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누룩인가?
마태복음 13:33
하나님 나라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왜 하필 누룩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세상을 향해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복음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복음은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의 구원이라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고 믿는 것이 복음을 믿는 것이며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인들 대부분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멀거나 심지어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관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기독교 신앙을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기독교로 만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일곱 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를 통틀어 하나님 나라, 천국에 관한 가장 많은 비유가 마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일곱 가지 천국에 관한 비유를 살펴보면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하지만 매우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일곱 가지 천국에 관한 비유의 공통된 특징은 일곱 비유가 모두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도무지 경험하기 힘든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이야기로 천국을 비유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건으로 천국을 비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왜 하나님 나라를 지극히 평범한 세상의 일로 비유하셨을까요? 지극히 평범한 사건이나 이야기들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신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려는 하나님 나라는 죽음 다음 일어날 저 세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건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아는 것이 대단히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특별한 사람들만 알 수 영적 비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이라고 하면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곳으로 상상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아는 것도 너무나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지식이어서 보통 사람은 절대로 알지 못하는 영적 비밀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쉽게 알 수있도록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천국을 비유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시고 가르쳐 주셨기에 비유를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사람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이 기대하고 상상하고 바라던 천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나 엄청난 희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씨 뿌리는 비유나,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를 보아도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위해서 엄청나게 대단한 희생과 결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은 말로는 천국을 소망한다고 습관처럼 말하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천국을 사는 것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것일까요?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오직 죽음 이후에 가는 천국으로만 하나님 나라를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종교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천국은 그렇게 어려운 것도 대단한 영적 비밀도 아닙니다. 누구라도 정직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으며 살아갈 수 있는 진리가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일상적이고 평범한 진리가 욕심에 사로잡히고 자기 의와 이익에 사로잡히게 되면 눈으로 봐도 보지 못하며,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며, 알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 살펴볼 비유는 누룩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누룩의 비유는 지난주 살펴보았던 겨자씨 비유와 내용이나 구조에서 대단히 비슷합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겨자씨 한 알을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나물보다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누룩의 비유는 여자가 가루 서 말을 반죽하면서 반죽에다 누룩을 갖다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반죽한 가루 서 말이 크게 부풀었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비유를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선 겨자씨 한 알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씨 한 알은 무엇을 의미하는 메타포였습니까? 겨자씨 한 알은 세상에서 작은 자, 약한 자, 소수자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심었다는 것은 세상에서 작은 자, 약한 자, 소수자를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메타포였습니다.
세상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의 방식이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무시하고 멸시하는 작은 자, 약한 자, 소수자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약자나 소수를 위해 다수가 참고 기다리고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누룩의 비유 역시 겨자씨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누룩이 무엇을 비유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룩이 의미하는 메타포를 제대로 알아야 누룩의 비유를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 누룩이 무엇입니까? 누룩은 빵이나 술을 발효시킬 때 사용하는 발효제입니다. 영어로는 이스트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룩의 비유에서 누룩이 의미하는 메타포는 무엇일까요? 유대 종교 문화에서 누룩은 거룩하지 않은 부정한 것을 의미하는 메타포입니다.
성경을 보면 누룩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나 나쁜 의미로만 사용되었습니다. 유대문화에서 누룩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미국의 독립기념일과 비슷한 날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7일 동안 계속되는 유월절 절기에는 반드시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빵만 먹어야 합니다. 한글 성경은 이것을 무교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출12:15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유월절 이후 유대 문화에서 누룩은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절대로 누룩을 넣지 말아야 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다 일주일에 한 번씩 빵을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을 진설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전에 드리는 진설병에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무교병만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유대 종교 문화에서 누룩은 거룩하지 않은 부정한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거 룩하신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레2:11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예수님 역시 누룩을 부정한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의 누룩은 형식에만 집착하는 외식하는 신앙을 말씀하신 것이고, 헤롯의 누룩은 자신의 이익과 권세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의 탐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게다가 누룩의 비유는 아주 짧은 한 구절의 말씀이지만 여기에는 유대 문화가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 또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누룩도 부정한 것이지만 여자 역시 유대 문화에서는 부정한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여자는 절대로 성막이나 성전에서 행해지는 그 어떤 종교 제사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들은 조상들에게 제사 지낼 때 절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왜? 여자는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근거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마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당시 여자들이 얼마나 부정한 취급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남자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렸는데 이 기도를 할 때 반복하는 기도문이 있 었다고 합니다. 그 기도문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는 감사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감사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제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노예로 태어나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였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자들에 대한 인식이나 대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여자들을 부정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여전히 세계 모든 문화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중에서도 여성 차별이 가장 심하게 남아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종교계입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세상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여성 지도자가 나옵니다. 심지어 여성 대통령, 여성 총리도 이제는 꽤 많습니다.
