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쉬지 아니하리라
룻기 3:14-18
열네 번째 온라인 라이브 예배를 드립니다. 계속되는 Covid-19의 위협과 이로 인한 심각한 경제 위기 중에도 또 한 주를 잘 버티어 오신 자유교회 성도님들의 인내와 수고를 진심으로 격려하고 환영합니다. 오늘도 같은 시간 같은 찬양과 같은 말씀으로 함께 드리는 온라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이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룻기 강해 열한 번째 시간으로 “그가 쉬지 아니하리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예배와 말씀을 통해 또 한 주간을 능히 이겨낼 새 힘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길 축복합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권고대로 축제가 벌어지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을 찾아갔습니다. 룻은 보아스가 술에 취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는 보아스의 발끝에 누웠습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보아스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보아스의 질문에 룻이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입니다. 나를 당신의 옷자락으로 보호하여 주옵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은 우리를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할 기업 무를 자 즉 고엘이니 고엘로서 책임을 져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룻이 보아스에게 자신과 결혼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룻기3: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당돌해 보이는 룻의 행동이 지금 우리에게는 대단히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에 따르면 과부가 된 여인이 기업 무를 자에게 결혼을 부탁하는 것은 과부 된 여인이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물론 보아스에게도 룻이 요구하는 책임을 거절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비록 룻의 죽은 남편과 친척 사이이기는 하지만 친형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계대 결혼의 의무는 형제 관계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였지만 친척 관계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이 요구하는 대로 그대로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룻이 요구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지는 것은 보아스에게는 손해가 막심한 일이었습니다. 엘리멜렉 가문이 팔아 버린 땅을 사서는 나오미에게 되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또한,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자식은 보아스의 자식이 아니라 나오미의 자식이 되어 엘리멜렉의 가문을 잇는 사람이 됩니다.
룻기3: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이처럼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무르는 자 고엘이 되는 순간 보아스가 얻는 것보다는 손해 보는 것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보아스는 룻이 요구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그대로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보아스는 왜 룻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한 것일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여인 룻조차도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기 위해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고향을 떠나 낯선 땅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보아스가 자신에게 주어진 고엘이라는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마땅해 감당해야 하는 자신의 책임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룻기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기업 무를 자에 대한 말씀은 단지 경제적 위기에 빠진 사람을 도와 경제적 회복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업 무를 자라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과 가정 그리고 우리가 맺는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덕목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영성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사랑 그 자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수없이 많은 책과 영화와 노래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제를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단연코 사랑입니다. 세상이 만들어 낸 수많은 책과 영화와 노래가 사랑에 대해 말하고 노래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랑에 관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사랑에 대해서 배우고 훈련하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사랑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심각한 사랑에 대한 오해이며 착각입니다. 왜 이런 오해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까? 사랑을 의지와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나 느낌의 문제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과의 관계에서 좋아하는 감정이나 느낌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좋아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나 느낌은 활활 타는 장작과 같습니다. 활활 타는 장작이 하루가 지나면 싸늘한 재로 변하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뜨겁게 불타올랐던 감정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식어버립니다. 또한, 오늘 좋았다가도 내일 나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오늘 나쁘다가도 내일 좋아지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고 느낌입니다. 감정은 사람의 호르몬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화학 현상입니다. 호르몬이 사라지면 연기와 같이 사라지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며 느낌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이 감정에 의한 것이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누가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친절과 배려를 베풀 수 있겠습니다.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는 선한 의지이며 믿음입니다.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오해와 착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는 문제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둡니다. 이런 사람을 관종이라고 합니다. 관종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지 않습니다. 관종은 필시 가식적이며 외식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받는 것은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지, 사랑을 받으라고 가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우리를 더 복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행20:35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오해와 착각은 사랑을 나에게 달린 문제라고 여기기보다 상대방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물었던 율법 교사처럼 내 주변에는 내 사랑을 받을 만한 마땅한 대상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눅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 우리는 너무나 자주 ‘누가 내 이웃일까?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까? 누구에게 베풀어야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사랑이 나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달린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내 주변에는 내가 사랑을 베풀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심각한 사랑에 대한 왜곡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누가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를 찾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누구이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느냐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누군가를 사랑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룻기가 가르치는 사랑은 홀로 된 시어머니를 책임지고 보호하려는 선한 의지와 책임감에서 비롯된 사랑입니다. 며느리 룻의 생애를 책임지고 보호하려고 하는 선한 의지에서 비롯된 사랑입니다. 보아스가 보여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지는 것으로 룻과 나오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 갑니다.
