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로 기억되지 말라
룻기 4:1-8
열다섯 번째 온라인 라이브 예배입니다. 오늘은 룻기 강해 열두 번째 시간으로 “아무개로 기억되지 말라.” 오늘도 같은 시간, 같은 찬양, 같은 말씀으로 각자의 가정에서 드리는 온라인 예배를 통해 이 한 주간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길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는 자유교회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목회의 방향이자 목표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미신과 유혹과 탐욕과 거짓 신앙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제가 가장 중점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자원함으로 교회를 유지하길 원하며 자발적인 신앙으로 각자의 믿음을 지키길 원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14년 동안 자유교회를 섬기면서 무엇인가를 하거나 이루기 위해 교인들에게 강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없었거나, 필요한 것이 없었기에 강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억지로 또는 강요함으로 해야 할 일을 하거나 필요한 것을 채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성도님들의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가 지탱되고 유지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교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헌신이나 봉사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에 부치는 헌신이나 봉사를 하는 분들을 보면 말렸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안되면 안되는 대로 참고 견디고 지내려고 했습니다. 자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제가 하려고 했지, 원치 않는 일을 교우들에게 강제로 맡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제가 잘했다고 자랑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것은 목사로서 매우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나 때에 따라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또는 강제라도 강요해야 하는 것이 목사의 마땅한 책임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억지로 하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억지로 시키거나 강요하는 것을 잘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님들을 섬기면서 억지로 무엇인가를 강요하도록 하고 싶은 생각은 앞으로도 전혀 없습니다.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어떻게 신앙이 주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어쩌면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부담 없이 다닐 수 있는 교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교회가 부담 없이 다니실 수 있는 교회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정말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 부담도 없이 마냥 편히 다닐 수 있는 만만한 교회는 아닙니다. 오히려 다니면 다닐수록 부담스럽고 힘들게 다녀야 하는 교회가 우리 교회입니다. 아마도 우리 교회를 몇 년 이상 출석하신 분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부담도 없이 보였는데 다니면 다닐수록 자유교회를 다니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혹시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는 눈에 보이는 종교 행위나 봉사로 교인들에게 신앙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이런 것들로 하나님의 축복을 보장하지도 약속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한계선을 그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끝도 없는 변화와 성숙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가 교인들의 주일성수와 헌금, 선교와 전도 그리고 교회를 위한 헌신이나 봉사를 두고 구원의 확신을 보장해 주거나 하나님의 축복을 남발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율법의 방식이지 복음의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시대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시대를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눈에 보이는 거룩한 종교 행위만으로 하나님은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주지도 않습니다.
율법과 복음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쉬울 것 같습니까? 질문이 어려운가요? 좀 더 쉽게 이 질문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법을 지키는 것과 양심을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양심을 지키는 것보다 법을 지키기가 훨씬 쉽습니다. 율법에는 정해진 분명한 마지노선이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책임만을 묻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핏 보기에 복음에는 율법과 같은 제약이나 제한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눈에 보이는 않는 엄청난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신앙 수준을 어디까지 요구하고 있습니까? 특별한 종교 행위를 하라고 하지 않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에베소서 5:1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율법은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준으로 믿음의 있고 없음을 구별합니다. 하지만 복음은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종교문화 배경을 가진 룻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면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룻기에 나오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 시대나 문화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이상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룻기를 읽으며 우리가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를 생각하고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룻기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지난 말씀을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룻기 3장을 보면, 한밤중에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을 찾아가서는 그에게 부탁하기를 당신은 우리의 기업 무를 자이니, 자신과 결혼하여 무너져버린 우리 가문을 회복시켜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엘리멜렉 가정에 나누어 주신 땅입니다.
룻이 어떤 여인이라는 것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보아스는 당장이라도 룻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기업 무르는 일은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엘리멜렉 가정에는 보아스보다 우선권이 있는 친족이 한 명 있었기에 보아스는 룻의 간청을 당장 들어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겉옷에다 보리 여섯 번을 세어주고는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 여섯 번을 세어 준 것은 나오미와 룻에게 주는 언약과도 같은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룻이 자신에게 부탁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약속의 징표였습니다.
모압 출신 룻은 보리 여섯 번을 세어준 보아스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보아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단번에 알아챘습니다. 여섯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숫자를 의미합니다. 보아스는 룻이 안식할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안식은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룻기 3장 12절로 13절의 말씀을 보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요구하는 룻에게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라는 단어를 몇 번 말하고 있습니까? 룻기는 기업 무를 자라는 똑같은 단어를 의도적으로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로서 자신이 할 수 것은 자신이 하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메타포라 할 수 있습니다.