하지만 종교계에서 여성 이 최고 지도자가 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나마 성차별이 가장 덜한 곳이 교회라고는 하지만 교회의 성차별 역시 심각할 정도입니다. 교인들의 70-80%가 여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꽤 많은 교단과 교회들이 여자 목사나 여자 장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여자들은 주일 낮 예배에는 기도도 못 하게 하는 교회들은 차고 넘칩니다. 이런 교단이나 교회는 여자들이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런 교회일수록 여자 교인들이 차고 넘칩니다.
이처럼 누룩의 비유에 등장하는 것은 온통 부정한 것뿐입니다. 여자도 부정한 존재이며, 누룩도 부정한 것입니다. 게다가 부정하다는 여자가 부정하다는 누룩으로 빵을 만드는 것 역시 부엌에서 여자들이나 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 하찮은 일로 여겼습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 비추어 본다면 누룩의 비유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거룩한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거룩하다고 하는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시며 천국을 무엇으로 비유하셨습니까?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넣어 부풀게 한 누룩으로 천국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겨자씨 한 알로 천국을 비유하신 것만 해도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룩의 비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하나님께 결코 드릴 수 없다고 여겼던 부정한 누룩을 가지고 거룩하다는 하나님 나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사람들이 하 찮게 여기는 겨자씨 한 알과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누룩으로 하나님 나라 천국을 비유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두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셨던 천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가르쳐 위함입니다. 이 두 비유를 통해 여러분들이 발견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세상이 무시하는 작은 자, 약한 자, 소수자를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누룩의 비유를 통해 세상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죄인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가르쳐 주십니다.
마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21:3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하지만 누룩의 비유에는 반드시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선반에 놓여 있는 누룩을 천국으로 비유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부정한 사람들이 천국의 주인공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비유하신 누룩은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넣어 가루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을 천국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반죽을 잘 발효시켜 맛있는 빵을 만들어 내는 누룩을 하나님 나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마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유대 종교 문화와 성경에 따르면 누룩은 주로 부정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사용하는 빵과 중요한 종교행사나 절기에 사용하는 빵은 모두 누룩이 없는 빵을 사용했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누룩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누룩이 반죽을 아무도 모르게 부풀게 하듯 악한 일, 나쁜 말들이 너무 나 쉽게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세상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쁜 말, 나쁜 소문, 악한 일들은 마치 누룩이 반죽을 발효시키듯 너무나 쉽게 사람들에게 전파됩니다. MIT 연구 결과에 의하면 진짜 뉴스보다 가짜 뉴스를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유통하고 있으며, 가짜 뉴스가 사람들에 전파되는 속도는 진짜 뉴스가 사람들에 전파되는 속도보다 무려 최대 20배가 빨랐다고 합니다. 인터넷을 이용한 Social Network Service에서 돌아다니는 정보들 가운데는 가짜 정보 가짜 뉴스가 진짜 정보나 진짜 뉴스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가짜 정보, 가짜 뉴스를 보더라도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은 진짜 정보보다는 당장 호기심을 충족해 주는 거짓 정보나 가짜 뉴스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짜 뉴스를 가장 많이 유통하고 소비하는 곳이 교회라고 합니다. 목사들이 설교에서 인용되는 예화의 50% 이상이 가짜 정보나 가짜 뉴스라고 해도 결코,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룩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천국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루 서말에 들어간 누룩을 빵을 부패시키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반죽을 잘 발효시켜 누룩이 없는 빵보다 더 맛있는 빵을 만드는 수단으로 여긴 것입니다. 실제로 발효시키지 않는 빵보다 잘 발효시킨 빵이 훨씬 더 맛있는 빵이 됩니다. 저는 이것이 누룩 비유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맞추어 사람들을 판단하고 저울질했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고 거룩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구분하고 부정한 자라 구분한 사람들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판단하고 정죄하고 미워하는 데에만 탁월하지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데에는 젬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타락한 종교지도자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였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저들을 용납하시고 품어주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구별하여 쫓아내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들과는 정반대로 저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세리와 죄인들을 품어주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눅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물론 나쁜 일, 악한 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전염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 선한 일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전염성이 있습니다. 좋은 말, 선한 행위에도 나쁜 말, 악한 행위 이상의 강력한 전염성과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부정하다 여기는 사람을 품어주고 이들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은 그 사람의 타고난 신분이나 성별 또는 그 사람의 직업으로 그 사람의 존귀함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타고난 신분이나 성별 또는 그 사람의 직업으로 그 사람의 존귀함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이든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여 더 많은 사람을 섬기려 할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으로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누가 세상을 변화시킵니까?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자랑하는 사람,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상이 하찮고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 또는 종교지도자들이 부정하다고 여겼던 여자들, 세리들 죄인들이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켰습니다. 바라기는 세상을 부패하고 썩게 만드는 일에 누룩과 같이 쓰이는 인생이 아니라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이 선하고 좋은 일에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자유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