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아픔을 선용하시는 하나님
룻기 2:5-13
룻기 강해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인생의 아픔을 선용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로 8번째 온라인 예배를 드립니다. 비록 예배를 드리는 장소는 제각각이지만 같은 시간, 같은 찬양, 같은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유교회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주일예배 때마다 읽고 있는 룻기에는 다른 성경과는 다른 매우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룻기에는 다른 성경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특별한 기적이나 신비한 일들이 단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룻기에는 다른 구약 성경들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나 가르침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어쩌면 대단히 우리보다 더 비참한 형편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로 가득한 룻기는 구약성경 39권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성경으로 여겨집니다. 유대인들은 절기 때마다 성경을 낭독하는데 오순절 절기에 낭독하는 성경이 바로 룻기입니다. 평범한 이야기로 가득한 룻기가 절기 때마다 낭독되는 중요한 성경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특별한 기적이나 이적이 없이도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나 음성을 듣는 신비한 은사체험이 없이도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특별한 기적이나 신비한 은사체험 같은 것을 신앙 목표로 삼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신앙에서 특별한 기적이나 신비한 은사체험을 부정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특별한 기적이나 신비한 은사를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없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초자연적인 사건이 없이도 자신의 삶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중요한 신앙의 자세이며 태도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룻기는 매우 안타까운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 가정이 가나안 땅 베들레헴에 닥친 흉년의 위기를 피해 잘살아 보고자 모압 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잘살아 보려고 모압 땅으로 피신한 엘리멜렉의 선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방 땅 모압에서 남편이자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맙니다.
이방 땅에서 남편을 잃은 나오미에게는 그래도 두 아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남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장가보내어 두 며느리를 얻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을 결혼시킨 지 10년 즈음에 무슨 사건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아 모르지만 두 아들 모두 죽고 맙니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면 아들들이라도 아니 한 아들만이라도 살아남았어야 할 텐데 두 아들 모두 아버지가 죽고 10년이 채 못 되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사건이 대를 이어 계속됩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남편을 잃은 고통을 나오미의 두 며느리였던 오르바와 룻 역시 똑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룻기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그의 두 며느리가 똑같은 고통과 비극을 대를 이어 겪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룻기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하는 현상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가정이 비슷한 고통을 대물림입니다. 부모 세대의 실패나 고통이 자녀 세대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서 기근을 만나자 이집트로 피신을 합니다. 이집트로 피신을 하면서 아브람이 자신의 아내 사래에게 어떻게 당부했습니까? 자신의 아내에게 이집트에 가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내라고 하면 이집트 사람들이 아내를 뺏기 위해 자신을 죽일까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람의 부탁은 무척이나 비겁한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12:11-13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실수를 통해 변하지도 깨닫지도 못하면 같은 실수가 인생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튼, 창세기 20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랄 이라는 곳에서 살았을 때였습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라고 아브라함이라고 이름까지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아브라함이 또다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사칭하여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아내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겼습니다. 물론 나중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아내를 찾아주었지만, 아브라함의 행동은 치사하고 비겁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아내에게 쫓겨나도 벌써 쫓겨났을 것입니다.
창세기 20:1-2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런데 아브라함의 잘못은 당대의 문제로 실패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아들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과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실패를 자기 인생에서 반복합니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실패하였던 똑같은 장소에서 아버지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창세기 26:6-7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그 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의 아들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야곱은 편애의 고통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쌍둥이 형 에서를 사랑했으며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로 고통을 받으며 자랐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자 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의 노년이 어떠했습니까? 야곱의 편애로 자식들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려는 욕심에 아버지를 속여서 에서가 받을 축복을 자신이 가로챕니다. 그리고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하는 아들 요셉을 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물론 죽이진 못하고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자식들은 악한 짐승이 요셉을 잡아먹었다며 아버지를 속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인생의 비극입니다. 죄나 실수, 잘못이나 고통이 당대의 죄나 실수, 잘못이나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후대에도 같은 죄와 실수가 같은 잘못이나 고통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생김새나 성격만 유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부모 세대의 죄나 실수 또는 잘못도 그대로 유전됩니다. 대물림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성경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도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 좋은 아빠가 될 가능성이 클까요? 아버지와 같은 폭력적인 아빠가 될 가능성이 클까요? 욕하면서 배운다고 자기 아버지와 같은 폭력적인 아빠가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심지어 폭력적인 아버지보다 더한 폭력적인 아빠가 됩니다.
