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가정생활
룻기 3:1-6
오늘로 열두 번째 온라인 라이브 예배를 드립니다. 먼저 계속되는 Covid-19의 위협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잘 견디고 버티어 오신 자유교회 성도님을 위로하고 환영합니다. 비록 오늘도 각 가정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지만 같은 시간 같은 찬양과 같은 말씀으로 함께 드리는 온라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이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요즘은 한주 한주가 힘들지만 지난 한 주는 그 어떤 때보다 힘든 한 주를 보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Covid-19으로 인한 확진자와 사망자가 좀처럼 줄어들 기세가 없는 와중에 백인 경찰의 잔인한 진압으로 인해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비참하게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미 전역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집회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시애틀에서도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한 시위가 토요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한 시위자의 인터뷰를 듣는데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시위자는 바이러스로 죽나 경찰에게 맞아 죽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죽을 때 죽더라도 자신의 억울한 심정이라도 호소하고 싶어서 시위에 나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평등하게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식의 차별도 허용하거나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종은 물론이고, 성별로, 재산으로, 외모로, 출신으로, 종교로, 심지어 성적 취향으로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식의 차별이라도 모든 차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창조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조지 플로이드의 안타깝고 억울한 희생을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안타깝고 억울한 희생에 관심을 가지고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상에 만연한 차별과 불평등을 조금이라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룻기 강해 아홉 번째 시간으로 지난주와 같은 룻기 말씀으로“슬기로운 가정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Stay at Home order가 내려졌고 이로 인해 가정에서 지내야 하는 시간이 평소보다 수배는 많아졌습니다. 덕분에 일부 몇 가정은 이전보다 가족관계가 더 좋아졌다는 가정도 있지만 대부분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슬기로운 가정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남편과 두 자식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깊은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에 빠졌습니다. 자기비하와 연민에 빠진 나오는 자신을 돌보기 위해 모압을 떠나 낯선 땅 베들레헴까지 따라온 며느리 룻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통해 기업 무를 자 보아스의 이름을 듣고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오해했던 나오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자 비로소 지금까지 자신을 옭아매었던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에서 벗어난 나오미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주었던 며느리 룻에게 안식할 곳을 구하여 그녀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지금까지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돌본 며느리 룻의 안타까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룻기 3: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켜 가정을 꾸미도록 작정했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나오미에게 며느리 룻은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키는 것은, 어쩌면 나오미에게는 대단한 손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나오미는 며느리 룻이 안식하며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로 작심한 것입니다.
룻기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고부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딸처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룻 역시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 자기 고향 모압을 떠나 낯선 땅 베들레헴까지 따라왔습니다. 베들레헴에 와서는 매일같이 이른 새벽에 밭에 나가서는 이삭을 주우며 시어머니를 먹여 살렸습니다. 그야말로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자신이 아무리 룻을 딸처럼 여겨 사랑하고 아낀다고 해도 젊디젊은 며느리 룻이 자신과 살아서는 참된 안식을 누릴 수도 없고 복되지도 못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딸처럼 여기는 며느리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킴으로 그녀에게 가정이 주는 참된 안식과 복을 누리게 하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가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위대한 안식처이며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오늘 설교는 룻기 말씀에 대한 설교라기보다는 가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 이 설교는 결혼식 주례를 하게 되면 주례사로 사용하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준비하였던 설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몇 번의 주례를 설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예상치 못한 사정이 생겨서 한 번도 결혼식 주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례사로 생각했던 말씀을 더는 아껴두지 않고 오늘 설교하려고 합니다.
Covid-19으로 인해 우리 대부분의 생활이 가정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엄격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시하는 중에도 편한 마음으로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 밖에는 없습니다. 또한, 피곤하고 지친 육신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도 가족들이 있는 가정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여기에 대해 잘 동의가 되지 않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이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처요 복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고통과 저주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본래 축복과 저주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위대한 안식처이며 은총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가장 고통스럽고 저주받은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안식처와 복이 되지 못하고 고통과 저주가 된다면 그것은 가정을 주신 하나님 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과 저주의 가정을 주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가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정이 고통과 저주의 가정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제대로 잘 관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총과 복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람에게 맡기신 것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신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 만물을 사람에게 주시고는 사람이 잘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이 잘 다스리지도 못하고, 소중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세상은 우리를 해치는 위험한 곳이 되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잘 다스리고 사용하고 관리할 때만 복이 되고 은총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복을 혼자만 독식하고 독점하려고 하고 제멋대로 사용하면 그 복이 변하여 고통이 되고 나중에는 저주가 됩니다.
가정은 분명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안식처이며 복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가정이 하나님이 주신 안식처나 복이 되기보다는 고통과 저주가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가정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소홀하며 함부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결혼만 하고 자식만 낳으면 저절로 가정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일보다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고 관리하고 투자하여야 하는 곳이 가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직장이나 교회에서 여러분이 보여주는 수고나 노력보다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분명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구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이 가정이라고 한다면 신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가정이 있고 교회가 있는 것이지, 교회가 있고 가정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보다 항상 우선 하는 것은 가정입니다.