교회는 세상이 겪는 문제에 대해 교회가 책임지려는 선한 의지와 행동을 통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교회가 그리고 교인들이 세상을 향한 사랑의 책임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저 악한 세상은 망해버리라며 저주만 합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의 책임을 상실한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이런 교회는 아무 쓸데 없어 결국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는 맛을 잃은 소금의 처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밀크릭에서 세탁소를 하시는 안혜미 집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집사님이 경영하는 세탁소 손님 중에 학교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요즘 학교가 모두 클로즈 하였으니 그 선생님도 한동안 세탁소에 빨래를 맡기러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선생님이 세탁소를 찾아오더니 자신이 그동안 빨래를 맡겼으면 이 정도 금액을 세탁비로 사용했을 것이라며 오백 불짜리 체크를 놓고 갔다고 했습니다.
집사님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제가 받은 것 이상으로 감동이 되었습니다. 물론 집사님 내외가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맡은 일을 하였기 때문에 이런 예상치 못한 감동적인 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한 서비스를 받았다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기에 이 힘든 시기를 견디며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크리스천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자신에게 요구한 책임을 다 지킬 것을 약속하고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룻을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을 돌려보내며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룻의 겉옷에 보리를 여섯 번 되어주었습니다. 룻기는 보아스가 보리를 여섯 번 되어주었다는 것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룻3:15 보아스가 가로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룻3:17 가로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얼핏 생각하기에 이른 새벽 보아스가 룻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보리를 여섯 번 되어주었다는 이야기는 전체 맥락과는 상관없는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뜬금없어 보이는 이 이야기를 룻기는 두 번이나 반복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보아스가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보내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종교문화에서 숫자는 매우 중요한 메타포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일곱’이라는 숫자입니다. ‘일곱’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숫자로 하나님의 안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는 안식하셨기 때문입니다. 일곱이 하나님의 숫자로 완전함을 뜻한다면, 여섯은 사람의 숫자로서 부족함을 뜻합니다. 동시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 룻은 보아스가 보리 여섯 번을 되어준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에게서 보아스가 보리 여섯 번을 되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것이 보아스가 자신에게 보내는 사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그럼 도대체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 여섯 번을 되어준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섯은 일곱이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으로 가기 바로 직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 여섯 번을 되어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을 위해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룻과 나오미가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자신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곧 감당하겠다는 일종의 징표와도 같은 것입니다.
오늘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며 이번 주일이 열네 번째 온라인 예배임을 세면서 시작했습니다. 제가 굳이 매주 몇 번째 온라인 예배라는 것을 세는 이유는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앞날을 생각하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앞날을 붙자고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불안하게 사는 대신 한주 한주 잘 참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이 위기가 끝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매 주일 온라인 예배를 준비하며 반복하고 있는 저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번 한 주도 우리 성도들이 조금만 더 참고 견디게 해 주세요.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참된 안식과 위로가 있을 텐데 혹여나 너무 힘들다고 여기서 주저앉아 버리지 않게 해 주세요.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이 한 주도 잘 참고 견디게 하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여 주세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시니 이 위기의 시간이 저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오미는 보아스가 룻에게 보여준 징표를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룻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오미는 불안해하는 룻에게 네게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젠 보아스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기 위해 참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약속한 바를 이루기 전에는 결코, 쉬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룻3:18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지금 우리가 겪는 위기가 아무리 암담하고 어렵다고 해도 이 또한 결국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보아스가 자신이 약속한 바를 이루기 전에는 쉬지 않겠다는 나오미의 말은 단지 며느리 룻에게만 주는 언약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에게 참 구원과 안식을 주시기까지 쉬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책임지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잘 참고 견디어 왔는데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됩니다. 조금만 더 참고 이 언덕을 넘으면, 이 모퉁이를 돌아서면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참된 안식을 누릴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또 한 주를 잘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살아 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