예로부터 모진 시어머니 밑에서 자란 며느리가 모진 시어머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진 시어머니 밑에서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며 살았다면 그 누구보다도 며느리 된 설움을 잘 알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얼마나 서러운지를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시어머니가 되면 똑같은 고통과 아픔을 대물림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대부분 경우 자신의 경험한 상처와 고통을 그대로 며느리에게 대물림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당했던 설움이나 고통보다 더 혹독하게 며느리를 다룹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남에게 전가함으로 보상받고 위로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당했던 고통과 설움을 며느리에게 전가함으로 자신이 받은 고통을 보상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모셨던 시어머니보다 더 독한 시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살면서 자신이 받았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고 보상받으려고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받은 상처나 아픔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나 아픔을 치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상처나 아픔이 계속 다른 사람에게, 이웃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전가되어져 갑니다.
자신이 받았던 상처나 고통을 떠넘길 때마다 마치 눈덩이를 굴릴 때마다 눈덩이가 점점 더 커지는 것처럼 점점 더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는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상처나 고통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남에게 자신의 상처를 떠넘기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모두가 같이 비참해질 뿐입니다.
룻기는 원하지 않는 아픔과 고통이 2대에 걸쳐 반복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같은 아픔과 고통에 빠진 나오미와 룻의 생애가 어떻게 치유되고 회복되는가를 보여주는 놀라운 하나님의 가르침이 숨겨져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어떻게 해서 대를 이어 계속되는 아픔과 고통을 끊어 낼 수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오미는 자신이 겪은 아픔과 고통 때문에 며느리들과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며느리들을 구박하지 않았습니다.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며느리들을 친딸같이 여기며 불쌍히 여기며 저들의 장래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도우려고 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사랑을 받은 며느리 룻도 자신의 비참한 처지 때문에 시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과 자식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를 끝까지 쫓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밭으로 나가 이삭을 줍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며느리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와 룻의 인생이 회복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도 나오미와 같은 시어머니가 있었으면 자신도 룻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시어머니들은 시어머니대로 자신에게 룻 같은 며느리가 있었다면 자신도 나오미처럼 며느리를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만 생각하며 사니까 평생을 살아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와 비슷한 상처와 고통 겪는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상처와 고통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상처와 아픔을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룻기는 자신이 겪어야 했던 상처와 고통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쌍한 시어머니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아침 일찍 이삭을 주우러 나간 룻을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베푸시려는 은혜를 입게 하십니다.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신의 밭에서 마음껏 이삭을 줍도록 친절을 베풉니다. 추수하는 종들에게는 룻을 함부로 하지 말고 보호해 줄 것을 명령합니다. 종들이 떠온 물을 룻도 마실 수 있도록 합니다. 보아스가 식사할 때에는 룻도 초대하여 배부르게 먹도록 도와줍니다. 심지어 추수하는 종들에게 추수한 곡식 단을 일부러 떨어뜨려 룻이 많은 이삭을 줍도록 합니다.
그야말로 보아스가 보여준 모든 것들이 이방 여인 룻으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분에 넘치는 친절이며 은혜였습니다. 룻이 자신에게 분에 넘치는 친절을 베푸는 보아스에게 묻습니다. 나는 비천한 이방 여인이거늘 어찌하여 자신에게 이토록 큰 은혜와 자비를 베푸십니까? 룻의 질문에 보아스가 대답힙니다.
