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성경공부
교회3-믿음, 사랑, 소망의 공동체

믿음, 사랑, 소망의 공동체

데살로니가전서 1:1-3

 

세상에서 만드는 하나님 나라 시리즈 세 번째 시간으로 오늘은 믿음, 사랑, 소망의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도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교회와 우리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의 복음 전도로 데살로니가라는 고대도시에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전혀 새로운 에클레시아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정체성은 그들이 발을 딛고 사는 데살로니가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편지가 이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이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에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미사여구나 관용적인 표현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두 주에 걸쳐 설교한 것처럼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 하나님을 아버지라,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그 안에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믿음만으로 당시 로마제국이 만든 황제 체제와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고 유대인들의 오래된 종교 제도를 위협하는 매우 위험하면서도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전까지 데살로니가 도시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매우 파격적이며 위험한 에클레시아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떤 교회였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13절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 사랑, 소망은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기독교 신앙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믿음, 소망, 사랑은 여기에 걸맞은 태도나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그럴듯한 말 잔치로 끝나고 맙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대단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 있는 믿음, 사랑, 소망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가치들을 저들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드러내었습니다. 오늘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 사랑, 소망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가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새 번역 성경은 믿음의 행위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NIV)은 이것을 믿음이 만들어 내는 행위 your work produced by faith’라고 번역했습니다. 다시 말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돈에 목숨을 걸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성공이나 출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짓밟으면서도 오로지 자신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 살아갑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성공이나 출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가진 모든 믿음에는 그것이 어떤 믿음이든지 상관없이 반드시 자신의 믿음을 이루려는 행동이나 태도가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역으로 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행동이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에 대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교인 중에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대단히 거룩한 척, 의로운 척 행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외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외식 역시 그 사람의 숨겨진 믿음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 돋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이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기독교 교리를 믿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쯤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매우 심각한 오해입니다. 물론 구원이 우리의 선한 행위로 얻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의 행위나 행동도 구원에 이를 만큼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 행위나 선한 행동으로 구원을 얻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이시며 그리스도라고 진짜로 믿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맞는 행위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님이라고 진짜로 믿는 사람은 결코 돈이나 성공이나 출세를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는 않습니다.


야고보서는 영혼이 없는 몸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 또한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강조합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거나 믿지 않으면서도 오직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는 외식하는 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외식은 가짜 믿음이며 죽은 믿음입니다.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도시가 어떤 곳입니까? 성공을 위해, 출세를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남보다 풍요롭게 사는 것, 성공과 출세와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도시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 남들과 경쟁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사는 살벌한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이런 도시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으며 살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며 구세주라고 믿으며 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과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말로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말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을 통해 행동을 통해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나타납니다.


다음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나타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NIV)은 이것을 사랑으로 고양된 수고(your labor prompted by love)라고 번역했습니다. 말로 하는 믿음처럼 말로 하는 사랑은 참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는 반드시 행위가 따르는 것처럼 사랑에는 반드시 수고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굳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라 믿지 않아도 누구라도 가능한 일입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굳이 노력이 필요하거나 힘이 들지 않습니다. 저절로 됩니다.


저는 제 아내 인숙씨를 만나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랑에 빠질 때 인숙씨를 사랑하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하거나 힘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저절로 사랑에 빠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냥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처럼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본성이나 감정을 거슬러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에는 사랑해라는 말보다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인 중에는 마음에서 사랑이 우러나오지도 않는 데도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식이나 외식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물론 믿음의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정직한 믿음도 없으면서 그저 사람에게 자신을 자랑하거나 잘 보이기 위해 믿음 있는 척 행동하는 것은, 분명 가식이며 외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과는 달리 사랑은 사랑하는 마음이나 감정이 없는데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가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마음에도 없는 사랑이라도 모든 사랑은 내가 손해 보거나 희생해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과 예의를 갖추는 것을 가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생각이 바른 생각이고 옳은 생각일까요? 저는 절대로 이런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런 의미도 필요도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지금까지 목회하며 교인들을 저절로 사랑하게 된 적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경우 교인들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 했고 때로는 묵상과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신지요? 같은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교인이라고 저절로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듯이 솟아나던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을걸요. 만약 그렇다면 저만 인성 쓰레기인 걸로…….


감정에 대해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매우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감정은 그냥 느끼는 것입니다.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내 감정이나 느낌이 절대로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 사람이 사람마다 다 다른 자신의 감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 관해 옳고 그름을 나누는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그냥 느끼는 것입니다. 감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이고 느낌의 문제입니다. 내 감정에, 내 느낌에 들지 않으면 다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감정은 그냥 느끼는 것으로 그쳐야지 그 감정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가장 진실하고 솔직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다른 태도나 행동을 위선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은 심각하다 못해 매우 위험한 착각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과 생각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에 어긋나는 내 감정이나 느낌이 위선적이고 잘못된 것이며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교인들 가운데 어려움에 놓인 성도가 있으면 교회의 모든 능력과 힘을 다해 그 사람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서로 사랑하는 일에 얼마나 본이 되었으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준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어떤 충고나 권면도 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살전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마지막 세 번째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영어성경(NIV)은 이것을 소망으로 영감을 받은 인내 your endurance inspired by hope’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소망은 막연하게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로마제국에 의해 박해받고 핍박받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들이 받는 박해나 핍박 환난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던 교회였습니다. 저들이 어떻게 로마제국의 모진 박해와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저들에게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저들은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저들이 보여준 인내와 믿음이 여러 교회에 본이 되었다고 칭찬했습니다.


살후1: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물론 세상에 발을 딛고 하는 교인들도 세상을 편하고 쉽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고 남들처럼 쉽고 편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은 쉽고 편한 길 대신 좁고 힘든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 꾸준히 걸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겐 분명하고도 확실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며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에게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그래서 어떤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서도 반드시 견디고 참아 내게 만듭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는 온갖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라는 도시 역시 숱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살며 그곳 방식에 얽매여 지배받던 이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예수를 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살기에 로마제국과 황제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새로운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비록 저들은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발을 딛고 살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완벽하고 완전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한 주님의 교회라고 하지만 연약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이기에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문제투성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로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세상에서는 찾을 수도, 경험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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