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십시오.
룻기 2:17-23
오늘은 룻기 강해 일곱 번째 시간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십시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로 벌써 10번째 온라인 예배를 드립니다. 얼마가 더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해서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튜브 통계를 보면 라이브 예배에 참석하는 분들이 갈수록 조금씩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라이브 예배가 녹화된 영상이 유튜브에 있으니까 나중에 편한 시간에 예배드려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녹화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 순서를 지켜가며 예배에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교인이 순서를 Skip하면서 원하는 부분만 잠깐 스치듯 보고 맙니다. 그리고는 예배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그저 예배를 구경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고 구경해서는 예배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온라인 라이브 예배를 드리기에 장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녹화된 영상이 아니라 라이브 예배를 고집하며 라이브로 중계하며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교회 모든 성도님이 같은 시간에 모여, 같은 찬양을 부르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말씀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비록 우리가 각 가정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지만, 이 모든 순서가 함께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예배를 드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 번째 드리는 자유교회 온라인 라이브 예배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자유교회 모든 성도님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은총이 충만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을 세 명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 그리고 라합의 아들 보아스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이 세 사람의 인생은 그야말로 우여곡절로 가득한 상처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룻기는 누구보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세 사람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존귀한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여기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룻기를 얼핏 읽으면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역사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잘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저들의 인생에 개입하시어 은밀하고 세밀하게 저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룻기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야말로 룻기를 읽으며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하는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이라 믿습니다.
그렇다며 도대체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란 리의 인생과 현실에 개입하시어 우리를 다스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미합니다. 비록 룻기에는 신비한 기적이나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의 말씀은 룻이 보아스의 은밀한 친절과 배려로 보리 한 에바를 주웠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룻이 주운 보리 한 에바는 22리터쯤 되는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당시 여인들이 온종일 열심히 이삭을 줍는다고 해도 겨우 하루 먹을 양식을 줍는 것이 최대였습니다. 하지만 룻이 주운 보리 한 에바는 결코, 여자가 하루에 주울 수 있는 양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보아스의 보이지 않는 친절과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룻은 자신이 온종일 주운 보리 한 에바와 점심 식사 때 보아스가 넉넉히 준 볶은 곡식을 모두 시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풍성한 곡식을 받은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묻습니다. 나오미의 질문에 며느리 룻이 그날 일어난 일을 모두 이야기하며 자신이 오늘 일한 밭이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룻기 2: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룻에게서 보아스의 이름을 듣자 나오미의 놀라운 감탄과 함께 그를 축복하는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미처 깨닫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며느리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된 것과 이방 여인 룻에게 보아스가 은밀하게 베푸는 은혜가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룻기는 룻과 보아스의 처음 만남을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로 소개하였습니다. 룻기가 룻과 보아스와의 첫 만남을 소개하는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한 메타포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연히’와 ‘마침’은 운이나 재수가 좋아서 이방 여인 룻이 마음씨 좋은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으로 여깁니다.
룻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하지만 성경에서 우연히’와 ‘마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요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룻기가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우연히’와 ‘마침’이라고 표현한 것은 여기에는 사람의 계산이나 계획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나타내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신비한 이적이나 계시로 직접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대부분 경우 하나님께서는 룻기에서처럼 잘 드러나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깨닫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영성이며, 이것을 체험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실력이라 믿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이 신비한 이적이나 은사가 나타나야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 착각하거나 오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에 대해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신비한 이적이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신비하고 놀라운 이적에만 연연하는 것은 결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룻이 보아스를 만나기 전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위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나오미는 하나님을 심각하게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겪는 모든 비극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벌하시고 괴롭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도우시고 회복시키는 분이라 믿지 않고 자신을 징벌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분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룻기 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비록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것이 자신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비참한 처지가 되어 돌아온 자신의 모습 때문에 깊은 좌절과 자기 비하에 빠졌습니다.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나오미의 좌절과 절망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룻기 2장의 말씀은 나오미의 절망과 영적 침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줍니다. 며느리 룻이 먹고 살기 위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이삭줍기가 온종일 추수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녀야 하는 고된 일이라고는 하지만 가난한 여자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나이 든 여자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모압 출신 룻에게는 이스라엘 베들레헴 땅은 모든 것이 생소한 이방 땅입니다. 게다가 젊은 과부가 밭의 일꾼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오미는 이삭을 주우러 나간다는 며느리 룻과 함께 나갔어야 마땅해 보입니다. 비록 나이 들어 이삭을 줍기가 힘들다면 곁에서라도 룻을 지켜보기라도 하는 것이 마땅해 보입니다.
