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오해
룻기 1:19-22
룻기 강해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라는 제목을 말씀을 나눕니다. 룻기의 시작은 심각한 위기로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가나안 땅에서도 가장 풍요롭다고 하여 빵집이라고 부르는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빵집이라는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닥쳤다는 사실만으로 가나안 땅에 닥친 흉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룻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이 짧은 구절을 통해 드러난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집니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를 뜻하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위기는 우리를 무너뜨리는 위험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변화를 가져오게 만드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겪는 흉년에 대해 의문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사는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인도하신 땅이었습니다. 심지어 가나안 땅에서도 가장 풍요롭다는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인도하신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평탄하고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인생의 시련이나 고난 같은 것은 내 인생에 없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과 기대가 지나쳐서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믿음이 예상치 못한 인생의 역경이나 재앙으로부터 자신을 피하게 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룻기의 말씀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라고 해서 자연의 재난과 기근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인생의 고통이나 질병 또는 재난에서 면제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당시 가장 풍요롭다고 하는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기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이삭의 아들 야곱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감당하기 힘든 흉년을 경험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흉년의 경험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세상에 속한 자들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창1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지금 전 세계가 겪고 있는 Covid-19이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앙이나 재난 그리고 인생의 위기는 믿음의 사람과 세상의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그리스도로 잘 믿고 열심히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예상치 못한 역경이나 재난으로부터 면제를 약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한다고 해서 질병이나 재앙으로부터 면제를 보장받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니까 우리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모든 게 만사형통하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며, 막히는 게 없고 질병에 걸리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설교해도 사람이 모일까 말까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어도 질병이나 재난으로부터 면제를 약속받는 게 아니라는 설교나 하고 있으니 누가 이런 설교를 듣고 싶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을 바로 하랬다고 아무리 교인들이 늘지 않는다고 명색이 목사가 가짜 약, 엉터리 약을 팔아서 더 많은 교인 모으고 싶은 생각은 1도 없습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모든 고통이나 질병 또는 역경이나 재난으로부터 면제받는 약속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 신앙의 초점을 두는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닥친 조그마한 위기에도 쉽게 넘어지고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를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똑같은 재앙이나 재난, 질병이나 역경을 겪지만 믿음의 사람에게는 이 모든 것이 믿음의 사람을 넘어뜨리는 도구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더욱 존귀한 자로 만드는 선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을 깨닫고 확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바른 믿음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은 저보다 한술 더 떠서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으면 그 순간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예수를 믿으면 그때부터 끝도 없는 핍박과 박해 고난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며 비뚤어진 세상을 바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박해나 핍박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넘어뜨릴 수 없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롬8:36-37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베들레헴 땅에 예상치 못한 흉년이 닥치자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이 어떤 선택과 결정을 했습니다. 베들레헴 땅에 닥친 흉년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겪는 고난이며 시련이었습니다. 함께 겪는 역경을 어떻게 해야 이겨낼 수 있습니까? 함께 힘을 합쳐야만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멜렉 가정은 자신들만 사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얼핏 꽤 영리해 보였던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베들레헴 땅에 닥쳤던 흉년의 위기보다 더 크고 심각한 위기가 닥쳤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홀로 남은 나오미를 포기하지도 버려두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은 나오미에게 며느리 룻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희망을 보여주시고 섭리하시고 간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다 잃은 나오미에게 이방의 땅에 주저앉아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며 포기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앞에 너무 늦은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우편에 매달린 강도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 너무 늦은 사람도 하나도 없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에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품으시고 회복시키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룻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마침내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자 온 성읍이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온 성읍이 들썩한 것을 보면 고향을 떠나기 전 나오미 집안은 유력했었던 집안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룻1:19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모습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힘들 만큼 변해 있었습니다. 모압 땅에서 겪어야 했던 고생이 나오미를 폭삭 늙게 만들었나 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나오미를 보며 하는 말이 "이가 나오미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정말 나오미 맞아? 나오미라면 옛날 우리 동네에서 제일 멋쟁이 아줌마였잖아? 그런데 웬 할머니야? 조소와 조롱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나오미가 말합니다. 더는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은혜로운 자’ 또는 ‘사랑스러운 자’를 의미합니다. 나오미라 불러 달라고 한 마라라는 이름의 뜻은 괴로움 또는 쓰라림을 의미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더는 은혜로운 자가 아니라 괴로운 자라고 고백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룻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사흘 동안 물을 얻지 못해 고생하다가 한 곳에 이르러 샘을 만나게 됩니다.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물을 마시려 하였는데 그 물이 얼마나 쓴지 도무지 사람이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샘의 이름을 '마라'라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자신을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인생으로 여기며 '마라'로 지칭한 것입니다.
