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라.
룻기 3:1-6
오늘은 룻기 강해 여덟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열한 번째 온라인 라이브 예배입니다. 지난 11주 동안 힘든 시간을 잘 견디고 버티어 오신 자유교회 성도님을 격려하고 환영합니다. 오늘도 함께 드리는 온라인 예배를 통해 이 힘든 시기를 넉넉히 견디고 하시고 능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길 축복합니다.
지난주 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라.”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다시 한번 설명을 하자면, 신학에서 하나님의 섭리란 우리 인생과 현실에 개입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뜻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분이신 것처럼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고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섭리 역시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의 말씀은 사람에게 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모세는 불안했습니다. 정말 자신이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함께하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자신에게 직접 보여달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3: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자신에게라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심치 않고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간절한 부탁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출애굽기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보여달라고 간청하는 모세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누구라도 심지어 모세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아무리 모세라고 해도 결코, 살 수 없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강렬하게 빛나는 태양을 맨눈으로 보면 어떻게 됩니까? 눈을 다치고 심지어는 실명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얼룩진 인간이 선하심 그 자체인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볼 수 없습니다. 죄로 얼룩진 인간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 보길 원하시는 모세의 간절한 부탁을 완전히 거절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모세는 비록 하나님은 얼굴을 볼 수 없지만, 모세 앞을 지나가신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모세가 문자 그대로 실제 하나님의 등을 본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매우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출애굽기 33:22-23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등을 보려면 우리가 어디에 서 있어야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뒤에 서 있어야 하나님의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등을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등’은 우리보다 앞서 행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앞을 지나갔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 보았다는 것은 당장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고 나를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떠나온 고향 베들레헴이 오랜 흉년을 끝내고 보리 추수할 즈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으며 여전히 먹고 살길은 막막했습니다. 심각한 자기비하와 연민에 빠진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따라온 며느리 룻이 낯선 땅에서 이삭을 주우러 나간다고 해도 함께 따라가서 돕지도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돌아온 룻이 보리 한 에바와 볶은 곡식을 내놓자 나오미는 놀라며 묻습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시어머니의 질문에 룻이 대답합니다. 우연히 어떤 사람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는데 마침 그 밭의 주인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주인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세심하고 사려 깊은 친절과 은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그 주인의 이름은 보아스였다고 말합니다.
며느리 룻의 입에서 보아스라는 이름이 나오자 비로소 나오미는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어쩌다 운이 좋아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자신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의 한 명으로 죽은 남편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나오미는 이 모든 것이 비참한 처지에 놓인 자신과 룻을 도우시고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토록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엘리멜렉 가정이 모압 땅에 가서 그토록 비극적인 일을 겪게 하신 것을 미리 막지 않으셨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이 모압 땅으로 가지만 않았어도 굳이 기업 무를 자를 만나게 하고 그를 통해 기업을 무르게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미리 막을 수 있을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칫 비참한 지경에 놓인 나오미와 룻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마치 뒷북을 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뒷북을 치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늘 우리가 뒷북을 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조금 고민하고 기도하는 척하고는 제멋대로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때 가서야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며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꼭 그러했습니다.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닥쳤을 때 모압 땅으로 도망갔던 엘리멜렉의 선택과 결정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선택과 결정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의 왕이라는 이름의 엘리멜렉이 흉년을 피한다며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모압 땅으로 도망간 것은 의도적이며 고의적인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물론 엘리멜렉 가정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징계하시고 벌주시려고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 말룐과 기론을 모압이라는 이방 땅에서 죽게 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나오미의 오해였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가정이 모압 땅으로 피신 한 것이 잘못한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죄책감 때문에 자신이 겪는 고난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로 심판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서 보아스라는 이름을 듣고는 비로소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오해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빈손으로 베들레헴에 돌아오게 하신 것은 징계도 아니고 자신을 괴롭게 하려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위로하시고 회복시키고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도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 나오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오미의 변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룻기 3장 1절의 말씀입니다. 룻기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오미를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온 며느리 룻의 비참한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는 룻을 돕기로 작정입니다.
