 말아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세상이나 교회에서 벌어지는 나쁜 일, 악한 일을 방관하거나 무관심 하라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은 당장이라도 가라지를 뽑으려고 했던 종들의 사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천국이라고 비유하신 것처럼 세상에 좋은 사람 선한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한 사람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 세상의 부조리나 악한 일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을 자꾸만 늘려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어떤 방식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이며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방식은 악한 사람을 제거하여 세상을 바꾸려고 합니다. 과연 이런 식으로 세상을 선하게 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요.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는 꼭 한두 명의 또라이가 항상 존재합니다. 나쁜 놈이 있습니다. 그놈만 쫓아내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놈을 쫓아내면 지금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또라이 짓을 하거나 나쁜 역할을 대신합니다. 이것을 또라이 보전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항상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합니다. 큰일을 위해선 작은 일을 무시해도 된다고 여깁니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히 세상의 방식이지 예수님의 방식도 하나님 나라의 방식도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이 하찮게 여기고 작은 일을 위해 세상이 크게 여기는 일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약자나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하는 예수님의 비유는 겨자씨 비유로 알려진 말씀으로 아주 간단하고 짧은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지극히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 씨가 자라더니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되었습니다. 커다란 나무가 되자 많은 새가 찾아와서는 그 가지에 와서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겨자씨 비유의 전부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설교하는 겨자씨의 비유 역시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좋은 질문을 가지고 비유를 읽어야 합니다. 겨자씨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많고 많은 씨 가운데 하필이면 겨자씨 한 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천국을 비유하셨는가? 입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도 왜 하필 겨자씨 한 알인가?”로 정했습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살펴보았던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씨와 관련된 비유였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사방으로 뿌려진 씨에 관한 이야기였고, 가라지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원수가 한밤중에 몰래 와서는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비유에서 나오는 씨는 구체적으로 어떤 나무나 식물의 씨라는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저 천국 복음과 하나님의 아들들을 의미하는 좋은 씨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무엇으로 비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이 천국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씨로 비유하시며 무화과 씨나, 올리브 씨, 또는 포도 씨로 비유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특정하여 천국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알이라고 그 개수를 특정하셨습니다.


13: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겨자씨의 비유 역시 교회에서 자주 설교 되는 비유입니다. 하지만 겨자씨 비유에 대한 설교 대부분이 아주 작은 씨가 심었는데 나중에 새들이 앉을 수 있을 만큼 큰 나무가 되었다는데 초점을 둡니다. 욥기에 나오는 말씀처럼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나중은 창대하였다는 식으로 비유를 해석합니다. 이처럼 작고 보잘것없이 시작한 것이 나중에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되면 이 비유의 본래 의도를 놓치게 됩니다.


만약 겨자씨의 비유가 작은 것이 나중에 커졌다는 것이 중요했다고 한다면, 겨자씨보다는 차라리 상수리 씨나 무화과 씨 또는 올리브 씨로 비유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겨자씨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기 때문입니다. 겨자는 대부분 일년생 풀이며 일부가 이년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자란 것은 3m를 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대단히 크게 자라지는 않습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깃들인다는 말씀은 둥지를 튼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앉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작은 것이 커졌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면 굳이 겨자씨가 아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씨는 나중에 다 커지기 때문입니다. 커지는 비율로 따진다면 다른 씨들이 그 의미를 전달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씨 중에서 왜 하필 겨자씨로 천국을 비유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비유하신 겨자씨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는 예수님의 설명처럼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물론 겨자씨보다 작은 씨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작은 것을 비유할 때는 겨자씨와 같다고 했습니다. 마치 우리말에서 가장 작은 것을 나타낼 때 깨알 같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13: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두 번째, 유대 사람들은 그 누구도 자기 밭에다 겨자씨를 심지 않습니다. 겨자는 굳이 자기 밭에다 심지 않아도 갈릴리 들판 어디에서나 흔하게 자라며 구할 수 있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겨자를 굳이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고사리를 좋아하지만, 고사리를 자기 밭에는 심지 않는 것과 비슷한 심정일 것입니다. 산에만 가면 천지삐갈인데 굳이 집에다 심을 이유가 없죠. 그런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심었다는 것은 보잘것없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겨자씨가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메타포야말로 겨자씨 비유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고는 제자들과 예수님께 모여든 사람들에게 수시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사람들의 생각에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면 강력한 권력이 있거나 재물이 엄청나게 많거나 로마군대와 맞설 수 있는 강한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이런 것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도대체 권력도 없고 재물도 없고 군대도 없이 대단해 보이지 않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다니며 무슨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는 도무지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제자들과 무리에게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시려고 비유로 하신 말씀이 바로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엄청나게 대단하고 큰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하찮게 여겨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데서부터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겨자씨 한 알로 천국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신 예수님은 스스로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을 오셨다는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까? 가장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가장 초라하고 비천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유대 땅에서 가장 촌구석이었던 갈릴리 나사렛에서 30년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고 사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이 얼마나 시골이었냐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이 소개한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 말했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냐며 빈정거렸습니다. 우리말로 하 면 개천에선 절대로 용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학식도 권세도 없는 물고기 잡는 어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이 죄인이라며 상종도 하지 않는 세리 마태와 같은 제자도 있었습니다. 숫자도 겨우 12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12명밖에 되지 않는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었으며, 나머지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가시자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모여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면 단 한 번도 엄청나고 대단한 일을 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늘 약한 자들, 어린아이들, 죄인이라며 멸시받았던 세리와 창기들 그리고 병든 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야말로 결단코 하늘의 상을 잃지 않는 가장 중요하고 값있는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 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려고 하자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막았습니다. 당시 여자나 어린아이는 아무 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한 마디로 쓸모없는 애들은 가라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순진하고 착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작고 연약하여 쓸모없는 것을 의미하는 메타포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작은 자, 약한 자, 가난한 자, 다수에 속하지 못하는 소수자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자 하나라도 함부로 여기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작은 자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아끼는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사람들이라 가르치십니다.


