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예수님과 시험4-가장 절박한 문제에 대한 시험

가장 절박한 문제에 대한 시험

마태복음 4:1-3

 

예수님과 시험연속설교, 네 번째 시간으로 가장 절박한 문제에 대한 시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셨던 첫 번째 시험으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에 가셔서 받은 광야의 시험이라면 다른 하나는 광야의 시험을 받는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의 시험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42절과 3절의 말씀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4:2-3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지난주에 설명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것은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성령께서 인도하신 훈련이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매우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뜻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주시는 연단이나 훈련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40년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밤낮으로 금식하며 보내셨던 40일은 장차 예수님께서 선포하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연단과 훈련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밤낮을 금식하셔서 가장 굶주리셨을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온 마귀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기록했습니다. 마귀를 시험하는 자라고 기록한 것은 마귀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막기 위한 마태복음의 의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마귀라고 하면 사람들 대부분이 생각하는 가장 일반적인 생각은 굉장히 괴상스럽거나 무서운 형상을 한 무시무시한 영적인 존재쯤으로 여깁니다. 생각해 봅시다. 마귀는 유혹하는 자입니다. 유혹하는 자가 무시무시하며 누가 거기에 유혹을 당하겠습니까? 이것은 매우 심각한 모순입니다. 게다가 영적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어떤 형상을 떠올린다면 그것이 무슨 영적인 존재입니까?


마귀를 단순히 무시무시한 모습을 가진 귀신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마귀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무속적인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또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존재를 뜻하는 히브리어 사탄을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마귀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을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이며 은유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장차 당신이 받으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붙들고는 항변하면서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예수님이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을 막아섰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신을 붙잡고 항변하는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 말씀은 베드로가 사탄이라는 것이 아니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땅히 가셔야 할 길을 방해하고 막아서는 베드로의 탐욕 또는 탐심을 사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사탄이나 마귀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반드시 하도록 유혹하는 모든 것을 상징하고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서 마귀를 사람을 미혹하는 특별하고 신비한 영적인 귀신과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경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마귀나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탐욕이나 탐심을 의미하는 경우가 귀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를 뜻하는 경우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은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은 시험은 모두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굶주린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임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라는 것이며, 세 번째는 세상 권세를 줄 테니 마귀라는 악한 권세에 절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은 세 가지 시험은 모두 인간의 탐욕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가지 마귀의 시험 가운데 첫 번째 시험에 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시험을 이해하기 위해선 첫 번째 시험이 어떤 상황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기록하기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밤낮으로 금식하시어 굶주렸을 때 시험하는 자가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4:2-3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시어 굶주렸을 때 시험하는 자가 찾아왔다는 것은,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40일 밤낮으로 금식하여 주리셨을 때 찾아와서는 무엇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까?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광야에 널려 있는 돌들을 떡 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4:3b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시어 굶주렸을 때, 굶주린 것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줍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주리지 않으셨더라면 마귀는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돌멩이만 보아도 먹을 것으로 보일 만한 그야말로 극도로 굶주린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돌멩이를 가지고 떡 덩이로 만들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가장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가장 절박한 상황이나, 절실한 형편일 때 시험받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절박한 상황에서는 시간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찾거나 기다리기보다는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 또는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굶주리셨던 절박한 상황에 찾아와서는 가장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셨습니다.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굶주린 예수님에게 광야 여기저기 널려 있는 돌멩이로 떡을 만들어 당장 급한 굶주림을 해결하라는 마귀의 유혹은 대단히 그럴듯한 말처럼 들립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라고는 하지만 예수님 역시 우리가 똑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똑같은 욕구를 가지고 살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욕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먹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모든 인간이라면 반드시 먹을 양식이 필요하고, 매일같이 양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생존의 법칙입니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일지라도 먹어야만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생존 법칙이 때론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연의 법칙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들리라 한다면 아마도 먹지 못해 굶주리는 고통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굶주림의 고통은 죽음과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은 굶주림의 고통이 얼마나 절박하고 힘든 것인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비록 굶주림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절박하고 절실한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이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생존의 법칙은 결코,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하고 힘들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적당한 양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생존의 법칙은 단순히 생존 법칙만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생존 법칙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하나님 창조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인간의 생존 법칙은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로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도 않으시면서 사람은 반드시 먹어야만 살 수 있도록 창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통해 사람이 먹을 양식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충분히 넉넉히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세상의 것으로 모든 인류가 굶주리지 않고 충분히 배불리 먹으며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 것은 세상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굶더라도,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인간의 추악하고 타락한 탐욕이 매일같이 굶주리는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견디셔야 했던 40일간의 금식은 단순히 종교적이며 영적인 종교의식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광야에서 예수님의 40일간의 금식이 영적인 훈련이며 종교의식이었다면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시어 주리셨다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주리신 것은 굶주림이라는 인간 세상에 가득한 고통을 직접 경험하시고 공감하시기 위한 연단이며 훈련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을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사십일 밤낮을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성경은 기록했습니다. 모세도 사십일을 금식했다고 굶주렸다고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십일 밤낮을 금식하셔서 주리셨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금식이 단순히 종교적이며 영적인 금식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34:28-29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유혹은 대단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돌을 떡으로 바꿀 능력이 없어서 문제이지 만약 우리가 예수님처럼 돌을 떡으로 바꿀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다면 이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 말 속담 중에 사흘 굶어서 남의 담 안 넘는 놈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굶주리는 것이 너무나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문제이기에 사흘을 굶게 되면 누구라도 도둑질하는 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표현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과연 이 속담이 사흘을 굶으면 누구라도 도둑질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뜻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굶주림의 고통이 크다고는 하지만 사흘을 굶었다고 도둑질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내 배가 고프다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을 함부로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속담은 결코 가난해서, 굶주려서,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을 그럴 수도 있다고 정당화해주는 속담이 아닙니다.


물론 속담처럼 사람이 굶주리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흘 굶으면 안 나는 생각이 없다.’라는 또 다른 속담도 있습니다. 굶주림은 인간이 겪는 가장 비참하고 힘든 고통이기에 나쁜 생각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굶주리는 사람이 담을 넘지 않도록, 굶주리는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저들을 돌보고 도우며 살라는 것입니다.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유혹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40일을 굶주린 예수님에게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괜찮다는 사탄의 교묘한 유혹입니다. 당장 절박하고 절실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말고 어떤 것도 가능하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예수님께서 돌멩이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돌멩이를 떡으로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의 질서와 원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돌은 돌이고 떡은 떡이지 돌이 떡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함부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대적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시험하는 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시험했습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광야에 널브러진 돌멩이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돌을 떡으로 만드는 신비한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두 번째 시험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4:5-6a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마귀가 유혹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신비한 능력을 행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매우 그럴듯해 보입니다. 매우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자신을 과시하고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하셨던 40일간의 금식은 자신의 영성이나 능력을 자랑하는 종교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훈련이며 동시에 굶주린 이들에 대한 공감과 긍휼을 배우는 훈련입니다. 하지만 금식을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 형편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단지 금식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기도, 헌금, 봉사 등 교인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 모든 종교 행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앙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드러내고 자랑하고 인정받으려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외식과 위선에 빠지는 것이며 결국 이것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지는 것이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시험하는 자 마귀가 우리의 가장 절박하고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우리를 시험하려고 듭니다. 굶주린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시험입니다. 인간이 비록 먹고살아야만 하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먹고살아서는 안 됩니다.


비록 아무리 굶주렸다고 해도 먹어야 할 것이 있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사람에게 자랑하고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드는 훈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한 번뿐인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귀한 자로 살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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