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교회1-새로운 공동체의 탄생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

데살로니가전서 1:1-3

 

지난 몇 주 동안 저는 2020년을 마감하고 2021년 새해를 위한 목회를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목회를 잘못했다는 깊은 후회와 반성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운 교회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는 비록 우리 교회가 교인들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목회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그리고 지나간 제 목회를 돌아보면서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반석이 아니라 모래 위에 교회를 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반성과 후회를 했습니다.


명색이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는 신앙 공동체라고 하면서 실상은 조기 축구회나 산악회보다도 못한 나약하고 부실한 공동체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바람만 불어닥쳐도 휙 날아가서는 모두가 뿔뿔이 흩어질 것만 같습니다.


도대체 문제가 무엇일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상 교인들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교회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고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는 도시가 중심이 된 사회입니다.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고 도시는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시설뿐만 아니라 사람이 바라고 원하는 온갖 종류의 풍요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가 사람에게 제공하는 문명의 편리와 온갖 종류의 풍요는 도시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는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만이 도시가 주는 문명의 편리와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도시의 경쟁에서 승자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대부분은 도시의 승자들이 누리는 편리와 풍요를 제공해 주는 도구로 전락한 삶을 살고 맙니다. 그 결과 사람들 대부분은 도시에서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기대하는 것은 힘들고 지친 도시 생활에서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교회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으며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이런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도시의 치열한 경쟁으로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제공하며 죽으면 지금 사는 곳보다 훨씬 더 좋은 천국을 보장해 주는 종교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교회가 아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이 아니라고 하면 당장 세상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기서 뭘 더하란 말입니까? 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물론 오늘날 도시에 있는 많은 교회는 적당히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얻는 것만으로도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교회는 더 많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서 예배 시간도 짧게 하고 각종 신앙적 책임이나 의무도 줄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겐 적당한 헌금과 주일 성수 정도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저들의 신앙을 합리화해 줍니다. 그 결과 교인들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교회는 교회다움을 갈수록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젠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조차 생소해 지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자칫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주일예배 말고는 별도의 규칙적인 집회를 모이지 않습니다. 물론 매일 아침 묵상을 보내고는 있지만, 아침마다 시간을 구별하여 진지하게 묵상에 참여하는 분들은 아마 절반도 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분들은 우리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무런 부담도 없고 대단히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런 부담이나 책임감도 없이 그저 다니기에 편한 교회를 만들려고 목회하지는 않았습니다. 목사가 주는 책임감이나 부담으로 억지로 마지못해 체면치레로 신앙 생활하는 교회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인 마음으로 신앙을 지키는 교회를 만들기 원했던 것인데 이것이 아주 잘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는 무엇일까요? 교회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명하시고 저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도로 세상에 보내시면 저들에게 당부하고 부탁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본질은 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여야 합니다.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시려고 했던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저는 교회가 마땅히 예수님이 세우길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도 세상을 살 수 있음을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거룩한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놀라운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신비한 곳이어야 합니다.


한국 일산에 씨앗교회라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코로나 확산으로 정부에서 비대면 온라인 예배를 요청하자 즉시로 대면 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습니다. 팬데믹 상황이 계속되며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교인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하자 교회는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의 계약을 해지하고 받은 보증금 3천만 원과 월세 70만을 빼서는 교인들 가정마다 30만 원씩, 싱글 가정이나 청년들에게는 10만 원씩 지급한다고 합니다.


