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방법
룻기 2:1-7
룻기 강해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계속되는 Covid-19의 위기로 인해 오늘로 벌써 7번째 온라인 예배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이 위기가 얼마나 더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온 위기가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조금만 더 참고 견디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배려할 수 있기 바랍니다. 회복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와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따라나선 룻의 인생은 그야말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예전과는 다르지만, 나오미와 룻이 살았던 시대에는 결혼한 여자가 남편을 잃는다는 것은 인생의 전부를 잃는 것과 같았습니다. 남편을 잃어 과부가 되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는 비극적인 일입니다.
신24:20-21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어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나오미의 계획에 없었던 일입니다. 나오미가 바라고 원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룻 역시 남편을 잃고 고향 모압을 떠나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오는 것은 그녀의 인생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2020년을 맞이하며 우리의 삶이 이토록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을 계획하거나 원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 노력한 대로 되지 않는 나오미 가정을 통해 룻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인생이란 게 사람의 계획이나 선택만으로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의 계획이나 노력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은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선택과 결정에는 늘 실수와 잘못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연약함과 불완전함 때문에 사람의 선택과 결정에는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이기심과 탐욕 때문에, 사람의 뜻과 계획에는 잘못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실수와 잘못이 자신의 인생에 심각한 위기와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아들의 계획이 그 가정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람의 욕심이 빚어내 결과입니다.
하지만 룻기는 사람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으로 인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사람을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비천한 모압 여인 룻을 훗날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라고 여기는 다윗의 족보에 오르고 심지어는 예수님의 족보에도 오르는 존귀한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마1:5-6a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것이 비천하고 불행한 룻의 인생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룻기는 우리의 실력과 노력만으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룻기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은혜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은혜란 받을 자격이나 공로가 없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친절하심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실력과 노력만 가지고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합니다.
룻기 1장은 사람의 계획과 선택으로만 가득합니다. 사람의 계획과 선택으로 가득한 룻기 1장이 어떠했습니까?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룻기 1장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인생이란 내 힘과 능력 그리고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됩니다.
룻기서 2장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룻기 1장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혜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룻기 1장에서의 나오미와 룻의 인생은 절망적이고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룻기 2장에는 네 번에 걸쳐 은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인생에서 은혜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저들의 비참한 인생에도 회복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룻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룻2: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룻2: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룻2: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룻은 자신의 인생에 은혜가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계획과 노력만 가지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길 원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구하면서도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오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오는지를 모르니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립니다. 은혜의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리니 그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를 알기 위해선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일 대부분이 하나님의 원리에 의해,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주실 때 수확의 법칙에 따라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농부에게 풍성한 결실을 주실 때 추수의 법칙에 따라서 결실을 주십니다.
같은 원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면 언제나 하나님 은혜의 원리 은혜의 법칙에 따라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사람들은 모두 은혜의 원리, 은혜의 법칙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은혜의 원리를 무시하거나 은혜의 법칙에 순종하지 않으며 신앙생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난다고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룻기가 보여주는 은혜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입니까?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룻기 2장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은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리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단지 룻기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일관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은혜의 원리이며 은혜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는 통로는 늘 요셉이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이집트 바로의 친위 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갔을 때 그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보디발을 통해 요셉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감옥을 지키는 간수를 통해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창39: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창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은혜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인생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특별히 매일같이 만나는 사람이 중요하고 다음은 교회를 통해 만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을 그리고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맨날 아내를 핀잔이나 주고 함부로 대하는 남편이, 또는 맨날 남편을 무시하고 구박하는 아내가 어떻게 사람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교인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겠습니까!
은혜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만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통로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보다 사람을 존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방법은 만남입니다. 물론 아무나 만난다고 내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스쳐 가는 수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그 모든 만남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잘못된 만남도 있습니다. 만나지 말아야 할 만남도 있습니다.
