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룻기6-복은 쌓는 게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복은 쌓는 게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룻기 2:14-23

 

룻기 강해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복은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로 9번째 온라인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도 각 가정에서 같은 시간, 같은 찬양, 같은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유교회 모든 성도님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룻기 2장은 베들레헴의 유력자인 보아스가 비천하고 가난한 모압 여인 룻에게 베푸는 친절과 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신의 밭에서 마음껏 이삭을 줍도록 친절을 베풉니다. 추수하는 종들에게는 룻을 함부로 여기지 말고 잘 보호해 줄 것을 명령합니다. 종들이 떠온 물을 룻도 마실 수 있도록 합니다.


비천한 이방 여인에게 베푸는 보아스의 친절과 은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가 식사할 때에 룻을 초대하여 배부르게 먹도록 합니다. 룻이 식사를 마치고 다시 이삭을 주우러 가자 보아스가 종들에게 명령하기를 추수한 곡식 단을 일부러 조금씩 떨어뜨려 그녀가 많은 이삭을 줍도록 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날 하루 사이에 룻이 주운 보리가 한 에바였다고 성경은 기록하였습니다.


2:16-17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에바는 이스라엘 시대 곡식을 세는 단위로 바구니라는 뜻입니다. 한 에바는 한 바구니에 넣을 정도의 양으로 지금으로 치면 22리터 정도로 당시 어른 한 사람이 15일쯤 먹을 수 있는 곡식이었다고 합니다. 룻이 하루 사이에 주운 보리 한 에바는 그냥 밭에 떨어진 이삭만 주어서는 도저히 하룻만에 주울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양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대단히 세심하고 사려 깊게 친절과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추수한 곡식단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종들에게 일부러 곡식단을 떨어뜨려 룻이 이삭을 많이 그리고 쉽게 주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보아스는 가난하고 비천한 이방 여인 룻이 동정을 받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며 친절을 베푼 것입니다.


이것은 보아스에게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매우 중요한 영성입니다. 친절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매우 중요한 영성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친절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종교 행위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외식하는 가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친절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영성이며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이나 은혜를 베풀 때는 베푸는 자가 보아스처럼 세심하고 사려가 깊어야 합니다. 물론 받는 사람도 상대방의 선의를 좋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보아스처럼 세심하고 사려 깊지 않은 친절은 상대방에게 친절을 받는 느낌이 아니라 자칫 싸구려 동정을 받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친절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보여준 친절은 그야말로 세심하고 사려 깊은 탁월한 친절이며 영성입니다. 보아스는 어떻게 비천한 이방 여인 룻에게 이토록 세심하고 사려 깊은 친절을 베풀 수 있었을까요? 보아스가 누구보다 세심하고 사려 깊은 친절의 영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비천한 이방 여인 라합의 아들로 태어나서 비천한 이방 여인이 겪어야 하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생 출신의 이방 여인이 엄격한 종교적 규례와 편견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미국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힘들고 어려운 삶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무시하고 비천하게 여기는 이방 여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이방 여인 라합의 아들 보아스가 베들레헴 지역에서 누구도 함부로 여길 수 없는 유력자가 된 것입니다.


비천한 이방 여인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것이, 보아스에게는 대단히 큰 상처이며 아픔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자신이 자라며 받아야 했던 놀림이나 편견 때문에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비천한 이방 여인 룻에게 베푸는 사려 깊은 배려와 친절은 그가 겪은 아픔이 있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배려와 친절입니다.


대부분 경우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놀림이나 편견, 또는 상처나 아픔은 어른이 되어 그 사람을 독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자신이 자라며 겪어야만 했던 상처와 아픔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을 세밀하게 보살피고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보아스를 당대 최고의 유력자가 되는 복을 받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이 있습니다.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에게 베푸는 세심하고 사려 깊은 친절로 룻과 나오미가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의 은혜를 입은 룻과 나오미의 인생만 풍성해지지 않았습니다. 룻에게 사려 깊은 친절을 베푼 보아스의 인생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룻기가 주는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입니다.