저는 목사라는 직업으로 먹고살지만,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만 목회하지는 않습니다. 먹고사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었다면 목사 말고 다른 직업을 가졌을 것입니다. 저에게 목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사명이라 믿기에 하는 것이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 준비하고 아침 묵상을 준비할 때, 그리고 교우들을 심방하고 상담하고, 기도해 줄 때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누립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저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는 목사라는 사명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의 가정입니다. 자유교회 교인들에게는 참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에게는 교인들이 부르는 목사라는 호칭보다 제 아내가 부르는 남편이라는 호칭이 더 중요합니다.
목사라는 호칭보다 아빠라는 호칭이 더 중요합니다. 목사라는 호칭보다 제 부모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저에겐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해당하는 영적 원리이며 사명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한 제일의 사명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일이라도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아무런 노력이나 수고도 희생도 없이 저절로 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절로 잘되는 가정은 없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여러분의 사업보다도 심지어 교회보다도 더 많은 수고와 노력과 희생 그리고 섬김이 필요한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을 잘 다스리고 섬기기 위해서는 가정이 무엇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지를 우선 알아야만 합니다. 가정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이 무엇입니까? 가정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하여 형성되고 유지됩니다. 가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는 세 가지입니다. 가정은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그리고 형제 관계를 통하여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관계들을 잘 유지할 때 아름다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정을 통해 맺는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정을 통해 맺는 여러 관계들을 잘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정을 이루는 근본이 되는 관계를 구별하여 관계의 우선순위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가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여러 관계 가운데 가정을 이루는 근본 관계를 구별하여 관계의 우선순위를 지켜야만 가정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가정이 바로 서야 비로소 가정이 안식처가 되고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가정을 이루는 세 가지 관계 가운데-부모자식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어떤 관계가 가정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가정이 위기를 겪는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이 가정을 이루는 근본 관계인지를 놓쳐버리기 때문에 많은 가정이 위기를 맞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가정이 복이 되지 못하고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심지어는 고통이 되고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가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이 되는 관계는 바로 부부관계입니다. 성경은 가정의 출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4절입니다. 여기서 부모를 떠난다는 표현은 부모를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가정의 시작은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니라 부부관계라는 것입니다. 부부관계가 있어야 부모 자식 관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말씀은 가정에 대해 매우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많은 가정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가정이 부부관계가 가정의 최우선 순위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이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너무나 많은 가정이 어려움에 빠져서 고통스럽게 겨우겨우 근근이 살아갑니다.
많은 이들이 결혼식이 끝나는 시간이 행복 끝 불행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고도 말합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말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데 막상 결혼해서 살아보면 결혼생활이 기대하고 바랐던 것처럼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사건건 부딪치며 싸울 일만 많아집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 하나를 꼽는다면 남편이 부모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행이 큰 몫을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기 위해선 부모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를 떠나라는 말씀은 부모를 외면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가장 중요한 관계는 부모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아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결혼하는 여자보고 부모를 떠나라 말씀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바뀌기 때문입니다. 여자들 대부분은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 부모에게 남편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결혼해도 여전히 부모가 우선인 남편들이 많습니다.
아내는 결혼하면 평생 남편 생일을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들은 어떠합니까? 아내 생일을 까맣게 잊고 사는 남편들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것을 마치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건 결코 자랑이 아니라 지지리도 못난 일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남자일수록 자기 어머니 생일은 잊지 않고 꼭 챙깁니다. 그러니 가정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도 남자 못지않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 여자는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선순위가 부모에게서 남편에게로 바뀝니다. 하지만 여자가 자녀를 낳게 되면서부터는 우선순위가 남편에게서 자녀에게로 옮겨갑니다.
결혼 후에도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남자도 문제가 있지만, 모정이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위치를 포기하고는 어머니로만 살려고 하는 여자에게도 남자 못지않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정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자들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막상 결혼해서 살아보니 남편이 맘에 들지 않습니다. 뜻대로도 되지 않고 틈만 나면 딴짓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편 대신 배 아파 낳은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물론 자식을 키우며 얻는 기쁨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며 감동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편을 통해 누리는 기쁨을 대신할 수 없으며 대신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대리만족입니다. 가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남편은 아내에게서, 아내는 남편에게서 얻어야 합니다. 그다음이 자녀이고 부모입니다.
가정에서 관계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면 어떤 가정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부부관계가 깨어지면 가정은 더는 하나님이 주신 안식처나 복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가정은 고통이 되고 무덤이 됩니다. 심한 경우 가정이 인생의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위해 안식할 곳을 찾아 복되게 한다는 말씀에는 매우 중요한 가정의 영적 원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안식할 곳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면 연약한 우리의 육신이 안식할 곳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안식처이며 복입니다.
하지만 저절로 우리의 가정이 안식처가 되고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우선순위에 순종할 때만 가정이 안식처가 되고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우선순위를 잘 지키고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이 안식처가 되어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최고의 복을 누리며 살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