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룻기10-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책임

룻기 3:7-13



오늘로 열세 번째 온라인 라이브 예배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잘 버티어 오신 자유교회 성도님들을 위로하고 환영합니다. 특별히 다음 주부터는 많은 영역에 걸쳐 경제활동이 재개됩니다. 우리 교회도 중단하였던 일을 시작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안전 문제에 특별히 주의하시어 힘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룻기 강해 10번째 시간으로 룻기 37절로 13절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각 가정에서 따로따로 온라인 예배로 드리지만 같은 시간, 같은 찬양, 같은 말씀으로 함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이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이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를 만나고 그로부터 예상치 못한 친절과 은혜를 입은 것이 단지 운이 좋아, 재수가 좋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자였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몰락해 버린 자신의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나오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즉각적으로 행동합니다. 딸처럼 여기는 며느리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키기로 합니다. 나오미는 룻에서 권면하기를 곱게 단장하고는 추수가 끝나고 축제가 벌어지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가서는 그가 눕는 곳을 찾아가서는 그의 발밑에 누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룻기 3:3-4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지금의 윤리기준으로만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의 권고는 대단히 부적절해 보입니다. 마치 나쁜 시어머니가 젊고 예쁜 며느리를 앞세워 돈 많고 나이 많은 부자를 유혹하라는 비윤리적인 권고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권고는 자신과 룻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려는 강력한 의지와 책임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또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나 뜻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감나무 아래 누워서는 저절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려서는 안 됩니다.


이삭 줍는 룻에게 보아스라는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그 사람을 붙잡는 것은 전적으로 나오미와 룻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너무나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하나님의 섭리나 뜻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모든 일을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자신들이 한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나 믿음이 교회에서는 대단히 신실한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책임 전가와 책임 회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지 않고 사람에게 맡기어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이유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사명이자 존재의 목적이며 이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세상을 하나님께 떠넘기고는 하나님께서 다 책임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치 대단히 신실한 믿음인 양 착각하며 신앙 생활합니다.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신앙과 신학은 인간의 불순종과 무책임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조차 하나님께 떠넘기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오로지 하나님께만 달린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에게 주어진 책임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도 하나님께서 하실 일도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하고 오해하면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믿음이 되고 맙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가르쳐 준 대로 행합니다. 추수가 끝나고 성대한 축제가 벌어지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보아스가 누운 곳에 가서는 그의 발끝에서 이불을 들고는 누웠습니다. 보아스가 한참을 자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일어나 보니 웬 여자가 자기 발끝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보아스가 놀라며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깜깜한 밤중에 당황하며 묻는 보아스의 질문에 룻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왜냐하면,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


룻기3: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룻의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얼핏 보면 룻의 말은 보아스에게 동침하자고 유혹하는 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보아스에게 동침하자고 유혹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보아스가 이삭 줍는 룻을 처음 보았을 때 룻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모압 출신의 룻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칭찬하고 축복했습니다. 보아스는 이미 룻에 대한 소문을 들어 그녀가 얼마나 현숙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른 새벽부터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해 이삭을 주우러 나온 룻을 보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습니다.


룻기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보아스는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보호받으러 온 룻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기를 축복했습니다. 이스라엘 종교문화에서 여호와의 날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미하는 메타포였습니다. 그런데 룻이 보아스에게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말할 때 옷자락은 여호와의 날개와 똑같은 히브리어 단어를 카나프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에 나를 여호와의 날개로 보호하여 주실 것을 축복하였으니, 이제 당신의 옷자락(날개)로 자신을 보호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룻은 왜 그토록 당당하게 보아스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까? 보아스는 자신의 기업 무를 자 즉 고엘이었기 때문입니다. 고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맡기신 책임입니다. 한 마디로 룻의 보아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책임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롯의 당돌해 보이는 요구에 보아스가 어떻게 답합니까? 룻이 요구하는 대로 자신이 그대로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왜 룻의 원하는 대로 그대로 행할 것을 약속하였습니까? 보아스는 룻에 대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지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마땅한 사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룻기3: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더 나아가 보아스는 룻이 당돌해 보이는 요구가 단지 자신의 팔자를 고치기 위한 욕심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부탁하는 룻의 요구가 죽은 자신의 남편과 시어머니를 위한 그녀의 인애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룻기3: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보아스는 당돌해 보이는 룻의 행동이 얼마나 대단한 희생이며 용기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며 그녀를 칭찬한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칭찬한 인애는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긍휼, 자비, 사랑을 뜻하는 단어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또는 책임지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사랑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혼동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좋아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 둘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얼핏 대단히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고양이가 열심히 쥐를 쫓아다니는 것은 쥐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고양이가 왜 쥐를 좋아합니까? 고양이에게는 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쥐가 자신의 먹잇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상대방이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거나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은 대단히 주관적이며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오직 자신만을 기준으로 한 자신만의 느낌입니다.


그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좋아하는 기준을 내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두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힘이 들더라도, 비록 내가 불편하더라도, 비록 내가 손해가 되더라고 상대방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이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입니다.


룻기는 사랑의 매뉴얼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 룻기가 보여주고 있는 사랑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룻기는 기업 무를 자 즉 고엘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고엘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성경 구절이 총 10절이 있는데 그중 9절이 모두 룻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룻기는 고엘을 가르치는 성경이라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룻기 312절과 13절을 보면 두 구절에 기업 무를 자라는 고엘이라는 단어를 무려 6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 무를 자에 함께 반복하여 따라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책임이라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에 대해 사람이 그 책임을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룻기 3:12-13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기업 무르기는 연약한 인간을 돕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재난이나 재앙으로 인해 한 가정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막고, 무너진 가정의 회복을 돕기 위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룻기를 통해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룻기는 기업 무르기와 인애, 고엘과 헤세드로 가득한 말씀입니다. 고엘과 헤세드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사랑입니다. 룻기처럼 사람이 사람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할 때, 크리스천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할 때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안식처이자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정을 통해 안식을 얻고 복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을 안식처가 되게 하고 복이 되도록 만드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가정이 안식처가 되고 복이 될 수 있습니까? 가족을 자신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상대방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식을 부모를 위해, 남편은 아내를 위해, 아내는 남편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시는 사랑만이 우리의 가정을 안식처가 되게 하고 복이 되게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은 책임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책임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를 책임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을 책임져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가 보여준 책임의 사랑이 저들의 인생을 존귀하게 한 것처럼 책임을 다하는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존귀하게 만들어가기를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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