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시편 23편 4절
스물세 번째 온라인 라이브 예배입니다. 오늘은 시편 23편 4절 말씀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라는 제목으로 Covid-19 팬데믹이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깨달음과 영적 도전으로 충만하길 바랍니다.
모든 산에는 골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에 움푹 들어간 지형을 뜻합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는 더 깊어집니다. 깊은 골짜기는 높은 산봉우리로 인해 햇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윗이 노래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골짜기를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골짜기는 매우 위험한 곳이나 인생의 고난이나 시련을 나타내는 메타포입니다. 실제로 골짜기는 산봉우리보다 위험한 곳입니다. 독사나 맹수들이 양을 노립니다. 때론 산적 떼들이 나타나 양을 빼앗기도 합니다. 급격히 불어나 물로 산사태나 급류에 휩쓸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재난을 당할 수 있는 곳이 골짜기입니다.
양에게 골짜기는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하지만 양을 치는 목자는 골짜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자신이 돌보는 양을 골짜기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목자가 양에게 신선하고 새로운 풀을 먹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있는 산봉우리에 더는 양을 먹일 풀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자는 신선하고 새로운 풀이 자란 새 산봉우리로 양을 인도해야 합니다.
새로운 산봉우리에 오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산을 내려가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 새로운 산봉우리를 올라갈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가 좋다고 마냥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선 반드시 골짜기를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Covid-19 팬데믹이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골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전과 같은 방식에 머물러 있어서는 포스트 Covid-19 시대를 살 수 없습니다. 이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시대를 살기 위해선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겪는 이 위기를 통해 변화된 시대를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을 훈련하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는 양을 목자가 위험한 골짜기로 인도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풀만 먹는다고 양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는 물을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목자는 오랫동안 뜨거운 태양 빛으로 인해 심한 갈증에 빠진 양들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골짜기로 내려갑니다.
물이 어떻게 흐릅니까?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골짜기는 산에서 가장 낮은 곳입니다. 산에서 흘러내린 모든 물은 결국 골짜기로 모이게 됩니다. 비록 골짜기가 위험한 곳이지만 산봉우리에서는 얻을 수 없는 신선하고 맑은 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게 되면 오래 태양 빛으로 인해 타는 듯한 갈증이 사라지고 이내 원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충만하여 생기를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산봉우리에 우뚝 섰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의 골짜기와 같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놓였을 때 우리는 가장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까? 형통한 순간이었습니까? 고난 겪을 때입니까? 우리가 언제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건강하고 사업이 잘될 때 입니까? 아니면 병들고 약했을 때 사업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입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까? 내 뜻대로 모든 것이 잘 될 때입니까? 아니면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을 때였습니까?
물론 실패의 골짜기, 낙심의 골짜기, 재난의 골짜기, 불행의 골짜기, 어둡고 쓰라린 인생의 골짜기, 불안과 걱정의 골짜기, 우리 중 누구도 이런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생수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도 골짜기와 같은 어렵고 힘든 순간에 가장 풍성하게 임하십니다.
인생의 골짜기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생수로 인생의 새로운 생기를 얻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교만이 꺾여지고, 모난 것이 들어가게 되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라비아 속담에 “햇볕만 내리쬐고 비가 오지 않으면 사막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두운 시기나, 힘든 시기를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막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 좋은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해선 좋은 때와 나쁠 때가 모두 필요합니다.
배부름이 좋은 것은 배고픔의 아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줄 아는 것은 슬픔을 알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줄 아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불행이 무엇인지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불행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고난과 시련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인생의 고난과 시련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난은 ‘만약’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의 문제입니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고난의 시기는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고난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아무도 인생의 골짜기를 면제받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45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인생의 고난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고난은 우리가 얼마나 착한지, 혹은 얼마나 악한지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겪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나만 겪는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의 조국 한국과 우리가 사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겪고 있는 고난입니다. 나만 이 고난과 역경에서 피해간다고 살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가족이 살아야 내가 살 수 있고, 이웃이 살아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살아야 비로소 나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고난의 시기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계획하거나 고난의 시간을 정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가 되었을 때 닥친 것을 고난이나 시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대부분 예상하지 못했을 때 또는 내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을 때 옵니다. 그래서 고난이고 시련입니다.
자동차 수리 센터를 지나는 데 자동차가 고장이 나거나 타이어가 펑크 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 이런 일은 정말 급하게 어디를 가야 할 때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고 힘들게 만듭니다.
