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방법
데살로니가전서 2:1-4
세상에서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혹시 우연히 우리 교회 유튜브 예배 방송을 보시는 분들 가운데 제목만 보고 목사가 대단한 전도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을 기대하시고 들으시면 반드시 실망만 크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실루아노 그리고 디모데의 복음 전도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일부 유대인들의 방해로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전하고는 도망치듯 서둘러 데살로니가 도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 일행이 떠났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살전1:7 그래서 여러분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변 지역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참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의 모진 박해와 핍박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두 가지 신앙의 모습으로 주변 지역 모든 믿는 자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주변 지역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길 원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먼저 복음의 본, 신앙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본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 교회는 지역 사회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본을 보여주지도 않고 교회로 데려가려고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자기 교회 교인 수 늘리는 것에 그치고 맙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교회는 많아지고 교인도 늘어났지만 교회가 많아지고 교인 숫자가 늘어난 것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됐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본이 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갈수록 교회에서 본이 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를 꼽으라면 교회나 교인들이 본이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본이 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심지어 남들에게 본이 되는 것을 교만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랑과 본이 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매우 심각한 착각이며 오해입니다. 많은 교인이 “저를 보지 말고 하나님 보고 교회에 나오세요.” 말합니다. 목회자들도 “저를 따라오지 마세요. 저를 본받지 주님만 본받으세요.” 설교합니다. 얼핏 듣기에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대단히 겸손한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부족한 모습이나 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교회에 나쁜 영향을 줄까 염려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교회에서 앞에 나서지 않으려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분명 교회를 위하는 겸손한 마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과 내 믿음이 누군가에 본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겸손을 핑계로 삼아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세상과 사람에게 본이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겸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겸손을 빙자하여 자신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무관심이며 방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하는 것은 흠이 없이 완전무결함이 아닙니다. 어느 누가 흠이 없이 완전무결함으로 본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는 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생각의 변화, 태도의 변화, 삶을 사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흠이 없이 완전무결했기에 주변 지역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역시 다른 교회들과 비슷하게 여러 문제가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변화가 저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이 되는 삶, 본을 보이는 삶을 살라고 하면 많은 교인이 “나는 아직 멀었어요. 나는 아직도 부족해요. 나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해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완전해진 다음에나 본을 보이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본이 되는 삶, 본을 보이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매 주일 온라인 예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매일 계속되는 아침 묵상에 아멘이라고 꾸준히 댓글을 다는 것만으로도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본이 될 수 있습니다. 우상에서 벗어나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면, 아직도 우상에 얽매여 사는 사람에게 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보다 앞선 믿음의 사람을 본받으려는 모습만으로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나를 본받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했습니까? 아니요.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강력하게 권면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전4:16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바울이 스스로 자신의 신앙이 완벽하고 완전했기에 자신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한 것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을 스스로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이며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으며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만큼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히 깨달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이렇게 네 파로 갈라진 고린도 교회를 오직 자신만을 따르는 교회로 만들려고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아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한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육신을 몸을 가지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자신을 통해서만 선포되고 드러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초대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였던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도 없습니다. 본이 되려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본받으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교회는 개인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철저한 개인주의 신앙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 본을 보인다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본을 따르고, 본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는 반드시 마땅한 대가나 희생이 요구됩니다. 많은 교인이 본을 보이는 것을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이유도 본을 보이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하는 대가나 희생을 힘들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가나 희생이 없이 본을 보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 일행이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을 전했습니까?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쫓기다시피 데살로니가 도시에 왔지만 거기서도 여전히 심한 반대와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살전2:2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을 받고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이 친히 본을 보여준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어떤 박해나 핍박이 와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자신이 받아들인 복음이 정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 혼자만 아무 문제 없이 잘 산다고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모두가 함께 잘 살기 위해 서로를 돕고 섬기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어떤 박해나 핍박이 있더라도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씁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고백하기를 자신은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며,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고, 돌로 맞은 것인 한 번이며,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하루를 꼬박 망망한 바다에서 표류했다고 했습니다. 이외에도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자매의 위험을 당해야 했습니다.
고후11:24-25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박해와 핍박 그리고 위험도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박해와 핍박 위험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하는 당연한 대가와 희생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바울이 그리스도라 믿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몸소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대가를 치르는 믿음의 본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축복만 누리려고 하지 복음을 지키고 복음을 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대가나 희생을 치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나 희생이 예전처럼 엄청난 대가나 희생도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 교인은 축복만 받으려고 하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작은 대가나 희생도 감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전까지 저는 교회 재정에 비리가 없는 교회, 교회 건물이나 교인 숫자에 욕심내지 않는 교회, 목사가 제멋대로 목회하지 않고 교인 모두가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런 것이 교회가 마땅히 이루어가야 하는 중요한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건강한 교회의 본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런 것보다 더 본질적인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제가 그것을 놓치고 목회한 것 같습니다. 건강한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교인 숫자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얽매여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하고 강조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회가 제일 우선해야 하는 최고의 사명이며 교회의 본질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들의 행동을 권면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권면에는 반드시 주의해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경우라도 잘못된 생각을 권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자기 확신이나 신념을 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둘째는 복음을 이용해 욕심을 채우려는 불순한 마음으로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는 어떤 경우라도 편법이나 속임수를 써서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전2:3 우리의 권면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잘못된 생각, 불순한 마음, 속임수 이런 것들은 당장 눈에 드러나는 효과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에 보이는 효과가 없거나 당장 맺는 열매가 없다고 해도 이런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음을 싸구려 사이비 복음으로 전락시키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하는 복음은 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복음만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했다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어 많은 교인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살전2:4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복음 전하는 것을 교인 숫자 늘리는 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마트에 가서 전도지 나눠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적인 저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런 것을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먼저 내가 세상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시작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든, 실족하여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든 진지하게 여러분이 믿는 복음을 전해봐야 우리 교회의 문제가 무엇이며 내 신앙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믿음의 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먼저 복음의 본이 되려는 할 때 바르게 전해질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 교회가 본을 보임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