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하는 자의 바른 자세
데살로니가전서 2:4-6
세상에서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바른 자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도 전하는 말씀 가운데 여러분 각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 우리는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교인들 대부분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대부분은 한인 마트에 나가서 전도지나 전도 용품을 나누어 주며 자기 교회를 알리는 것쯤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일부는 외국으로 단기 선교를 나가서는 예수 믿으라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잘못됐거나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는 마트나 길거리에 나가 전도지를 나눠주며 전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또한, 기독교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나라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선교사의 현지 사역을 돕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것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이런 방식은 오늘날 믿지 않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반감을 품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다른 종교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는 공격적인 전도나 선교가 기독교 복음에 대한 거부감이나 적대감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보여준 그리고 바울의 복음 전도로 만들어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교회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 되어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아름다운 본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믿음의 본이 되는 것이야말로 초대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였던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생각도 시도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거나 본을 보인다는 것이 결코 만만하게 여길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본이 되거나 본을 보이는 것에는 반드시 대가나 희생이 요구됩니다. 아마도 목사와 교인들이 본이 되거나, 본을 보이는 것을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본을 보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나 희생을 힘들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본이 되거나 본을 보이는 것을 너무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 보여야 하는 본은 흠이 없는 완전무결함이 아닙니다. 세상 그 누가 흠이 없이 완전무결함으로 본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과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고 반드시 보여야 하는 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생각의 변화, 태도의 변화, 삶을 사는 방식의 변화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흠이 없이 완전했기에 주변 지역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보여준 본은 하나님을 믿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선한 변화가 나타났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바울이 위대한 사도라고는 하지만 흠도 많고 실수도 잦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나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화된 그의 삶은 모든 이들에게 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먼저 내가 세상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변화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정작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남에게 복음을 믿고 변화될 것을 전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오늘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바른 자세와 태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혹시 자신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1도 관심이 없는데 굳이 내가 이런 설교를 들어야 하는지 의문이 드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사명을 부여받은 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사명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옵션이 아니라 필수 사명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사명이라고 해도 당장 마트에 나가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거나 선교지에 가서 예수 믿으라고 구호를 외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을 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럼 복음대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얻은 사람은 누구라도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실루아노 그리고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관원들과 유대인들의 박해와 핍박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살전2:4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마음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을 사는 자 또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입니다.
비록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사람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세는 결코 사람의 환심을 얻으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본이 되는 것과 사람의 환심을 얻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본이 되는 것과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왜 자꾸만 변질합니까?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복음을 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 또는 복음을 사는 자의 바른 자세는 사람의 환심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바른 신앙의 자세이며 태도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교인들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고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앙 생활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은 이런 신앙을 외식하는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인들은 왜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하기 위함입니다.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물론 사람은 누구나 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인정욕구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심각하고 중요한 인간의 욕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외모와 몸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유도 결국 남들에게 잘생긴 사람, 멋진 사람, 섹시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이 돈이나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남들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 또는 실력을 인정받고 자랑하고 싶은 욕구에서 시작됩니다. 교인들이 외식하는 신앙에 빠지는 이유도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물론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욕구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기에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인 사람이 남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려고 하고, 조금이라도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지나쳐서 매사에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며 자신을 거짓으로 포장하고 아첨과 거짓말로 남을 속이려 드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상대방의 좋은 점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므로 자신도 상대방에게서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남을 인정하고 존중함으로 자신도 인정받고 존중받는 사회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남을 무시하고, 남을 깔아뭉개고, 남을 낮추어 자신을 높이고 인정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는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생각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발생하게 합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 남이 나보다 못한 경우에 우월감을 가집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가지게 된 우월감을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남과의 비교를 통해 얻은 우월감은 곧 열등감으로 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천지삐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자신이 만들어 낸 열등감에 상처를 받고는 좌절합니다.
바울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는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의 환심을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영광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살전2:4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맡은 그대로 복음을 전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살전2:6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서나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이것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으면 더 좋겠지만 세상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추구하려고 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 다를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산다는 것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한 마디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환심을 얻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교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신앙 생활합니다.
이것은 단지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던 아주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그 결과 신앙생활이 삶을 변화시키는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경건의 모습을 흉내만 내는 외식하는 신앙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경건의 모습을 흉내만 내는 신앙에는 당연히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니 당연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해도 그 삶에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전이나 믿은 다음이나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으니 그 삶과 신앙이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신앙의 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아첨하는 말을 하지도 않았고 사람의 마음을 얻어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러한 진심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살전2:5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 물론 중요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 역시 우리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집착하고 여기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보다 더 커질 때 목사의 목회와 설교는 교인들의 귀만 즐겁게 하는 아첨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에게 다른 교인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나 다른 교인들이 교회를 위한 나의 수고나 헌신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한다고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이나 평가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복음을 사는 대신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과 박수를 받을지만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바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보여야 합니까?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에 집착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질할 것이고 신앙은 타락할 것입니다. 비록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고,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이며 태도입니다.