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룻기13-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

룻기 4:9-13

 

열일곱 번째 온라인 라이브 예배이자 룻기 강해 열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룻기 49절로 13절의 말씀으로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도 같은 시간, 같은 찬양, 같은 말씀으로 각자의 가정에서 드리는 온라인 라이브 예배를 통해 오늘 말씀 제목처럼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룻이 한밤중에 보아스를 찾아와서는 자신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기업 무를 것을 부탁했습니다. 보아스는 당장이라도 룻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보다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는 성문 앞 베들레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일종의 공개적인 재판을 열었습니다.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었던 아무개로 기록된 사람이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라 여겨 선뜻 기업을 무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을 무르길 원한다면 그녀의 과부 며느리 룻과 결혼하여 룻에게서 태어난 자식에게 나오미의 기업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이라 여긴 아무개라는 사람이 자신의 신을 벗어 보아스에게 주면 기업 무를 모든 권한을 넘깁니다.


보아스는 성문 앞에 모인 베들레헴 장로들과 백성들을 증인으로 삼아 자신이 룻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에게서 태어난 자식에게 자신이 산 모든 기업을 넘기겠다고 언약합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르기의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하자 베들레헴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보아스와 룻을 축복합니다.


룻기 411절과 12절은 베들레헴 장로들과 백성들이 기쁨에 차서는 보아스와 룻에게 빌어주는 축복입니다. 이들이 빌어준 축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룻에 대한 축복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기를!”


4: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무슨 뜻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레아와 결혼하여 12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이 낳은 12명의 아들은 장차 이스라엘 12지파의 족장이 됩니다. 야곱이 라헬과 레아를 통해 얻은 12며의 아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처럼, 보아스가 룻을 통해 장차 얻을 자식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저들이 빌어준 축복이 어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아스와 룻에게서 태어난 아들 오벳을 통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다윗을 태어나게 합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다시 말해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는 왕입니다.


4: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이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아스의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라합입니다. 라합이 어떤 여인입니까? 가나안 여인으로 그녀의 직업은 기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보아스가 기업 무르기 위해 결혼한 룻이 어떤 여인입니까? 이스라엘 총회에도 들어올 수 없는 이스라엘 민족이 저주하는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는 다윗을 이방 여인 라합의 아들 보아스와 이방 여인 룻의 결혼하여 나은 후손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파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아스의 기업 무르기를 통해 다윗이 태어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다는 것이 룻기가 보여주는 가장 파격적인 메시지입니다.


보아스에 대한 베들레헴 장로들과 백성들의 두 번째 축복입니다. 저들은 보아스가 에브랏과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기를 축복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에브랏과 베들레헴은 서로 다른 장소가 아닙니다. 베들레헴의 옛 이름이 바로 에브랏입니다. 그리고 유력하다는 것은 단순히 재산이 많아 부자라는 뜻이 아닙니다. 유력하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재력을 선하게 사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존중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4:11b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저들의 축복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훗날 보아스와 룻의 후손이자 다윗의 아들이었던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합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면서 성전 입구에 커다란 기둥 두 개를 세웁니다. 이 두 기둥은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이 아니라 성전 입구에 세운 일종의 기념탑과 같은 기둥입니다. 솔로몬은 이 두 기둥에 이름을 붙였는데 오른쪽 기둥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기둥은 보아스라 불렀습니다.


대하3:17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야긴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뜻이고 보아스는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이 세운 성전은 솔로몬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우신 것임을 나타내기 위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성전 기둥의 이름으로 삼은 보아스는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세운 기둥 가운데 하나를 보아스라고 이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보아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보아스의 이름이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기를 기원하였던 백성들과 장로들의 축복을 뛰어넘어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아스와 룻을 위한 세 번째 축복입니다. 베들레헴 장로와 백성들은 보아스의 집이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같아지기를 축복하였습니다. 보아스와 룻에게 베푼 세 번째 축복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말과 유다 사이에 태어난 베레스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는 그 어떤 것보다 엄청난 하나님의 파격을 발견하게 됩니다.


4: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는 창세기 38장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8장에 기록된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대단히 남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저잣거리 삼류잡지에도 실리기 어려운 대단히 낯부끄러운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낯부끄럽게 여길만한 사건을 대단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네 번째 아들입니다. 유다는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엘이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이후에도 가나안 출신의 아내에게서 둘째 아들 오난과 셋째 아들 셀라를 얻습니다.


유다는 장자 엘을 결혼시키는데 그 여인의 이름이 다말이었습니다. 창세기에는 다말이 가나안 여인이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성경학자가 다말 역시 유다의 아내와 같은 가나안 출신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자 엘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 하나님께서 죽게 합니다.


38: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아버지 유다는 장자 엘의 기업을 잇도록 둘째 아들 오난에게 명하기를 형수 다말과 동침하여 형의 기업을 잇게 합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 오난은 자신이 장자의 기업을 차지하기 위해 다말과 동침만 하고는 다말이 임신하지 못하도록 땅에다 설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오난을 매우 악하게 여기셔서 그를 죽게 합니다.


38:9-10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는 자기 아들들의 악함은 생각하지 않고는 며느리 다말 때문에 자신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셋째 아들과 결혼시켜야 했지만 셋째 아들도 죽을까 염려되어 며느리를 친정으로 쫓아버립니다. 당시 문화에서 결혼한 집에서 쫓겨나온 여자는 자식 대접을 받지 못하고 집에서 부리는 종으로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쫓겨난 다말은 불행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저주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기업을 이어 불행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깎으러 자기가 사는 마을 근처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창녀로 변장을 하고는 자기 시아버지와 동침을 합니다. 동침의 대가로 시아버지 유다에게 도장과 허리끈과 지팡이를 담보물을 요구하여 받아두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의 동침으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문을 들은 시아버지 유다는 크게 노하였습니다. 즉시로 종들을 보내어 다말을 잡아다가 불살라 죽이려 했습니다. 하지만 죽을 위기에 놓인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 자신이 동침하며 받았던 담보물을 보내어 자신의 임신한 아기가 시아버지 유다의 아기임을 증명합니다.


