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교회2-새로운 공동체의 탄생2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2

데살로니가전서 1:1-3

 

지난주부터 우리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데살로니가전서를 살펴보면서 교회는 어떤 곳이며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 연구와 묵상과 고민을 통해 우리 교회가 앞으로 어떤 교회로 자라가야 할지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와 똑같은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지난주 미처 마치지 못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교회와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의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인의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비록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아주 짧은 소개이지만 여기에는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떠한 교회였는가를 매우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가 어떤 교회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이야말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이 얼핏 생각하기에는 전형적인 미사여구나 관용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미사여구나 관용어가 아닙니다. 세상이 만든 모든 악한 질서와 차별을 한순간에 그리고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세상 권세는 사람을 타고난 신분이나 인종으로 나누고, 재물이나 지위에 따라 계급을 나누어 차별하는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는 세상이 나눈 신분 질서, 계급 질서, 차별 질서 등 모든 차별적인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아주 오래전(1991) 음성에 있는 교회에서 3년 정도 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그 지역에서 가장 돈 많은 부자 장로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당시 그분은 매주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가장 비싼 차를 타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운전기사는 교회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는 예배가 끝날 때까지 차에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작심하고는 그 기사분에게 가서는 예배당에 들어가서 같이 예배드리자고 권면했습니다. 그러자 나이 지긋하신 그 기사분이 하시는 말씀이 제가 감히 어떻게 사장님과 같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나요! 아마 당시 장로님이었던 그 사장님이 자신의 기사와 함께 같은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꺼렸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에 다니는 내내 그 누구도 이것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가 복음을 전하던 시대는 왕족, 귀족, 평민, 노예로 철저하게 신분이 구별된 계급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하나의 교회 공동체로 모였을 때는 세상에서의 신분이나 계급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귀족에게도 아버지였지만 평민, 노예들에게도 똑같은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아버지라는 신앙고백은 세상에서 저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신분 질서, 계급 질서, 차별 질서, 심지어 종교 차별조차 무너뜨리는 혁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그리스 이방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데살로니가 지역 귀부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귀부인들이 데리고 다녔던 종이나 노예들에게도 하나님은 똑같은 아버지입니다.


지금은 비록 한국교회가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비웃는 대상이 되고 있지만, 기독교 복음이 처음 한국 사회에 들어왔을 때는 한국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중에서도 기독교 복음이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었던 것은 조선 시대 오백 년 동안 지속하였던 철옹성과 같은 신분 질서와 이로 인한 차별을 깨뜨리고 극복하게 도운 것입니다.


전북 김제에 금산교회라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기역 자 모습의 아주 오래된 예배당을 아직도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미국 출신의 선교사 테이트 목사가 조덕삼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며 시작되었습니다. 테이트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조덕삼이란 분이 자신의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내어놓았습니다.


이후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이자 마부였던 이자익이라는 사람을 전도하게 됩니다. 교회는 날마다 부흥하였고 테이트 선교사 혼자 교회를 운영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를 도와 교회를 지도할 장로 선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대부분은 양반에다 부자였고 교회 운영에도 가장 많은 돈을 내는 조덕삼이 장로로 선출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장로로 선출된 사람은 양반 조덕삼이 아니었습니다. 조덕삼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입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선거 결과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조덕삼이 일어나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더욱 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조덕삼의 말은 단지 말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을 장로로 모시며 그의 인도에 따라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그를 신학교에 보내어 목사로 만들어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2대 목사로 모셨고 자신은 그 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겼습니다.


물론 당시 모든 한국교회가 이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교회에서는 교인들 간의 신분 문제로 인해 교회가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 한국교회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오래된 한국 사회의 신분제도와 계급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가장 앞장섰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은 세상이 갈라놓고 나누어 놓은 세상의 모든 신분 질서, 계급 질서, 그리고 모든 종류의 차별을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부르는 이들이 모인 교회에는 그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는 믿음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이 너무나 익숙하여 관용적인 표현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로마제국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이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말 주()는 영어로는 The Lord 헬라어로는 큐리오스라고 하며 그 뜻은 최고 통치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통치하는 로마제국 시대에 주라는 큐리오스는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 여겼으며 모든 로마시민이 황제를 주라고 부르며 주이신 황제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거나 부르는 것은 로마 황제의 권세를 따르지 않고 새로운 주님이 되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도시에 살던 사람들의 눈에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반역적인 집단으로 여겨졌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세상의 질서를 흔들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는 자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로마 황제에게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17:6b-7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야손이 그들을 영접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최고의 권력과 힘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 돈입니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에게 돈은 저들의 가장 강력한 주님이 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죽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돈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만 받겠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는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대부분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자신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이루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저들이 바란 것이 무엇입니까?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과 해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가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교인들 대부분은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작 저들이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이 자신들의 탐욕이 만들어 낸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고 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예수를 믿는 이들은 원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자신들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이 저들에게 하나님이고 그리스도가 됩니다.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개역개정)


3:19 그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기달릴 뿐입니다. 그들은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수치스러운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이 세상 일에만 마음을 씁니다.(현대어)


바울이 편지를 쓴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164회나 사용했을 정도로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자주 사용했던 그리스도 안에는 공간이나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빈번하게 사용하였던 안에 있다라는 표현은 관계를 나타내고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관계 중에서도 특별히 소속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소속감을 느낄 때 책임감과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강할수록 애국심과 그 나라 국민으로서 정체성이 뚜렷해집니다. 이것은 모든 모임이나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속감을 느낄 때 비로소 자신이 속한 단체나 모임에 대한 책임감과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럼 언제 사람은 소속감을 강하게 느낍니까? 자신이 속한 단체나 모임을 위해 희생했을 때입니다.(군인들)


이것은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느껴야만 교회에 대한 책임감과 정체성이 뚜렷해집니다. 언제라도 수틀리면 또는 목사나 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소속감이 없으니 교회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자유교회 교인이라는 정체성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의 지위나 재물이나 성공이 아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찾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존귀한 인생 살기를 원하며 인생길 중간에 낙오하거나 다른 길로 가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고백해야 하고 예수를 우리의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는 쇼핑하듯 고르고, 맘에 안 들면 언제라도 버리는 교회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도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성숙해가는 것처럼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도 실수와 실패를 겪으며 자라가는 것입니다.


모든 소속감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이 있습니다. 때론 그것이 아무리 사소해 보이고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달란트의 비유나 므나의 비유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들은 대부분 평범한 우리의 일상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일들을 맡기십니다.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남들이 보기에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의 아주 작은 태도나 행동 또는 말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존귀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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