만약 보아스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복을 자신만을 위해서만 썼다면 그는 그저 베들레헴 땅의 유력자로만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자신이 가진 풍요를 비천한 이방 여인 룻에게 베풀고 나누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비천한 이방 여인 라합의 아들 보아스가 다윗의 계보와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존귀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천한 이방 여인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계보와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존귀한 자가 된 것은 그녀 역시 자신이 보아스에게 받은 은혜를 시어머니 나오미와 나누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룻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기 위해 이스라엘 땅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밭에 나가서는 이삭을 주워 자신의 시어머니를 먹여 살렸습니다.


2: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여기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룻이 드린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은 먹고 남은 찌꺼기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보아스가 베푼 친절의 크기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먹을 만큼만 음식을 주면 그녀가 음식을 먹지 않고 다 남겨서 시어머니에게 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이 배불리 먹고도 남길 수 있도록 넉넉하게 베풀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을 통해 보아스가 베푼 사려 깊은 친절과 배려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그 즉시로 보아스를 축복합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룻에게 베풀었고, 룻은 자신의 시모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하나님에게 보아스의 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돌고 도는 걸 선순환이라고 합니다. 인생이 존귀해지려면 은혜가 돌고 도는 선순환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2:20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월마트나 코스코, 아마존과 같은 기업은 물건을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라 생산자에게서 물건을 사서 소비자에게 파는 유통하는 기업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업이 물건을 제때 소비자에게 팔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둔 물건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재고라고 합니다.


유통하는 기업이 제때 물건을 팔지 못하고 창고에만 쌓아두게 되면 기업 운영에 큰 부담이 됩니다. 팔지 못하고 창고에 가득 쌓아 둔 재고는 유통하는 기업으로서는 돈이 되는 물건이 아니라 비용만 축내는 물건입니다. 그래서 유통을 하는 기업에서는 재고를 없애기 위해 심지어 자신들이 산 가격보다 더 싸게 물건을 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Clearance Sale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팔리지 않는 물건이 재고로 싸여 창고나 매장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물건을 팔아버리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되어 안 팔리는 물건을 쌓아두는 것보다는 빨리 팔아버리고 새로운 물건을 파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은혜를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세상에 유통하고 나누는 곳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에 유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에 유통하고 나누기 위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전문용어로 전도라고 하거나 선교라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가 전도나 선교의 본질적인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자기 교회 교인 수 늘리는 것을 전도라고 여깁니다. 다른 종교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만을 선교라고 여깁니다. 개인적으로 전도나 선교에 대한 이런 식의 믿음이 기독교 신앙을 위기에 빠뜨렸다고 생각합니다. 전도와 선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세상과 사람에게 유통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전도나 선교는 세상에 유통해야 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기 교회나 자기 교단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로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회와 교인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진 교회와 교인 때문에, 세상이 예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받으려고만 하지 받은 은혜를 세상에 유통하거나 나누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받은 사랑을 유통하고 나누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려고만 하지 복을 유통하고 나누지 않습니다.


유통하는 기업이 물건을 제때 유통하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두면 재고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세상과 이웃에게 나누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재고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 그리고 복을 쌓아둔다고 이것이 교회와 성도를 복되게 하지 못합니다. 재고는 복이 아니라 짐입니다. 팔리지 않고 쌓인 재고가 기업을 넘어뜨리듯 나누지 않은 은혜와 복은 결국 교회와 성도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바다라 불리는 유명한 호수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해입니다. 이 두 호수는 모두 헐몬산이라는 곳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여 바다와 같이 큰 호수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헐몬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모여 만들어진 이 두 호수는 서로 전혀 다른 호수를 만들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물이 깨끗하고 물고기도 많아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축복의 호수로 불립니다. 반면 헐몬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갈릴리 호수를 거치고 요단강을 지나 사해에 이르면 이 물은 죽음의 물이 됩니다. 일반 바다의 염도가 3.5%인데 사해의 염도는 바다의 열 배쯤 되는 34.2%라고 합니다.