며느리 다말이 내놓은 담보물을 본 시아버지 유다가 어떻게 말합니까? 며느리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합니다. 유다는 첫째 아들 엘과 둘째 아들 오난이 죽은 책임을 모두 며느리 다말에게 돌렸습니다. 그래서 다말을 셋째 아들과 결혼시켜야 함에도 그냥 친정으로 쫓아버렸습니다. 하지만 다말은 시아버지를 통해 죽은 남편의 대를 이은 것입니다. 유다는 다말의 행위가 자신보다 옳았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보아스와 룻을 위한 백성들과 장로들의 세 번째 축복은 여러모로 매우 의미심장한 영적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백성들과 장로들은 보아스에게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같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은 정말 보아스를 진심으로 축복한 것일까요?


지금 우리의 기준이나 생각으로 보면 그야말로 이것은 보아스를 메기는 말이지 결코 축복하는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도덕과 전통과 윤리 기준에 의하며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는 매우 부적절한 이야기입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사건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서라도 대를 잇고 기업을 무른 것은 지금 우리의 생각이나 기준처럼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다말이 아니라 오히려 시아버지 유다였습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자기 아들들의 악하여 받은 하나님의 진노를 아무 죄도 없는 다말에게 돌렸으며 고의로 하나님께서 주신 계대 결혼의 법을 어겼던 것입니다.


다말의 처지에서 본다면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면서까지 죽은 남편의 대를 잇는 것이 대단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자칫하면 부정한 여인이라는 비난은 물론이고 심지어 죽임당할 수 있는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말은 비난과 죽음의 위험까지 감수하며 죽은 남편의 기업을 무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룻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의 죽은 남편 말론의 대를 잇기 위해 룻은 부정한 여인이라는 오명을 받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져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또한,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 얻는 자녀에 관한 이야기도 반드시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 쌍둥이를 낳습니다. 창세기 38장은 다말이 낳은 쌍둥이의 탄생 과정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말이 해산할 때 먼저 손이 나와서 산파가 손에다 홍색 실을 묶었습니다. 나중에 형과 아우를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온 손이 들어가고는 아우가 먼저 나오고 나중에 홍색 실을 묶은 형이 태어났습니다. 아우이면서 먼저 태어난 아기의 이름이 바로 오늘 룻기에 등장하고 있는 베레스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다말을 통해 낳은 쌍둥이 아들 가운데 유다 가문의 대를 이은 사람은 형이 아니라 동생으로 태어난 베레스였습니다. 유다의 아버지였던 야곱 역시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났지만, 형 대신 자신이 아버지 이삭의 대를 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말에게서 태어난 베레스 역시 동생으로 태어났지만, 동생 베레스가 형 대신 유다의 대를 이었습니다.


이처럼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베레스를 낳아 대를 잇는 이야기는 지금은 물론이고 당대의 사람들조차 좀처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죽은 형을 대신하여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잇는 계대 결혼이야 그 당시 종교문화라고는 하지만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통해 대를 잇는 것은 아무리 오랜 옛날이라고 해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입니다.


게다가 당시 이스라엘 문화는 장자가 가문을 잇고 대를 잇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시대였습니다. “장자승계이것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나라와 문화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아주 오랜 전통이며 관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야곱이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나 형을 대신해 아버지 이삭의 대를 잇고 있으며, 그의 손자 베레스 역시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나 형을 대신해 아버지 유다의 대를 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창세기 38장과 룻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지켜왔던 여러 가지 전통과 관습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래된 관습과 전통을 무시하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성경은 왜 지금은 물론이고 당대 사람들조차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다윗 왕의 계보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게 하신 것일까요?


다음 주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룻기의 결말은 다윗의 계보를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보아스와 룻의 기업 무르기 이야기는 결국 다윗의 계보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다윗의 계보는 한 마디로 막장 계보입니다. 다윗의 계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이기도 하니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역시 막장 계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자신들만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주의 신앙의 영향으로 주변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강력한 배타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을 철저하게 배척하고 차별했으며 무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의 결혼이 철저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심지어 저들은 이방인들의 땅을 밟았다가 이스라엘 땅에 다시 들어올 때는 반드시 발에 묻은 이방 땅의 흙을 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이방인들에 대해 배타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자신들이 최고의 왕으로 칭송하는 다윗의 계보에는 이방 여인이 세 명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유다의 며느리 다말과, 보아스의 어머니였던 가나안 기생 출신의 라합과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 룻입니다. 게다가 이 세 여인은 단순한 이방 여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당시 기준에 의하면 매우 심각한 윤리적이며 종교적 결함이 있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다윗의 계보에 등장하는 세 여인이 모두 룻기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매우 의도적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다윗의 계보에 등장하는 세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룻기가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그야말로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 기준을 뛰어넘으시는 파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룻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좀처럼 인정하기 힘든 사건과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룻기가 가르쳐 주는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기준에 제한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룻기가 가르쳐 주는 하나님은 우리의 도덕이나 윤리에 얽매이시는 하나님도 아닙니다. 룻기가 가르쳐 주는 하나님은 사람들이 가진 배타나 차별을 산산이 무너뜨리는 하나님입니다.


룻기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생각과 판단과는 다르신 파격적이신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보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판단, 배타와 차별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모습과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바라기는 룻기를 읽으며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으시는 파격적인 하나님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도 우리의 잘못된 편견과 오해, 그릇된 배타와 차별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파격이 나타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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