하지만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다고 하자 나오미는 룻을 따라나서지 않고 혼자 보냅니다. 룻을 딸처럼 여겼던 나오미는 왜 룻을 낯선 곳에 혼자 보냈을까요? 나오미가 나이가 너무 많아 힘이 없어서도, 육신의 병이 들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오미는 집 밖에 나와 베들레헴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베들레헴 땅에서 부유하게 살던 자신이 다른 사람의 밭에 들어가 이삭을 줍는 초라한 모습을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당장 굶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 앞에서 이삭을 줍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깊은 마음의 병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출신의 며느리 룻을 낯선 곳에 혼자 내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심각하게 오해했던 나오미가, 자기 비하와 심각한 영적 침체에 빠졌던 나오미가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하나님 손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비로소 눈을 뜨게 됩니다. 며느리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고, 마침 보아스를 만나서는 큰 은혜를 입은 것이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임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의 이야기를 듣고는 보아스를 축복하는 2장 20절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매우 놀라운 축복과 고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오미는 단순히 보아스라는 친절한 사람에게서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해 축복하기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룻기 2: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라는 나오미의 고백은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쓰는 표현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산 자에게만 은혜를 베풀 수 있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풀 수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까지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보아스를 향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오미는 비로소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역사하시고 섭리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밀하신 섭리라는 나오미의 깨달음은 보아스가 우리 기업을 무를 자라는 고백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또한, 보아스는 우리 기업을 무를 자라는 나오미의 선언은 룻기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룻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히브리어 ‘고엘’을 번역한 것으로 영어 성경은 ‘kinsman-redeem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엘’이라는 히브리어는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총 10번이 나오는데 그중 9번이 룻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룻기 2장 20절에 처음 나온 고엘이라는 단어가 룻기 3장과 4장에는 무려 8번이나 반복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엘이야말로 룻기가 가르치려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엘을 모르고서는 룻기에 나타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업 무를 자, 히브리어로 ‘고엘’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사람은 단지 땅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만 부여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땅을 함부로 팔 수 없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인 땅을 어쩔 수 없이 팔아야만 하는 일이 반드시 생기게 됩니다.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기업을 팔아버린 가난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 사람과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사서는 땅을 판 가난한 사람에게 되돌려 주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기업 무르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대신해서 팔아버린 땅을 사서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 친족을 기업 무를 자, 히브리어로는 고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레25: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율법이 가르치는 고엘의 의무는 단순히 땅만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당한 피해를 본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져야 했으며,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끊어진 대(代)를 이어주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친족의 죄값을 대신 받아야 했습니다. '고엘의 자격'으로서는 혈연관계에 있어야 했으며, 강제가 아니라 자원해야 했으며, 고엘로서 책임을 감당할 만한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만 해당하였습니다.
고엘의 사명과 책임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탱하고 유지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율법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고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셨습니다. 물론 고엘의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선 많은 희생과 손해가 따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세상에 드러낸 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룻기입니다. 비천한 이방 여인 라합의 아들 보아스가 다윗의 계보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가는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룻기는 이것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기를 보아스가 나오미 가문을 위한 고엘의 사명과 책임을 감당했기 때문이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마침 보아스를 만나 은혜를 입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룻과 자신을 회복시키시기 위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보아스를 향해 우리의 기업을 무를 자라는 나오미의 선언입니다.
나오미는 룻이 들려준 보아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오해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벌하시고 괴롭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나오미가 룻에게 어떻게 당부합니까? 다른 밭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룻기 2:22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손길을 알아보는 영적인 민감함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과 인생에 개입하시면 역사하시고 섭리하십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려운 위기 가운데서도 좌절하고 낙심하여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은행의 이자율 변동에는 민감하고, 그날의 주식 변동에는 민감하고, 내가 사는 집값의 변동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영적인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여기저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하여, 우리 주변 이곳저곳에 던져 놓으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는 너무나 무감각합니다. 이것은 주변 환경에 의해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게 만드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며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민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에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보면서도, 들판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르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를 보면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얼마나 민감하셨는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라기는 오늘 예배를 드리는 자유교회 성도님에게 자유교회 공동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영적인 민감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고 있는 Covid-19으로 인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낙심하기보다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에 대한 영적 도전으로 삼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