높은 염도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몸이 물에 뜨기 때문에 아무리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물에 빠져 죽지 않습니다. 심지어 물 위에 편안히 누워 신문을 읽을 정도로 염도가 높습니다. 이처럼 사해는 신비로운 현상을 만들어 내는 바다이지만 염도가 높아도 너무 높아 어떤 물고기도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바다의 이름을 사해라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나 사해 모두 헐몬산에서 내려온 같은 물로 이루어진 호수인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갈릴리 바다는 주위의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모여 큰 호수를 만들었지만 물을 모아두고 있지 않고 끊임없이 요단강으로 물을 흘려보냅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늘 깨끗한 물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해는 해수면보다 훨씬 낮은 418m의 지형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에서 흘러나온 깨끗한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지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지 못합니다. 다른 곳으로 물을 흘려보내지 않고 고이기만 하는 사해의 물은 결국 죽은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보기에는 대단히 신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해의 물은 사람이 마실 수도 없고 물고기가 살 수도 없는 죽은 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 주시기를 즐겨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복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복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복을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그리고 이웃에게 흘려보내시기를 원하십니다.


물을 흘려보내야 새롭고 신선한 물이 들어옵니다. 은혜도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복을 열심히 유통하고 나누어야 새로운 은혜가 그 인생에 부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기만 원하고 이웃을 향해 유통하고 나누지 않으면 마치 고인 물이 썩듯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도 썩어 악취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고 성도는 하나님께 받은 복을 쌓아두는 창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나누는 배급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에 대해 놀랍고 신비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아무리 나눈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하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은 나눌수록 더 채워지는 복입니다. 나눌수록 더 커지는 복입니다. 크기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용도 더 좋아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나누면 기쁨으로 나누기 시작하면 그 복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하여집니다. 그래서 복을 나누는 사람이 이전보다 더 존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을 나누지 않고 자기 혼자만 누리려고 쌓아두고 독식하기만 하면 복이 변질합니다. 자기 혼자만 쌓아두고 독식하려는 복에는 사람들의 미움과 시기와 원망과 불평과 불화가 더하여지기 때문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쌓아두기만 하면 복이 나중에는 인생을 괴롭히는 짐이 되고 맙니다.


목회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가끔 자기 인생이 불행하다며 하소연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저의 눈에는 그 사람이 왜 불행하게 살까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보아서는 도무지 그 사람이 하소연하는 만큼의 불행하게 여길만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은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받은 은혜나 복을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나누지 못하였으니까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복인 줄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공부해서 남을 도울 수 있어야 공부 잘하는 게 복인 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벌어 남들에게 베풀 줄도 알아야 내가 번 돈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약한 사람을 도와봐야 내가 누리는 건강이 복인 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니까 내가 누리고 가진 것으로 감사하지도 못하고 만족하지도 못하고 기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나누지 못하는 은혜와 복은 결코 우리를 복되게 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나눔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내 삶을 풍성하게 하고 존귀하게 만드는 복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보아스처럼, 룻처럼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비록 보아스가 베들레헴 땅에서 돈 많은 부자였다고는 하지만 그는 여전히 비천한 이방 여인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눔으로 그는 다윗의 계보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비천한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 룻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자신의 불행한 처지 때문에 시어머니를 원망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보다 비참한 처지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긍휼히 여겼으며 자신이 받은 은혜를 시어머니에게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다윗의 계보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라가는 그 누구보다 존귀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바라기는 보아스와 룻처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혼자만 독식하거나 쌓아두려고 하지 않고 세상과 이웃을 향해 나누며 살아감으로 날마다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새롭고 신선하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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