룻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룻이 보아스에게 받는 은혜와 자비는 우연히 또는 재수가 좋아서 좋은 사람을 만나 거저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보아스에게 룻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하시고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에게 모압 여인 룻에 관한 이야기를 게 듣게 하시고 그녀를 만나게 하신 것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 하나님의 섭리라 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어떤 사람입니까? 룻기는 보아스를 엘리멜렉의 친족이며 유력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보아스의 부모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성경은 계보(족보)를 기록할 때 남자들의 이름만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1장 5절을 보면 매우 특이하게도 보아스를 중심으로 두 명의 여인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태복음 1장 5절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인이 누구입니까? 라합과 룻입니다. 라합은 보아스의 어머니였다면 룻은 보아스의 아내였습니다. 그리고 라합과 룻 두 여인의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라합과 룻 두 여인 모두 이방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이라고 하면 개처럼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게다가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지금은 어쩐지 모르지만, 그 당시 기생이라고 하면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였던 여인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했던 가장 비천한 직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여인의 몸에서 보아스와 같은 훌륭한 아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아버지 살몬이 라합과 결혼한 것처럼 자신 역시 아버지와 똑같이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점에서 보면 살몬과 그 아들 보아스는 이방 여인과의 결혼을 대물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의 결혼이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물론이고 저들과 결혼한 라합과 룻의 인생도 누구보다 존귀한 인생을 살게 했습니다.
비천한 이방 여인으로 자기 어머니가 받아야 했던 상처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보아스가 룻이라는 비천한 이방 여인을 만나게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라는 것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에게 보여준 친절함과 배려는 비천한 이방 여인이었던 자신의 어머니 라합의 상처와 아픔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보아스와 룻의 만남이 주는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말입니다. 천국에는 쓰레기통이 없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그 어떤 것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고통이나 아픔 재난이나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어떠한 고난이나 아픔도 낭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은 인생의 고난이나 아픔을 선용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저와 아내가 한국 음성군 원남면 문암이라는 시골에서 목회할 때였습니다. 당시 아내가 먼지 알러지로 대단히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알러지가 무엇인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저는 아내의 고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겨울이면 수시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아내를 난방비를 축낸다면 무척이나 구박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와서 꽃가루 알러지에 걸리고 나니까 이게 보통 심각한 고통이 아니더라고요. 알러지 그거 뭐 별거 아니야 하는 사람 있으면 쫓아가서 당신이 알러지에 대해 뭘 아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심각한 알러지를 겪게 되자 비로소 아내의 고통이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러지로 고생하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알러지를 하나님께서 주신 고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겪게 되는 아픔이나 고통을 통해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가 나타날 때 비로소 대물림되고 남에게 전가되는 우리 인생의 고통이나 아픔을 끝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상처 많은 연약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가 겪었던 가장 큰 아픔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알코올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를 누가 가장 잘 도울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 같은 문제로 고통을 겪었다고 벗어난 사람이 가장 잘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을 누가 가장 잘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된 사람을 누가 가장 잘 위로할 수 있습니까?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이 가장 잘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은 단지 고통과 아픔이 아닙니다. 비슷한 고통과 아픔을 겪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사명이자 값진 아픔입니다.
중국 사자성어에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다.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이 서로를 가엽게 여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비슷한 말에도 홀아비 사정은 누가 가장 잘 안다고요? 과부가 가장 잘 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겪은 상처와 아픔을 비슷한 형편과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한다면 가장 강력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른 인생의 아픔을 함부로 낭비하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면서 겪은 모든 것을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단지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실수, 죄 그리고 우리의 상처까지 포함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겪은 불행한 일, 사업의 실패, 질병, 이혼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아픔까지도 까지도 선용하시길 원하십니다.
룻기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상처, 룻의 상처, 그리고 보아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선하게 사용하셔서 만든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겪은 상처와 아픔을 선하게 사용하시어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고 만들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라기는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의 여정에도 풍성히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