인생은 결국 좋은 만남을 통해 행복하고 잘못된 만남을 통해 불행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만남은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비참했던 룻의 인생이 회복되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룻이 만난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룻이 말론과의 만남으로 불행이 시작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말론으로 인해 시어머니 나오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만남을 통해 룻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룻의 인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보아스를 만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의 말씀은 룻의 인생에 등장한 보아스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보아스를 가리켜 유력자라고 소개합니다. 유력자란 말은 권세가 있고 부유한 자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유력자는 단순히 권세가 있거나 물질적으로 부유한 자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힘과 권세로 다른 이를 살리고 돕는 사람을 나타낼 때 유력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룻기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 유력한 자가 있으니 이름은 보아스더라
절망적이고 비참한 룻의 생애에 보아스가 등장한 것은, 비천한 룻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였습니다. 성경은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간략하고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기 2장 4절입니다. 주인과 종이 만나 서로 축복을 빌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사랑과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룻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아스는 들판에서 추수하는 종들을 찾아가서는 저들에게 먼저 인사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러자 종들도 보아스에게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며 축복합니다. 보아스가 먼저 종들을 축복하자 그가 빌어준 축복이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짧은 에피소드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룻기는 보아스의 영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세상의 권세와 부를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성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친절과 배려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밭을 추수하는 일꾼들에게뿐 아니라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미천한 여인에게까지 친절과 배려를 보입니다.
친절과 배려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친절은 종교적 열정이나 신학적 학식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영성입니다. 특별히 작은 자, 소외된 자들에게 베풀 수 있는 친절과 배려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룻의 인생을 회복시키기 위해 보아스를 만나도록 그녀의 발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룻기는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사건에 대해 기록하면서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마침 보아스가 룻이 이삭을 줍는 밭에 오게 됐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룻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룻기는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룻기가 기록하고 있는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는 운이나 재수가 좋아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는 룻의 계산이나 계획 없이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계산이나 계획에 없었던 일이 일어나게 되면 우연히 또는 마침 일어난 일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우연히’와 ‘마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요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룻이 자신의 인생을 역전시킬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나 계획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것이 아닙니다. 룻이 먹고 살기 위해 이삭을 주우러 나가며 보아스를 만날 것을 계획하거나 계산하여 보아스의 밭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룻은 그저 자신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겨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기기 위해서 따라온 것입니다. 룻은 자신의 팔자를 펴줄 남자를 만나기 위해 밭에 나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시어머니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이삭을 주우러 밭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룻의 순수함에 보시고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래서 룻의 발걸음을 보아스가 속한 밭으로 인도하셨고 거기서 떨어진 이삭을 줍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 보아스가 이삭을 줍는 룻을 만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아스와 같이 자신의 인생을 역전시켜 줄 힘 있는 사람을 만나길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지나쳐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자기에게 이익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계산합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계획합니다. 계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도 이런 만남에는 결코,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앞서는 사람의 계획과 계산은 절대로 좋은 만남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람의 계산과 이익이 앞선 만남은 서로를 힘들게 하고 상처 나게 만듭니다.
룻의 인생에 보아스라는 좋은 만남이 있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우선 당장은 손해가 되고 어려움이 될 수 있었던 시어머니 나오미와의 만남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룻의 인생에 보아스라는 은혜로운 만남을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남자는 ‘장’자 붙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시’자 붙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라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특별히 여자들이 보아스와 같은 남자를 만나 인생을 단번에 역전시키려 합니다. 여자라면 누구나 이런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여자가 놓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신데렐라였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게 된 이유는 그녀가 왕자를 만나 자신의 팔자를 고치기 위해 계획하거나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데렐라는 누구보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정작 자신은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도 하나도 안 하면서 그저 보아스와 같은 유력자를 만나 단번에 자신의 팔자만 고치려고 합니다. 이런 걸 깨몽이라고 합니다. 꿈 깨라는 말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좋은 사람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본적이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알아봅니다. 자기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눈앞에 좋은 사람을 가져다주어도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룻이 보아스와 같은 친절하고 사려 깊은 유력자를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룻이 보아스 못지않은 좋은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룻은 자신도 남편을 잃어 불행한 처지였지만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 섬기기 위해 시어머니 나오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까지 따라왔습니다.
베들레헴에 와서는 시어머니를 먹여 살리기 위해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여인이었습니다. 자신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는 좋은 사람 룻에게 하나님은 보아스라는 좋은 사람을 만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있어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가르치는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좋은 사람을 만나는 만남을 통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룻에게는 손해만 되었던 나오미와의 만남이 결국 그녀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였고 하나님과 만남이 보아스와의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사람의 계산이나 계획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계획하지도 계산하지도 않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길 축복합니다. 특별히 비천한 이방 여인을 존귀한 여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자유교회 여성들에게 임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