백신이 개발되었다고는 하지만 갈수록 코비드 팬데믹이 급격하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코비드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가 날마다 기록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그 어디보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의 상황을 보면 오히려 교회와 교회 관련 단체들이 팬데믹 확산에 주역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한인 교회들도 성급하게 대면 예배를 시작했다가 교인들 사이에서 코비드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심지어 사망자까지 발생하고 있습니다. 8년 전쯤, 우리 교회를 이년 정도 다녔던 권사님께서 얼마 전 코비드에 걸려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제영 집사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교회가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기는커녕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지키고 믿음을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무리하게 대면 예배를 강행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 미국이나 한국에서 교회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의 중요한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나 특정한 단체가 신앙의 자유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예배를 방해하고 예배로 모이지 못하게 한다면 신앙의 자유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저들은 신앙의 자유와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로마제국의 핍박과 박해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며 신앙의 자유와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예배로 모이는 것이 전염병을 확산하여 팬데믹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대면하여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고 믿음을 지키는 길이라 믿습니다. 온라인 예배로는 믿음을 지키지도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비겁한 변명입니다. 도대체 이런 믿음으로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데살로니가 전서를 살펴보면서 과연 교회는 어떤 곳이며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과 고민을 통해 앞으로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로 자라가야 할지 교회의 방향을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생각하려는 데살로니가전서 1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은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데살로니가 지역에 세웠던 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인사 말씀입니다. 바울의 짧은 인사의 글이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만들어 가야 하는 교회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영적 도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세 사람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시작하게 했던 이들입니다.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울의 동역자로 알려진 실라의 로마식 표기입니다.(실라는 히브리식 표기) 실라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유대인으로 바울과 함께 동역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인물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회심한 청년으로 바울이 믿음으로 얻는 참 아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사랑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로마 시대에 걸쳐 매우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으며 당시 인구는 12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리스에서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이며 현재 데살로니가 도시의 인구는 약 200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하던 기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면 우리는 건물이나 장소를 먼저 떠올리지만, 당시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킬 때 일반적으로 사용된 보통 명사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교회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십자가가 있고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편지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는 말은 데살로니가인의 모임 또는 데살로니가인의 공동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겨우 세 안식일에만 유대인 회당에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도시에 3주간만 지냈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서 가르친 기간은 3주에 불과하지만, 바울이 데살로니가 도시에 머문 기간은 이보단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17:1-2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의 세 번에 걸친 성경 강론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헬라인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따르게 되자 바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로마제국의 반역을 일으키는 자들이라며 관원들에게 고발하였습니다.


17: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바울과 실라는 교인들이 모은 보석금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즉시로 데살로니가 도시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데살로니가 도시는 바울을 쫓아낼 만큼 적대적인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나는 바울의 마음은 무척이나 안타까웠고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실라가 쫓겨난 다음에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건강한 교회로 자라났습니다.


바울이 보내 편지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자라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쓰며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바울의 아주 짧은 소개는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회의 핵심을 소개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하나님을 아버지 안에 있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핵심이며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한 마디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가 가졌던 절대적인 주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신과 인간이라는 절대적인 상하관계나 복종관계가 아닌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로의 회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우리는 교회로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합니다. 목사인 저뿐만 아니라 장로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모든 교우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아버지가 된 사람들, 그 감격을 깨달은 사람들, 그 복을 알고 누리는 사람들, 그들이 함께 모여 교회가 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똑같이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깨어지고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친밀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데에는 좀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제 아들인 상준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아버지라고 한다면 상준이에게 하나님은 할아버지가 되셔야 맞습니다. 하지만 상준이는 하나님을 하나님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는 세상의 그 어떤 수직적 관계나 상하 관계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교회는 세상에서의 신분이나 지위나 위치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공평한 존재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공동체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시대에는 왕족, 귀족, 평민, 노예로 나뉜 철저한 계급사회이자 신분 사회였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이방인과 노예를 차별하였던 차별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교회 공동체로 모였을 때는 세상에서의 신분이나 계급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로 여겼습니다.


물론 지금은 예전과 같이 엄격한 신분제도나 사람을 높거나 천하게 여기는 계급제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신분제도나 계급제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모든 차별을 뛰어넘어야 하는 교회에서조차 교회의 직분이 마치 그 사람의 높고 낮음을 나누는 계급처럼 여겨지는 곳도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이 신분이 되고 계급이 되는 교회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은 세상이 갈라놓고 나누어 놓은 세상의 모든 신분 질서, 계급 질서, 그리고 모든 종류의 차별을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은, 우리도 모르게 익숙해지고 몸에 밴 수직적이며 계급적인 인간관계를 극복하고 뛰어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거의 1년이 다 돼가는 코비드 팬데믹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겪는 시련이 나만 겪는 고통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겪는 고통이기에 함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는 다른 방식과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신앙생활은 결코 나 혼자 가능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함께 하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있어야 중도에 포기하거나 딴 길로 새지 않고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역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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