인생의 골짜기와 같은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치 않은 전화 한 통, 편지 한 통, 건강진단 결과, 자동차 사고와 같이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냥 나타납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다고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난은 가장 힘들고 어려울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고난이나 재앙이 함께 몰려와서는 고난 겪는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예레미야 4:20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하지만 나쁜 소식만 있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라 할지라도 모든 고난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골짜기는 끝이 있습니다. 골짜기는 우리가 영원히 머물 장소가 아닙니다. 다윗은 노래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골짜기는 우리가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통과해야 할 곳입니다. 골짜기는 터널과 같아서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고난이라도 영원히 지속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어떤 고난이든 끝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 끝에는 영원한 영광이 있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을 낭비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에는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 고난을 겪지만, 우리가 겪는 고난에 바르게 반응할 때 우리에게는 영원한 유익이 있음을 성경은 약속하셨습니다.
고후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반응하는 것입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두려움은 저절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보다는 지극히 선택적인 반응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것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곳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높은 곳에서 번지 점프를 하고, 그보다 더 높은 하늘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쥐나 뱀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너무 싫다 보니 이젠 쥐나 뱀을 보는 것조차 무섭습니다. 하지만 제 딸은 쥐나 뱀을 별로 싫어하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제 딸은 거미를 무서워합니다. 방안에 거미만 보이면 기겁을 하고 저를 부릅니다. 그럼 저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거미를 잡아 없앱니다. 저는 거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두려움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반응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반응이며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나 재앙에 대해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나 모습이 아닙니다. 개인의 선택에 의한 지극히 개인적인 반응이며 결과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난으로 인해 낙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낙심이나 절망 혹은 포기는 우리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시기에 절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할 수도 있고 반대로 고난으로 말미암아 변화와 성숙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낙심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겪는 고난이나 문제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에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다윗이 어떻게 노래했습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다.”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과 동행하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에게만 주신 언약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겪을 때, 우리가 시련 당할 때, 우리가 재난당할 때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이사야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께서는 저 높은 곳에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면서 “저들이 잘 이겨냈으면 좋겠군!”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손을 잡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함께 걸어가십니다.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고난과 역경의 길을 함께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겪는 고난을 똑같이 겪으셨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나이다.” 했습니다. 양을 치는 목자만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지팡이는 오직 양을 관리하고 보살피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도구라고 합니다. 소나 말이나 돼지에게는 적합하지 않고, 오직 양에게만 필요해서 고안되게 만들어진 것이 목자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어미 양들은 새끼 양에서 사람의 손 냄새가 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목자는 손을 사용하지 않고 지팡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또한, 목자의 지팡이는 양들을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목자의 지팡이는 양들을 구출하는 데 사용한다고 합니다. 양은 완고한 동물이어서, 종종 엉뚱한 짓을 잘 저지른다고 합니다. 한 입밖에 되지 않은 풀을 욕심내다가 종종 깊은 구덩이나 벼랑에 빠지는데 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양을 건져내는 도구가 목자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목자의 막대기는 양이 제멋대로 다른 길로 가거나, 위험한 독초가 있는 곳으로 접근하거나, 그 밖에 또 다른 위험물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발견되면 막대기를 던져 양을 보호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때론 양을 잡아먹기 위해 달려드는 광야의 맹수들을 막거나 쫓는데 사용하는 것이 막대기라고 합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필요에 따라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여 양을 보호한다고 합니다.
다윗이 고백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이나 역경, 절망이나 슬픔에 빠져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로 내밀어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악한 권세로부터 위협을 당하면 하나님께서는 막대기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하였다는 다윗도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인생을 살면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병이 들기도 합니다. 비극을 겪기도 하고 재앙과 재난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기도 하고 때론 경제난이나 가난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길은 나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 비록 우리가 걷는 사망한 음침한 골짜기에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맹수와 강도 떼, 또는 예상할 수 없는 재앙이 있다고 해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딴 길로 새는 것을 막아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목자로 삼는다면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우리를 지키고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도우신다면 그 어떤 인생의 고난이나 역경이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난과 역경으로 인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은 사람이 되게 할 것입니다. 고난을 피하거나 면제받는 것이 믿음의 능력이며 은혜가 아니라 내가 겪는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며 은혜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라기는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우리가 겪는 Covid-19 팬데믹의 위기를 잘 견디고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담대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우리가 겪는 Covid-19 팬데믹의 고난과 시련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훈련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셨으나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