룻기 3:12-13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보아스의 이러한 태도를 이것을 매우 중요한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교인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도 하지 않고는 그저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만 바라며 삽니다.(새벽기도 10년 로또 당첨 기도) 이것은 믿음 좋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의무와 책임마저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룻기 말씀은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를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가서는 자신보다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엘리멜렉의 친족을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성문은 단순히 성의 입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성문은 공개재판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법정과도 같은 곳입니다.
룻기4:1a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우선권이 있는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게 되자 보아스가 그를 불러 앉게 합니다. 일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룻기에서 마침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자신보다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사람을 불러 앉히는 것을 기록한 룻기의 표현이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룻기4:1b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룻기는 보아스가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고 했고 그가 와서 앉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아무개가 무엇을 뜻합니까? 아무개는 누군지 모르는 불특정한 사람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보아스가 정말 자기보다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서 아무개라고 불렀을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보아스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타나기를 성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부리는 종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던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를 “아무개여” 불렀을 리는 만무합니다. 아무개라는 표현은 룻기를 기록한 사람이 지극히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룻기는 왜 기업 무를 자의 이름 대신 의도적으로 그냥 아무개라고만 기록했을까요?
룻기가 아무개라고 표현한 의미와 이유를 알아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도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개라는 표현을 통해 룻기는 이 사람이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일 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정말 아무개라 불린 사람이 당시 베들레헴에서 아무것도 아닌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재력가였습니다. 그랬기에 보아스가 룻의 간절한 부탁을 듣고도 당장에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베들레헴 지역에서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재력도 있고 명망도 있던 사람을 룻기는 왜 그냥 ‘아무개’라고 기록한 것일까요? 도대체 그 사람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보아스는 성읍 장로 열 명을 부르고는 그 사람들 앞에서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보아스가 성읍 장로 열 명을 불렀다는 것은 공식적인 재판을 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에게 나오미가 가난하여 남편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고 하는데 그 소유지를 사주겠냐고 묻습니다.
보아스의 질문에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던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자신이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왜 선 듯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자원했습니까? 그 사람의 생각에는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나이가 너무 많아 더는 자식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오미가 죽고 나면 그 기업은 자기 가문의 기업이 될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룻기4: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보아스는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묻기를 만약 당신이 정말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기를 원한다면 그의 며느리 룻에게서 사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젊은 룻에게 장차 자식이 생기면 그 자식의 이름으로 자신이 산 기업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자 아무개라고 하는 그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겼을 때는 대뜸 기업을 무르겠다고 자원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 젊은 며느리 룻이 있고 그녀의 자손을 통해 기업을 잇게 해줘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자 이것이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며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모든 권한과 책임을 떠넘깁니다.
룻기4: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이스라엘 종교문화에서 자신이 지어야 할 기업 무르기의 책임을 포기한 사람은 자신의 신을 벗어 기업 무를 책임을 지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뜻은 자신은 더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행위는 대단히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당장 자기 재산에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율법이 요구하는 이웃 사랑의 책임을 외면하고 수치와 불명예를 선택한 것입니다.
기업 무르기라는 제도는 당시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주신 기업 무르기라는 율법조차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우리 시대 우리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룻기가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었던 사람을 의도적으로 아무개라고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개로 표현된 그 사람은 당시 베들레헴 지역에서는 꽤 알려진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사람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무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업 무르기는 강제적인 의무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기업 무르기의 권한과 책임을 보아스에게 떠넘긴 아무개에 대해 비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이라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한을 행사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룻기가 자기의 손해를 피하려고 마땅히 베풀 수 있는 은혜 베풀기를 거절한 사람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아무개라고 표현한 의미를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룻기는 그 사람이 비록 비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고 존중해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음을 아무개라는 표현을 통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가 기업 무를 자의 권한과 책임을 외면한 사람을 아무개라고 표현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주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이 대형교회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대형교회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런 책임이나 부담 없이 아무개로 교회를 다니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큰 교회를 다니면 익명으로 아무런 책임이나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습니다. 아무런 책임도 부담도 없이 교회를 다니려는 생각이나 태도를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혜로운 일은 아닙니다. 아니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아무런 책임도 부담도 없이 하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어떠한 책임이나 부담도 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룻기가 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거절한 사람에 대해 아무개라고 기록하였습니까? 비록 이것이 죄도 아니고 비도덕적인 일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외면한 수치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는 대신 아무개라는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그 사람이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았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당장 부담이나 손해를 피하려고 아무개로 신앙 생활하려고 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아무개로 불리고 기억되는 신앙생활로는 자신도 구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신앙의 선한 영향력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임을 드러내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아무개로 잊히는 사람이 아니라 보아스처럼, 룻처럼 여러분 각자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믿음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세상을 향해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손해가 되더라도 크리스천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연단하고 훈련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고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