출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자신을 ‘마라’라 부르라는 나오미에게서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숨기거나 거부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을 적당히 덮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당당하게 드러냅니다. 누군가 자기를 손가락질하면 대들고 싸울 상황인데 그는 스스로 자기를 '마라'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과 문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치유가 쉬워집니다. 반면에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어 늙고 병드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고 자녀가 성장하여 부모의 품을 떠나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고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실패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행해집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서 매우 심각한 신앙의 문제가 있음을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이렇게 비참한 처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을 무엇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모두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고 자신을 벌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겪는 모든 아픔과 고통이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룻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는 자신이 이토록 비참한 처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주시고 괴롭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모압에서부터 계속되었던 나오미의 일관된 생각이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나오미의 고백은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대단히 신실해 보이는 고백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나오미의 고백처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도망친 엘리멜렉의 가정이 괘씸하여 저들의 가정을 벌주시려고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죽게 하신 것일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오미가 생각하는 대로 잘못한 사람에게 그때마다 벌주고 괴롭게 하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오미 가정에 닥친 비극적인 재앙은 자신들 선택의 결과이지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 아닙니다. 룻기가 가르쳐 주는 하나님은 사람의 잘못을 벌주시고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룻기가 가르쳐 주는 하나님은 사람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으로 인해 망하게 된 가정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게 하시는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단지 룻기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결코 심판의 하나님, 벌주시는 하나님, 괴롭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바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지 결코, 징계나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전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 한국에서 전도왕으로 알려진 유명한 강사가 와서는 간증 집회를 했습니다. 그분의 간증인즉 자신이 안수집사였는데 주일날 교회에 가지 않고 가족들을 데리고 여행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행을 가던 중 고속도로에서 큰 교통사고가 나서 가족 모두가 죽을 뻔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사고로 죽은 가족은 없었지만 크게 다쳐서 가족 모두가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야 했다고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우연히 성경 룻기를 읽다가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고 여행을 떠난 자신이 마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도망쳤던 엘리멜렉과 같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들을 치신 것을 보고는 크게 깨달아 평생 다시는 주일을 빼먹고 여행을 다니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곤 그때부터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전도하는 일에 앞장서서 전도왕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날 집회에 모인 교인들 대부분이 강사의 간증에 크게 감동하고 은혜를 받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의 간증을 듣는 내내 너무나 불편했습니다. 그분의 간증대로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도 긍휼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당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람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그런 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만약 자녀가 부모의 생일날 부모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오지 않고 여행을 갔다고 합니다. 물론 부모도 사람인지라 섭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여행 간 아들이 꽤씸하다고 교통사고나 나서 죽거나 다치라고 바라거나 기도하는 부모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목사가 주일성수하지 않고 놀러 가면 하나님께 벌을 받아 교통사고가 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한국의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는 십일조 안 하면 하나님께서 암에 걸리게 한다는 설교를 버젓이 합니다. 어떤 목사는 목사에게 함부로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중병에 걸린다고 설교합니다.
전 세계 모든 인류가 고통을 겪고 있는 Covid-19에 대해 꽤 많은 목사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합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라고 설교합니다. 얼핏 대단히 신실해 보이지만 이런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이며 왜곡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 인간의 탐욕과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인간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을 벌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주장입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우리의 실수와 잘못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와 채찍마저도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신 받게 하시고 대신 맞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 대한 심판은 마지막 때로 한없이 미루시고는 끊임없이 우리를 품어주시고 용서하시고 바르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주시고 징계하셨기 때문이라고 한탄하는 나오미에 대해 룻기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룻기 1장 22절의 말씀입니다. 22절의 말씀은 하나님에 대해 탄식을 쏟아내는 나오미의 고백 끝에 덧붙이기에는 뜬금없어 보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룻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비록 나오미가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그 누구도 의지하고 도움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처지였습니다. 나오미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자신의 비참한 처지로 인해 하나님께 탄식을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오미를 회복시키고 구원하시려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말씀이 바로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에 대해 오해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제멋대로 왜곡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으로 인한 불행한 결과마저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난 마라라는 쓴물을 변하여 단물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마라와 같은 우리 인생의 쓴 것들을 단 것으로 바꾸고 회복시키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우리에게 어떠한 위기나 고통도 겪지 않게 하심이 아니라 어떠한 위기나 고통을 겪을지라도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 전능하심입니다. 우리가 겪는 역경과 시련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신앙여정에 풍성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