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사소한 일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주 작은 일에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람들이 이까짓 것쯤이야 하며 대수롭지 않게 저지르는 작은 불의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작은 것에 불의한 사람은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경고합니다.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예수님은 작은 사람, 약한 사람, 무시당하는 사람, 소수자들을 소중히 여기셨으며,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작은 일에 정의로운 사람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방법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별것 아닌 것으로 하찮게 여겼습니다. 이런 보잘것없는 것으로는 도저히 하나님 나라를 만들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작은 것을 무시합니다. 작은 것을 시시하게 생각합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고 큰 것만 중시하는 생각은 교회와 신앙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가 주일 낮예배를 대예배라고 합니다. 교회 이름도 중앙교회, 제일교회가 가장 많습니다. 어느 지역을 가든 중앙교회나 제일교회가 없는 지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목사와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세상의 중심이 되거나 제일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대부분 교회가 지금보다 더 큰 교회를 만드는 것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더 큰 교회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인 교회는 자기 교회 교인들이 어떤 교인이 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이 모이느냐만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됩니다.


대형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나 교인들이 레파토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더 큰 교회가 되어야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미 대형교회인데도 더 큰 교회를 만드는 일에 교회의 모든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없습니다. 교회를 이용하고 숫자를 이용해 자신들의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목사와 교인들의 욕심만 있을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큰일, 작은 일을 따지는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교회가 큰일 작은 일을 따지며 큰일을 하기 위해선 큰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겨자씨 한 알로 천국을 비유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천지를 지으신 영원하신 하나님께 어떤 일이 하나님께서 놀라실만한 큰일입니까? 사람이 생각하는 큰일, 대단한 일이 하나님께도 큰일이며 대단한 일일까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90214일 보이저 1호 인공위성이 지구-태양 간 거리의 40배인 60km 거리인 명왕성 부근에서 지구의 모습을 찍어 미항공우주국 나사(NASA)로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보이저 1호가 찍은 사진에서 지구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지구가 겨자씨 한 알보다 더 작아 여간해선 찾아보기 힘들 지경입니다.


이 사진은 나사의 천문학자였던 칼 세이건 박사가 보이저 1호의 망원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을 찍어보자고 제안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보이저 1호가 찍어서 보낸 사진을 본 칼 세이건 박사는 희미하고 작게 보이는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부르고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지구는 우주라는 광막한 공간 속의 작디작은 무대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 속의 한 조각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 은 장군과 황제들이 흘렸던 피의 강을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 한구석에 살던 사람들이, 다른 구석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그 잔혹함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자주 서로를 오해했는지, 얼마나 기를 쓰고 서로를 죽이려 했는지, 얼마나 사무치게 서로를 증오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사는 이 행성은 거대한 우주의 어둠에 둘러싸인 한 점 외로운 티끌일 뿐이다.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인간의 오만함을 더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터전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자각을 절절히 보여주는 것이 달리 또 있을까?”   


세상은 심지어 교회조차도 겨자씨 한 알을 작은 것이라 무시합니다. 겨자를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라 하찮게 여깁니다. 대신에 세상과 교회는 대단하고 엄청나고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것들을 좋아할까요? 이런 것들은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런 것에는 천국은 결코 없습니다. 다만 이런 곳에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욕심만 있을 뿐입니다.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큰일도 아니고 최고나 최대 또는 메인스트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유일한 가치는 영원입니다. 영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엄청난 일이고, 최고였고, 최대였다고 해도 영원하지 않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은 영원한 삶을 약속하는 것이지 세상에서의 최고나 최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항상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시 최고의 제국이었던 이집트 대신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하찮게 여겼던 갈릴리 어부들과 세리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천국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는 작은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부터 시작합니다. 큰일을 한다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시시해 보이고 작은 일에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부터 천국은 시작됩니다. 이것이 겨자씨로 비유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여정에 겨자씨 같은 하나님 나라를 날마다 맛보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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