룻기 3: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나오미는 결코 나쁜 시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비참한 몰골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 비하와 연민에 빠졌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진 나오미는 며느리 룻의 안타까운 처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 땅까지 자신을 따라와서는 자신을 돌보기 위해 낯선 땅으로 이삭을 주우러 나가는 룻을 혼자 내보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비하나 자기연민에 빠지게 되면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이나 고통은 보지 못합니다. 오로지 자신이 겪는 고통과 아픔만 크게 보이고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욱더 깊은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극복할 길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통해 그리고 그녀가 만난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자 비로소 나오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져서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만 불쌍히 여겼던 나오미가 젊은 며느리 룻이 겪는 비참한 처지가 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합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나오미의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오미가 말한 “안식할 곳”은 그냥 어디 쉴만한 장소라는 뜻이 아닙니다. 특별한 의미를 내포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나오미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며느리 룻의 결혼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새로운 남편을 만나게 해서 가정을 이루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오미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며 결정입니다. 나오미에게 며느리 룻은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며느리를 결혼시켜 새로운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은 어쩌면 나오미에게는 대단한 손해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한 나오미는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에 순종합니다.
며느리 룻을 결혼시켜 안식을 누려며 복되게 살게 하려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뜻은 단호했고 분명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룻기 2장 2절로 4절까지의 말씀은 며느리 룻이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나오미의 권고입니다.
룻기 3:2-4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지금의 도덕이나 윤리기준으로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가르쳐 준 것은 대단히 부적절해 보이는 권고입니다. 나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돈 많고 나이 많은 부자를 유혹하라는 비윤리적인 권고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나오미가 살던 시대의 문화와 율법에 따르면 며느리 룻에 대한 나오미의 권면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땅한 권리를 찾기 위한 정당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율법에 따르면 아들이 없이 아내만 남기고 죽은 사람이 있으면 죽은 사람의 형제가 과부가 된 아내와 결혼하여 혼자 된 여자를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자식을 낳으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죽은 형제의 자식이 되어 죽은 아버지의 대를 잇고 재산을 상속받게 했습니다. 이것을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 제도라고 합니다.
신명기 25:5-6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과부가 된 여인을 보호하고 죽은 이를 대를 잇게 만드는 일종의 사회 보장 제도로 친형제 관계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율법이었습니다. 만약 형제가 이것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면 과부 된 여인은 장로들에게 고발하여 성문 앞에서 열리는 법정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과부 된 여인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형제의 신을 벗기고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저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을 향해서는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르게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불명예였습니다.
신명기 25:9-10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만약 계대결혼을 할 친형제가 없는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친족 가운데서 이 책임을 맡게 했습니다. 이 사람을 기업을 무르는 자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친족에게 주어진 고엘의 의무와 책임은 친형제의 경우처럼 반드시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강제적이기보다는 대부분 자발적으로 자원하는 경우에만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나오미가 보리 추수를 마치고 잔치가 벌어지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며느리 룻을 곱게 단장하여 보낸 것은 보아스를 유혹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나오미가 술수에 능하며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믿음 없는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보아스를 만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깨달은 나오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나오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용기를 낸 것입니다. 보아스에게 자기 며느리 룻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이 있는 여인임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며느리 룻을 가르치는 나오미의 권고는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까지 하나님께만 맡기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있으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내가 책임져야 할 것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은 반드시 내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입니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시어머니 나오미의 권고를 들은 룻이 어떻게 했습니까? 룻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시어머니의 권고를 듣고는 두말없이 그대로 순종합니다. 룻기는 룻의 순종을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순종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살리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룻기 3:5-6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 이 세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룻은 이방 땅 베들레헴 땅까지 시어머니를 따라와서는 이삭을 주우며 시어머니를 먹여 살렸습니다. 나오미 또한 진심으로 자신의 며느리 룻이 잘 되기를 바라고 도왔습니다. 그리고 보아스 역시 세심한 배려와 친절로 비천한 모압 여인 룻을 도왔습니다.
룻기는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두 사람을 통해 전달됩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이기적인 존재인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우리가 남을 도우며 살 때만 비로소 우리가 행복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를 복되게 도우므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길 원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하며 그 사람이 복 받기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만나는 우리가 복을 받고 은혜받을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깨달음과 순종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에 반드시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